1965년, 14회 졸업생 윤태헌 입니다. 이제는 73살을 바라보며, 3학년 5반 옛 동창들이 그립군요.
특히 학교 역사를 요약하신 박항식 님께 감사 말씀을 드립니다.
경서60주념식 동문자격으로참석이모저모 난 경서 29회졸업생ㅋㅋ
용바위(쫓빛)
2010. 11. 4. 12:53댓글수0공감수2



경서중학교에대해 소상히 나와있는 자료가있어서 옮겨왔습니다
100년의 오랜세월의 변화가 서글프기까지 합니다.
경서중학교도 곧 60회를맞이합니다 박항식

▲이승만 대통령과 최근남 문교부장관 학교 방문
◆경기공업중학교 시기 (1945∼1951) 1945년 8월 15일, 학생들은 정오에 일왕(日王)의 특별 방송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각 교실이나 운동장, 혹은 공장 등에서 스피커에 귀를 기울였다. 교실에서 담임의 감독하에 방송을 들은 학생들은 무조건 항복한다는 일왕의 울음 섞인 성명을 듣고서도 환호할 수 없었다. 일본인 교사와 학생들 중에는 울음을 터뜨리는 사람들도 있었으므로 교실 분위기는 침통했으며, 한국인 학생들은 이런 갑작스러운 상황의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당황했기 때문이다. 한국인 학생들은 교문을 나선 후에야 거리에 물결치는 태극기를 보고 해방을 실감할 수 있었다.
폭격기가 자주 출몰하던 당시에 학교는 넓은 운동장 때문에 쉽게 눈에 띄어 폭격의 표적이 되기 십상이니 운동장에 채소 등을 심어 은폐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었는데, 이에 따라 8월 15일 당일, 일부 학생들은 운동장을 밭으로 바꾸는 작업에 동원됐다가 운동장에서 일왕의 항복 방송을 듣기도 했다. 학생들은 조병창을 뛰어나오며 만세를 외쳤고, 여기저기서 터져나오는 만세 소리가 철조망 밖 동네 사람들이 거리로 물밀듯 쏟아져 나오며 외치는 만세 소리와 어우러져 지축을 흔들었다. 그러나 학생들은 당시의 정세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려웠고, 급변하는 상황에 일종의 두려움도 느껴 8월 15일 밤을 뜬눈으로 새우다시피 하고 다음날 해단식(解團式)을 가진 후 기차편으로 서울로 돌아왔다.
여름방학은 9월 1일부터 실시되던 것이 당시의 학제였으나, 해방을 맞은 학생들은 언제 개학한다는 기약도 없이 방학에 들어갔다. 기약없는 무기휴학(無期休學)이었다. 경기공립공업학교가 수업을 개시하라는 공문을 받은 것은 1945년 9월 28일이었다. 당장 10월 1일에 개학을 해야 했으나 실정이 순조로울 리 없었다. 다수의 일본인 교사와 50%에 달하던 일본인 학생이 일시에 학교를 떠났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반을 구성하기가 어려웠으며, 수업을 이끌 교사도 부족했다. 게다가 그나마 학교에 나올 한국인 학생의 파악도 쉽지 않은 형편이었다. 일제 강점기에 강요된 창씨개명으로 한국인 학생 대다수가 성(姓)을 바꾸고 있었는데, 해방이 되어 본래의 성과 이름을 되찾아 나올 것이 예상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새로 반을 편성하고 학적부를 정리하자면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이 뻔했다.
이에 학교는 반 구성을 위해 전수과를 폐지하고 원하는 사람은 본과에 합류시켰으며, 학무국의 지침에 따라 일본인 학생 수의 범위에서 외부의 학생도 신규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공업학교를 중학교로 바꾼다는 지침에 따라 교명(校名)을 “경기공업중학교”로 변경하고 목제공예과(木製工藝科)를 조가과(造家科)로 합쳐 기계과 토목과와 함께 3과를 개설한 다음, 목요일인 10월 4일에야 개교할 수 있었다.
한편 미군정청 학무국은 1945년 11월 23일에 교육계와 학계의 권위자 100여 인을 초청해 조선교육심의회를 구성했는데, 이 회의는 종래의 이원제적 교육과정을 일원제적 과정으로 바꾸고, 4년제 중학교 과정을 6년제 고등중학교 과정으로 변경했다. 그리고 학기제를 개정해 재래의 3학기 과정을 폐지하고 1년을 2개 학기로 나누되, 1학기를 9월부터 다음해 2월까지, 2학기를 3월부터 8월까지로 정했다. 이 제도는 1946년 9월부터 실시됐다.
새로 바뀐 교육 제도에 따라 경기공업중학교도 4년제에서 6년제로 개편됐다. 그때까지는 4월에 입학하거나 학기가 시작되어 9월까지 1학기를 보내고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2학기를 보내던 터였으므로, 이 새로운 제도가 공표된 1946년 3월은, 4년제 경성공업직업학교로 1942년에 입학한 학생이 졸업을 맞이하고, 1943년에 입학한 학생이 4학년이 되며, 1944년에 성서공업중학교(경기공업중학교)로 입학한 학생이 3학년이 되던 때였다. 따라서 1942년에 입학한 학생들은 그대로 졸업했고, 1943년에 경성공업직업학교로 입학한 학생들이 1946년 3월에 4학년으로 진학함으로써 6년제 경기공업중학교 제1회 졸업생이 됐으며, 경기공업중학교 첫해인 1944년에 입학한 학생들은 제2회 졸업생이 되는 기현상이 일어나게 됐다.
또 한 가지 특기할 사실은 1946년 3월에 진급해 1학기를 맞이한 학생들이 학기가 변경되면서 동년 9월에 또다시 1학기를 보내게 된 사실이다. 1944년 및 1945년 입학생은 이로써 한 학기씩 손해보게 됐다.
고백한 교장은 교사의 부족으로 인한 수업 결손을 막기 위해 당시 서울대나 연세대, 한양대 등에 4학년으로 재학 중이던 인재들을 교사로 초빙했다. 그리해 고도의 난이도를 가진 학과 내용이 교수됐는데, 역학 과목의 경우를 예로 든다면 항공역학, 유체역학, 기체역학, 제도역학 등이 지금의 전문대학 수준으로 강의됐다. 이때 우리 학교 졸업생의 대학 진학률은 40%에 달했으니 가히 최고의 명문중학교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미군정청 학무국은 1946년 11월에 “교수요목”을 발표함과 아울러 교과서 편찬 사업에 주력했다. 교수요목이 중점을 둔 사항들은 교과 지도 내용의 상세화, 분과주의 채택, 체계적 지도를 위한 지력 배양, 홍익인간의 이념에 의한 애국애족 교육과 일제 잔재의 청산 등이었다. 우리 학교도 1947년 1학기부터 새로운 교육 과정에 따른 교육을 실시했다. 초급중학교 과정 3년과 고급중학교 과정 3년의 6년제 중학교 과정이었다.
그러나 1948년 8월 15일 제1공화국이 출범하자 학제는 다시 여러 차례 개편을 겪었다. 1949년 12월 31일 법률 제86호로 공포된 교육법에서는 6년제 중학교가 4년제의 중학교와 2년제의 고등학교로 분리됐다. 그러나 이 제도는 시행도 보지 못한 채 1950년 3월 10일부로, 중학교 4년의 연한을 그대로 두고 고등학교를 3년 과정으로 하도록 다시 개편됐다. 수업 연한을 둘러싼 문교 행정은 갈팡질팡하고 있었지만, 우리 학교는 9월에 신입생을 모집하면서 새 학제에 따라 학교를 분리할 준비에 착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6월 25일에 전쟁이 일어나면서 모든 준비는 수포로 돌아갔다. 한편 이에 앞서 1949년 12월 7일 고백한 교장이 성동공업중학교(지금의 성동기계공업고등학교)로 이임하고, 12월 8일 용산중학교장이던 양만영 교장이 부임했다.
1951년 3월 7일 부산에 피난 중인 국회는 교육법을 개정 통과시켜, 그 동안 수차에 걸쳐 변경됐던 기간학제를 6-3-3-4제로 확정하고, 3월 20일자로 기존의 6년제 중학교를 3년제 중학교와 3년제 고등학교로 분리시키도록 했다. 이 학제의 실시로 말미암아 중학교 교육은, 고등학교 평준화가 실시될 때까지 고교 입시를 위한 준비 과정으로 변질됐으며, 학부모들은 입학금의 이중 부담을 안게 됐다. 본교는 이 새로운 법에 의해 1951년 9월 1일자로 경서중학교와 마포공업고등학교로 분리됐다. 그리고 이 때 교육법 중 개정법률(제178조)을 공포해 학기초 9월 안을 폐기했다. ◆마포공업고등학교·경서중학교 시기 (1951∼1953) 1951년 9월. 본교의 1∼3학년은 경서중학교에 속하고, 4∼6학년은 마포공업고등학교에 속하게 해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분리됐다. 경서중학교 교장은 따로 두지 않고 마포공업고등학교 교장이 중학교 행정을 함께 관장했으며 교감만 따로 두도록 했다. 말하자면 완전한 분리가 아니라 병설 분리였다. 이에 당시의 교장인 고백한 선생이 양교(兩校)의 교장직을 겸임했다. 그러나 당시는 피난 시절이었고, 서울에서는 훈육소에서, 부산 등지에서는 전시연합학교에서 학업이 이루어지던 때였으므로 두 학교로의 분리가 체계적이고 실질적인 사무에 의해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이미 3월 중순에 서울이 수복됐으므로 적지 않은 시민이 서울로 돌아왔지만, 한강도강증을 얻지 못한 사람들은 강북에 집이 있어도 여전히 한강 이남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 일부는 갈수기(渴水期)의 한강을 헤엄쳐 건너기도 했으나 어린 학생들이 있는 집안은 그럴 엄두를 내기 어려웠다. 중학교 정도 되는 학생들은 학업을 계속하기보다는 어려운 피난 생활의 생계를 마련하기 위해 여기저기 일자리를 알아보고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더 분주했다.
8월에 접어들어 몇몇 교직원이 개교를 준비하면서 학생들의 등록을 받았으나 전 학년을 통틀어 십 수 명의 학생들만 접수했고, 이들만으로라도 수업을 재개하기 위해 전쟁 중에 완전히 파괴되지 않고 남은 교실을 서둘러 정비했다. 등록한 학생은 9월부터 실시되는 새로운 학제에 따라 1∼3학년은 중학교로 두고 4∼6학년은 고등학교로 나누어 편제했으나, 학생 수가 얼마 되지 않은데다가 9월 20일에 훈육소가 개설됐으므로 집에서 가까운 훈육소를 다니도록 조처했다.
이러한 사정은 부산(釜山)의 피난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피난 학교는 마포공업고등학교의 부산 분교로 유지됐지만, 학제의 변경에 따른 구분을 실행하기는 곤란했다.
이와 같이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다시피 했던 과도기의 경서중학교와 마포공업고등학교는 1953년 3월 31일에 훈육소가 해산되고 4월 1일 정식으로 개교하기까지 계속됐다. 마포공업고등학교는 개교 후 1개월만 존치된다. 마포공업고등학교는 1953년 5월 1일 경기공업고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했다.
경서중학교는 경기공업고등학교가 시설의 복구에 힘을 기울여 교실 건물을 새로 지은 1954년에야 아현동 교사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교실이 부족해 두 학교의 교직원이 같은 교무실을 쓰면서 별도로 마련된 중학교 교실로 들어가 가르치는 형태였다.
경기공업고등학교장 겸 초대 경서중학교장으로 1954년 11월에 충암 이인관 선생이 부임했다. 경서중학교에 독자적인 교장이 부임한 것은 1964년 3월 제2대 김원규 교장이 부임하면서부터의 일이다. 초대 이인관 교장은 1961년 1월에 이임하고 서정권 교장이 경기공업고등학교장으로 부임했으나 경서중학교장을 겸임하지 않았으므로 경서중학교장직이 그 후 3년 여 동안 공석으로 있다가 김원규 교장이 제2대 교장으로 부임한 것이었다.
1968년 10월 8일, 경서중학교는 마포구 공덕동 105번지에 새 교사를 마련해 그 동안 정든 아현동 시절을 마감하고 이전했다. 이에 본교와는 전혀 다른 별개의 학교로서 따로 발전하게 됐다. 그러나 경서중학교는 그 연혁의 기원을 1910년 4월 15일에 설립된 어의동공업전수학교에 두고 있고, 경기공업중학교에서 교명을 개칭한 것으로 학교의 역사를 파악하는, 우리 학교의 분신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경서중학교는 다시 1993년 3월 1일에 강서구 가양동 1483번지 소재의 신축 교사로 이전해 오늘에 이른다.
경서중학교는 특히 체육 분야에서 괄목할 성적을 거두어, 88올림픽이 열리던 1988년에는 전국 소년체육대회에서 단체 종합 1위를 차지함으로써 이 대회 6연패를 기록했고, 이듬해인 1989년 5월에는 전국 체조선수권대회에서 종합 1위에 올라 체조 명문교로서의 위상을 과시했다. ▲경기공업고등학교 시절 교가, 깃발과 아현동 교사
◆경기공업고등학교 시기 (1953∼1963) 1953년 5월. 우리 학교는 마포공업고등학교라는 이름을 버리고, “경기공업고등학교”로 개명했다. 그러나 앞서 살핀 것처럼, 분리된 경서중학교와는 동거(同居)하는 상태였다. 경서중학교와의 동거는 경기공업고등학교가 1963년 3월에 경기공업고등전문학교로 이름과 체제를 변경한 후에도 당분간 계속되다가 경서중학교가 학교 부지를 따로 마련해 이전하는 1968년 10월 8일까지 계속됐다
1953년 6월 15일자 문교부 장관 훈령에 의해, 부산 피난 시절에 발족된 후원회를 사친회로 개편했다. 사친회는 전후의 교육 시설 확충과 교원 복지의 향상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파괴된 학교 시설의 복구에 많은 기여를 했다. 경기공업고등학교에도 사친회가 조직되어 활발하게 활동했다.
1954년 11월 충암(沖岩) 이인관 교장이 취임했다. 이 교장은 일본의 니혼대학(日本大學) 지력과(地歷科)를 나와 경기중학교와 서울공업중학교 등에서 역사 과목과 사회 과목을 담당했던 분으로, 한국전쟁 때 납북되어 미아리고개를 넘던 중 사상범(思想犯)과 잡범(雜犯)을 가리는 자리에서 다행히 잡범으로 오인되어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왔었다. 이 교장은 당시 문교부 장관이던 이선근과 친분이 두터워 학교의 복구와 시설의 정비에 문교부의 많은 지원을 얻었다. 그는 1965년 11월 15일 충암학원을 설립해 여생을 교육에 바친 교육자이기도 하다. 그는 1961년 1월에 이임할 때까지 6년 3개월 동안 재직하면서 학교 시설의 복구와 체제의 정비에 지대한 공을 남겼다.
1955년 8월 중립국감시위원단이 물러가고 9월 6일에 포로 송환이 끝난 후, 문교부는 각급 학교의 시설 복구를 위한 지원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학교 시설의 복구는 전쟁을 치른 후의 피폐한 경제 상황에서 우리나라의 힘만으로 추진하기 어려운 작업이었다. 학교에 사친회가 있어 교원의 처우를 개선하고 학교의 시설의 복구하는 데 기여했지만 역부족이었고, 정부의 예산도 넉넉하지 않아 학교 시설의 복구에 소요되는 막대한 경비를 부담하기 어려웠다. 시설의 복구는 미국을 비롯한 우방의 원조에 상당 부분 의존해 추진됐다. 유엔은 한국부흥위원단(UNKRA)을 파견해 지원했고, 국제협력처(I.C.A)를 비롯한 미국의 원조도 컸고, 20억 달러 규모의 각종 외국 원조가 투입되어 국민들의 재건 의욕을 북돋아 주었다. 경기공업고등학교의 시설 복구에는 특히 UNKRA의 지원이 컸다. 1956년 3월에 도서실을 새로 세우는 공사가 마무리되자, UNKRA의 원조로 실습 공장의 신축 공사가 착공됐다.
1960년 1월부터 3월 15일 선거일까지는 교육계 전반이 자유당의 부정 선거에 동원되어 교육 사상(敎育史上) 유례없는 혹사를 당한 치욕의 기간이었다. 이른바 정치가 교육을 이렇게 짓밟았던 적은 일찍이 그리고 그 후에도 다시없었다. 3·15선거가 치러졌으나 그것은 폭압(暴壓)과 공갈(恐喝)과 음모(陰謀), 협잡(挾雜)이 난무하는 무질서 그 자체였다.
1960년 4월 이병도(李丙燾)가 제7대 문교부 장관으로 취임했다. 그리고 3·15부정선거에 관련된 128명의 교육감이 축출됐다. 이는 사상 유례없는 교육계의 참상으로서, 교육의 정치적 중립에 대한 큰 교훈을 남긴 사건이었다. 학교의 운영에서 정부는 불신의 대상이 되어 이미 통제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교원노조가 설립되어 자치적인 학교 운영을 주장했으며, 학생들은 민주(民主) 지상(至上)을 외쳤다. 그리해 학생들의 인격과 정신을 존중한다는 것이 당시 교육계의 새로운 흐름으로 잡아갔으나, 아직 민주적 생활 방식을 익히지 못한 학생들에게 무한에 가까운 자유를 준다는 것은 곧 혼란과 격동을 의미할 뿐이었다.
1960년 8월, 이병도 장관이 4개월 만에 물러가고 제8대 문교부 장관으로 오천석이 취임했다. 오 장관은 취임사에서 “젊은 세대의 피로 이루어진 4월혁명”의 의의를 높이 평가하고, “이제 남은 일은 하루바삐 모든 제도와 시책을 민주화하는 일”이라고 하면서 제일 우선해야 할 문교시책으로 “학원의 민주화”를, 다음으로는 ‘중앙집권적인 행정 체제로부터 지방분권적인 행정 체제로의 개편’을 제시했다. 오 문교는 또한 단선형 학제를 개정해 실업계 중학교를 5년제로 개편하는 방안도 모색했으나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소장이 주도하는 군사쿠데타가 일어나 민주당 정권이 무너짐으로써 법 개정의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다.
군사정부는 실업 교육의 진흥 방안을 여러모로 모색했다. 1962년에 당시의 문교부 수석장학관 조기환, 경제기획원 조정국 기술과장 전상근 등이 실업 교육이 당면한 여러 문제점과 현실을 분석한 바 있었는데, 이는 그 뒤의 실업 교육 정책을 수립함에 있어 큰 도움이 됐다. 이들은 실업 교육의 개혁을 위해, 실업 교육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완수에 소요되는 인적 자원을 확보하는 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는 점과 산업 개발과 생산 기술 향상을 위해 실업계 학교 수준의 질적 향상을 도모해야 한다는 두 가지 기본방침을 제기했다. 이 같은 방침에 따라 공업고등학교 교육이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해 당시의 문교부 장학관 김옥성이 “첫째, 교육 과정에 있어서 수업 시간의 50%를 실습 공장에서 수업해야 한다. 즉 39시간의 수업을 한다면 17시간은 실습 공장에서의 수업 시간이고, 5시간은 기술 이론을 수업하며, 나머지 17시간은 교양 과목의 수업이 이루어지도록 배정해야 한다. 둘째, 공업고등학교에서는 상급 학교로의 진학을 위한 특별 지도를 일체 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셋째, 산업계의 요구에 적응하는 졸업생을 내기 위해 이론과 실제의 경험이 있는 직원 진용을 구성해야 한다. 넷째, 졸업 후 기술자격제도에 의해 소정의 자격 시험을 거쳐 기술공 자격을 부여하는 한편, 취업을 보장해야 하며, 공업고등학교에 입학하는 자는 졸업 후에 반드시 산업계로 진출하는 것을 조건으로 해야 한다.”는 4가지의 구체적인 실행안을 마련했다.
경기공업고등학교 시절에 특기할 것은 야구부의 활동이다. 1954년 이인관 교장이 부임한 직후 야구부를 창설했는데, 기공(畿工) 야구부는 창설된 지 3년 만인 1958년에 제13회 청룡기고교야구선수권대회를 제패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 우승은 학교만의 영광이 아니라 온 서울 시민의 영광이기도 했다. 그 동안 고등학교 야구대회의 우승은 인천 부산 등지의 지방 학교가 독차지하고 있던 터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공 야구부의 우승은 서울 야구시대를 알리는 서막으로서 큰 의미를 지녔다. 기공 야구부가 우승하고 학교로 돌아오는 길에는 아현동 일대의 주민들이 나와 만세를 부르며 환영해 줬다.▲경기공업고등학교 시절 야구부의 모습
그리고 같은 해 10월 10일부터 3일간 서울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제12회 전국지구대표고등학교야구쟁패전”(동아일보·대한야구협회 공동주최, 일명 “황금사자기고교야구선수권대회”)에서도 우승했는데, 결승전에서 맞붙은 경남고는 그 동안 4번이나 우승한 경력이 있는 강팀이었다. 이때 기공 야구부는 경남고를 5 : 0으로 Shutout시켰다. 기공 야구부는 1962년 제16회 전국지구별초청고교야구쟁패전에서도 또 우승하여 황금사자기와 순은 1관 7백 돈의 거대한 우승컵을 차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