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생성(Ecclesiogenesis)을 향한 변형연습(The Transforming Praxis)이란?
본 논문의 제목은 뉴욕 신학원에서 목회학 박사학위 프로그램을 담당하고 있는 Dr. T. Richard Snyder의 사회변혁과 교회의 역할에 대한 저서, Once You Were No People 와 남미 브라질의 빈민을 위한 선교 경험에서 산출된 현재의 거대한 교회조직을 재 평가하면서 미래의 하나님 나라를 위한 새로운 교회를 현 교회의 전통 위에서 재 발명하기 위한 기초(基礎) 공동체(共同體) 운동(運動)의 내용을 정리 발표한 Fr. Leonardo Boff 신부(神父)의 저서 Ecclesiogenesis 에서 비롯한다.
서론에서 밝혔듯이 이중문화 결혼 한국여성은 비인간화(非人間化) 하는 경험 즉 (1) 正體性의 疎外 (Alienation from Self-Identity)와, (2) 關係自我의 疎外 (Alienation from Relational-Self), 그리고 (3) 責任自我의 疎外 (Alienation from Responsible-Self)를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세 가지 소외 형태는 한국에서 결혼해서 미국에 도착하여 정착하면서 시작되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알고 있으나, 사실은 이중문화 결혼 여성의 성장과정에서 부터 이러한 소외현상을 경험했고,1 이러한 삶의 세 단계를 반복 경험하고 있으며, 그 이상의 인간화된 삶 즉 소외에서 탈피하는 삶에 대하여 오히려 적응이 쉽지 않을 뿐 만 아니라 두려워 하기 조차 함을 발견했다.
이들은 <1> 개인 성실과 책임성으로 부터 소외당한 인간성으로 낯선 사람들과 환경 속에서 오는 문화 충격과 부적응은 이중문화 결혼 한국 여성들의 부부생활, 가정 생활, 더 나아가서는 사회생활에 더욱 말할 수 없는 압박(OPPRESSION)을 주며, <2> 이중문화 가정의 부부가 이러한 압박을 견디지 못하면 인간 상호간의 존중으로 부터의 소외당했다고 믿는 상태에 이르고 만다. 대부분의 이중 문화 부부가 이혼에 이르며, 이혼에 이르고 나면, 여인들은 낯선 곳에서의 사회생활 경험의 부족함과 미 사회에 대한 정보 부족으로, 그들의 빈곤은 생존 문제에 까지 이르고 만다. 끝으로 <3> 이러한 이중문화 결혼 한인 여성의 소외 문제는 그들 자신에서 비롯되기 이전에 이들의 부모에게 있었던 문제로 그들이 어린아이 시절에 몸 담았던 가정환경에서 형성된 문제로 인한 희생양인 것도 있다. 또한 미국 땅에서 그들이 의지할 곳 없이 되었을 때, 한국인 이민 공동체 속에 인간다운 삶의 새 출발을 위한 협조와 이해가 없다는 것이다. 더우기 이들은 같은 한국인 이민 자임에도 불구하고 “삼등인생”으로 천하게 취급당하고 있다. 한인 이민 사회에서는 그들을 위한 아무런 조직이나 권익 옹호 단체도 없는 형편이다. 따라서 이 단계에 이르면 무기력해지며 자신과 사회에 대하여 혼돈을 갖고 끝내는 술집 종업원, 마사지 팔러, 거리의 여인, 마약사용(판매), 정신병원, 감옥, 심지어는 홈레스로 전락하는 혼돈과 무기력(POWERLESS)의 단계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이중문화 결혼을 한 한국인 여성의 소외로 인하여 당하는 고난의 모습인 것이다.
1. 소외란 무엇인가?
“교회 생성을 위한 변형 연습”이 다루고 있는 “소외”란 무엇을 말하는가? 소외(疎外, ALIENATION)란 새 국어 사전에 의하면 명사와 타동사로 쓰이며, 그 의미는 “서로 사이를 벌어지게 하여 물리침 (ESTRANGEMENT)”이며 그 동의어로는 소척(疏斥)과 소원(疎遠)을 들고 있다.2 소원(疎遠)의 의미는 “서로 정분(情分)이 성기어 사이가 탐탁하지 아니하고 먼 것”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그 동의어로는 소적(疏狄)을 들고 있다.(3)
Webster’s New Universal Unabridged Dictionary에 의하면, 소외란 “<1> 그 소유권을 법에 있어서 명의변경(名義變更)하거나 재산을 타인에게 합법적으로 양도(讓渡)함을 말한다. <2> 소외되여진 상태를 말한다. <3> 심정이나 애정이 버성김, 사이가 나빠져서 멀어짐, 혹은 물러남, 탈퇴(脫退), <4> 정신착란, 황홀(恍惚), 광희(狂喜), 교란(攪亂), 발광(發狂), 미친짓(狂氣)”로 나타나 있다.(4)
New Encyclopaedia Britannica 에서는 사회과학이 말하는 “소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5) 한 사람의 주의환경이나 일 또 일의 생산, 더 나아가서는 심지어 자신으로 부터 멀어지거나 분리 단절되는 기분의 상태를 두고 일컫는다. 다음과 같이 가장 보편적인 소외의 6가지 의미를 소개하고 있다. <1> 소외란 무력함(POWERLESSNESS)을 의미한다; 자신의 운명이 자신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 밖에 있는 외부적 기관이나, 운명, 행운, 혹은 구조적 조직에 자신의 운명이 달려 있다고 본다. <2> 두번째로, 소외는 의미없음(MEANINGLESSNESS)을 의미한다; 이해력 부족이나, 세계적인 일이나 혹은 개인 인간관계에 있어서 현재 계속적으로 지배하는 행동의미, 혹은 생의 목적상실이 일반화된 감각등을 말한다. <3> 세째로, 소외란 규범이 없음(NORMLESSNESS)을 말한다; 인간행위를 위한 사회 공동 치유(治癒) 처방책(處方策)들을 위한 헌신이 결핍(缺乏)된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사회상식을 예사로 벗어나는 일이나 불신용(不信用), 멋대로의 개인 경쟁등이 일어난다. <4> 넷째로, 소외란 문화적 소원(疎遠, CULTURAL ESTRANGEMENT)을 의미한다; 사회 안에 기존 가치관념으로부터 제거(除去)됨을 의미한다. 예를 들자면 관례적인 기구나 기관들을 향하여 반항하는 지식인이나 학생들 속에서 찾을 수 있겠다. <5> 다섯째로, 소외란 사회적 고립(孤立, SOCIAL ISOLATION)을 의미한다. 사회관계에 있어서 제외(배척)됨이나 외로운 감을 말한다. 예를 들자면, 소수민족들을 들 수 있다고 하겠다. <6> 여섯째로, 소외란 자기고립(自己孤立, SELF-ESTRAGEMENT) 을 의미한다. 아마도 가장 어려운 정의며 주된 의미라고 볼 수 있는 것으로, 개인이 자신과의 관계에 있어서 도저히 미치지 못한다고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소외에 대한 사고가 서양의 사회과학분야에서 인정되기 시작된 때가 1935년 이후였지만 19세기와 20세기의 고전적 사회학자 Karl Marx, Emile Durkheim, Ferdinand Tonnies, Marx Weber, 그리고 Georg Simmel등의 저술등에 은연중에 혹은 명백히 존재해 있었다.(6)
자본주의 아래 소외당한 노동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맑스는 이 말을 가장 유명스럽게 사용한 장본인이 되였다. 소외당한 노동이란(?): <1> 일이 자발작이고 창조적이기 보다는 강제적이며, <2> 일하는 사람이 일의 과정을 결정하는데 거의 참여할 수가 없다든가, <3> 노동의 생산이 노동자가 아닌 다른 사람에 의해서 몰수되어 노동자의 의사에 반해 사용되는 경우라든지, <4> 일꾼 자신이 노동시장의 상품이 되어 버리는 경우를 말한다. 따라서 맑스의 소외 개념은 인간이 일에 있어 그의 ‘종(種)의 존재 (SPECIES BEING)’를 성취하지 못하는 사실로 이루어 진다고 본다. 즉 이것이 바로 맑스가 말하는 불가지(不可智)에 빠진 인간의 본질인 것이다.(7)
이러한 Marx주의 전통은 소외의 한 가지 흐름 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두번째의 흐름은, 소외를 막을 수 있는 전망에 대하여 훨씬 덜 낙관적이지만, 소위 ‘대중사회(MASS SOCIETY)’ 이론이라 일컽는 것으로 형성되었다. 19세기와 20세기 초기에 일어났던, 산업화에 의한 혼란을 관찰해 볼 때, Durkheim과 Tonnies 그리고 나중에는 Weber와 Simmel 까지도 각자 나름대로, 잇달아 일어나는 공동체감의 상실과 전통적 사회가 사라져감을 슬퍼했다. 현대인은 이전에 경험해보지 못했던 ‘고립(ISOLATION)’을 맛보게 되었다. 즉 관료적인 질서나 새로운 이론적 근거 없는 상태에서, <1> 도시화 되가는 대중 속에서 익명(ANONYMOUS)과 비인간적 (IMPERSONAL) 경험을 맛보며, <2> 옛 가치로부터 뿌리가 뽑혀나가는 경험을 하게 됐다.(8)
아마도 이에 대하여는 Durkeim이 말한 ‘ANOMIE’ 정의가 가장 분명한 정의라 본다. 이 말은 희랍어 ‘ANOMIA’에서 비롯된 말로서 ‘무법(無法, LAWLESSNESS) 이라는 원래의 뜻을 지니고 있다. 이는 사회 규범을 묶어 나가는 것의 ‘분열(分裂, Disintergration)’과 만연해가는 ‘개인주의(個人主義, INDIVIDUALISM) 로 성격짓는 사회 상황을 가리킨다. Weber와 Simmel이 이러한 Durkheim의 이론을 더 발전 시켰다. Weber는 사회 조직 속에 합리화(RATIONALIZATION)와 형식화(FORMALIZATION) 를 향한 근본적 표류를 강조하면서, 인간관계가 희박해지면서 비인간적인 관료성이 커진다고 했다. 또한 Simmel은 한편의 주관작이고 개인적인 삶과 또 다른 한편의 성장해가는 객관적이고 익명(匿名)적인 삶과의 긴장을 강조했다.(9)
앞서 말한 소외에 대한 분류, <1> 무력(無力, POWERLESSNESS), <2> 무의미 (無意味, MEANINGLESSNESS), <3> 무명(無名, NORMLESSNESS), <4> 문화적 소원(文化的 疎遠, CULTURAL ESTRANGEMENT), <5> 사회적고립(社會的孤立, SOCIAL ISOLATION), 그리고 <6> 자기고립 (自己孤立, SELF-ESTRANGEMENT) 은 개괄적이고 더욱 발전된 개념 을 내기 위한 길 안내잡이 일 뿐이였다. 예를들자면, 자기소원(自己疎遠)의 경우 한 인간이 여러가지의 아주 다른 경로를 통해서 ‘단절(斷絶)’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 후, 정의와 가설이 판이하게 발전되었다. 두 가지의 대조적인 가설은 <1> 규범성과 <2> 주관성이다. 첫째로 Marx의 전통 가까이 하고 있는 미국의 Herbert Marcuse와 Erich Fromm이나 불란서의 Georges Friedmann와 Henri Lefebvre등은 소외를 규범적 개념으로 보면서, 인간성에 근거한 어떤 원칙의 빛 아래서 일과 사건들의 고착화된 상태를 비판하기 위한 도구, 즉 ‘자연법’이나 ‘도덕원칙’과 같은 것이라 보았다.(10)
둘째로, Marx 이론가들은 소외를 개인 의식으로부터 독립된 객관적 상황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즉, 직장에서의 ‘행복한 로봇트’가 되는 것은 일하는 사람의 일의 경험이 받아들여짐에 상관없이 소외당하는 것을 말한다.(11)
다른 한편에서는, 대부분 미국의 경험론 학자들과 저자들은 소외란 사회 심리적 사실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즉 소외는 무력(無力)함의 ‘경험(經驗, EXPERIENCE)’이고, 소원(疎遠)의 ‘감각(感覺, SENSE)’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가정은 Robert K. Merton과 Talcott Parsons등의 이론가들이 조사한 이상성격자 행동의 분석과 설명속에 자주 나타나는 현상이다.(12)
T. Richard Snyder는 소외된 인간은 이름이 없으며, 참 인간 대우를 받지 못하므로 참 인간이라 할 수 없다고 보면서, 소외의 형태를 다음과 같이 여섯가지로 분류를 했다: <1> 이웃으로 부터의 疎外13; 흑백인 사이의 구획, 앵글로와 히스페닉의 구분, 젊은이와 늙은이와의 구분, 부자와 가난한 자와의 구분, 유대인과 이방인과의 구분, 개신교와 구교신도들과의 구분, 토백이와 새로 이사온 사람들의 구획 속에 서로의 ‘미움으로 나누어진 벽’이라 볼 수 있다. 이는 심지어 국수주의나, 이미 지나간 동서의 냉전, 더나아가서, 남북의 심화된 경제차등에 까지도 언급할 수 있다고 본다.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구획은 대부분이 그 규모가 적고 국부적인 것에 지나지 않으나 이것이 쌓이면 크게는 남아프리카 연방의 인종차별정책이나, 나치 정권 아래 유대인 학살이나, 현대 경제, 서로 위협하는 이웃으로 서게 됨을 말한다. 한국의 기지촌 여인들은 일반 사회로 부터 노예화의 성장된 소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는 인간 서로가 소외로 말미암아 소외되여, 미군병사들이 관계하는 특수 구룹의 여성으로 취급받고 있다. 미국내에서 이중문화 가정의 한인 여성들이 이혼 후에 한국 이민사회 내에서 음성적 공동체인 마사지 팔러에 몸 담고 생계유지를 하며 살아간다. 이것이 이민 한인사회와의 소외현상이며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인종차별과 여성학대의 대표적인 경우가 되는 것이다.
<2> 일로부터의 疎外;(14) 일은 필요 악으로서 현대 인간은 노동을 팔아 살아가고 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먼저 계획하시고 해동하셨으며, 창조하신 후에 보시며 즐기셨으나, 인간은 그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을 뿐 만 아니라, 일의 결과에도 만족치 않으며 또한 볼 수도 없는 형편이다. 따라서 Marx는 타인과 자신과 더욱이 세상으로 부터의 소외가 노동자들의 인간관계로 부터 노동 수단으로 전락시켰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근본적인 인간 소외의 상태를 감소시킬 수 있는 대중이, 생산 수단의 소유권을 갖고 조정하는 소수의 손 안에 있기 때문이다. Marx는 다른 모든 소외의 형태들은 바로 이러한 근본적인 소외의 원인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15)
이민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직업 전환으로 인해 일의 결과에도 만족지 않고 있는 것을 본다. 인간 관계보다 노동 수단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에 이중문화 가정에서 실패한 여인들도 한인사회와의 관계 수축보다는 노동 수단으로 자신을 사용하여 생계유지를 하게된다.
물론 Marx가 인간의 경제적인 삶 만을 취급한 한계를 우리는 너무나도 잘아는 사실이다. 그는 인간 삶의 여러 다른 측면을 다루지 못했다. 가난과 실직이 범죄를 몰고 오는 것은 사실이나, 중요한 점은 수입 뿐 만 아니라 한 인간이 자신의 삶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역부족일 때 오는 결과가 격노와 파괴적인 행동을 낳는다는 것을 맑스나 그의 추종자들은 간과했던 것이다. 노동성 이해와 그 결과가 우리에게 주는 영향에 대한 맑스주의자들의 분석을 이용하던 하지않던 간에, 우리 대부분은 노동이 소외의한 형태임을 거절할 수 없는 갓은 사실이다.
<3> 環境으로 부터의 疎外;(16)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자연으로 부터의 소외를 직접 경험하게 된다. 자연환경을 지배하기 위해 노력 경주해온 현대 문명은 이제 병마와 두려움, 죽음의 가능성등의 급증으로 위협을 받고 있다. 따라서 다른 어느 시대 보다도 소외가 극대화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자연을 ‘이용될 수 있는 것’으로 마구 취급할 때 환경의 전체성과 균형을 온전히 감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우리는 잃고 마는 것이다. 우리 자신도 일부인 주변 환경으로부터 우리 스스로가 소외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4> 機關으로부터의 疎外;(17) 우리는 선진국인 미국의 국민 보건을 담당하는 구조가 쿠바보다 멀리 떨어져있음을 느낀다.(18) 교육 구조에 문제가 있다. 뉴욕시의 교육정책은 실패했고, 문맹퇴치는 이제 미국의 국가차원의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19) 우리의 필요에 섬기도록 만들어진 기관들이 우리의 삶으로부터 오히여 우리를 소외시키고 있다.
<5> 自身으로부터의 疎外;(20) 부서진 거울로 자신을 바라보면 거울 속의 자신을 똑똑히 볼 수가 없듯이, 인간이 자신에 대한 진리를 깨닫기란 불가능하다고 본다.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되여 살아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6> 하나님으로부터의 疎外;(21) 인간 소외는 인간이 이루고 있는 관계에서 시작하고 그 끝을 맺는다. 인간이 스스로 의로와 질 때에 인간은 소외당하는 것으로 성서의 눈은 보고 있다. 인간 소외의 뿌리는 인간이 하나님(制一原因)으로 부터 소원(疎遠)될 때에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우리의 소외들은 서로 연관되여 있다. 다른 사람과 소외되지 않고는 우리는 일로 부터 소외될 수 없고, 우리 자신으로 부터 소외되지 않고는 다른 사람으로 부터 소외될 수 없으며, 하나님으로 부터 소외되지 않고는 세상과 자연으로 부터 소외될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의 이러한 비극적 상황을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놓여 있는 골짜기로 표현할 수 있다고 보겠다.
우리의 상황은 소외의 한 경우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으로 부터, 우리의 일로 부터, 우리의 세상으로 부터, 우리의 기관으로 부터, 우리 자신으로 부터, 그리고 하나님으로 부터 잘림 당했다. 이렇게 소외당한 인간은 인간이 아니며 또한 아무것도 아니다.
T. Richard Snyder는 이러한 소외는 우리의 정체성(正體性, IDENTITY)에 거짓을 가져오며 우리의 관계에 거짓을 가져 온다고 보았다.(22) 우리의 정체성에 거짓을 가져 온당함은 열등(劣等, INFEREIORITY)을 암시하고 있다고 Snyder는 보았다.(23) 이스라엘 민족이 애급에서 이스라엘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이 거절당했고, 이스라엘 민족은 그들의 조상을 잃었음으로 그들에게는 더 이상의 미래를 향한 추진력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의 정체성이 사라질 때 그들은 철저한 땅 위에 소외자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왜냐하면 자기정체를 가리는 것은 열등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해방의 역사는 모세가 다시 돌아와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을 일깨워 주는데서 비롯한다고 본다.
둘째로, 우리의 관계에 있어서 오는 거짓을 말함이란 바로 그 소외의 구조를 말함이다. 우리의 소외는 단순히 정체성의 문제 뿐 만이 아닌 것이다. 사회복지 구조는 수혜자의 사회내의 그들의 무용성을 인정할 때 수여하는 것으로 만들어졌고 그 기능이 발하기 때문에, 수혜자들을 사회내에 수동적이고 의존적인 관계로 암암리에 전락시킨다. 이러한 구조와 관계가 우리의 삶을 그 현실로 특색지우고 만다. 예를 들면, 미국에서 여성의 투표권을 1920년 이전에는 갖을 수 없었다. 이혼시에는 경제관리권이 1980대 까지도 여성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Snyder는 사회 속에 존재하고 있는 계층을 다음 세기지를 들고 있다;(24) <1> 사용하는 자, <2> 사용당하는 자, 그리고 <3> 무용지물인 자등 세계층을 말하고 있다. 이 가운데서 <2> 사용당하는 자 이외의 <1> 사용하는 자와 <3> 무용지물인 자가 모두 소외당한 자로 보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래의 모습인 하나님의 현상은 상호관계적이요, 상호 의존적 기본관계이기 때문이요, <1>과 <3>은 이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렇게 우리가 경험하듯이 소외의 수단은 우리의 정체성의 숨김이고 억압의 관계의 숨김을 말한다.
따라서 잘못하면 오늘의 교회가 이러한 소외라는 연극의 주연 배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과거 미국의 선교사들이 자신들이 알고 있던지 모르던지 그들의 선교 활동이 선교사들의 조국인 선진국의 새로운 경제 식민정책에 이바지하는 결과가 되었던 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사실인 것이다. 심지어 신학도 종종 소외의 형태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봉사하는 때가 종종 있을 뿐 만 아니라, 이러한 형태와 그에 대한 잘못된 반응등에 강요의 구조적 수단으로 우상숭배나 행정 및 목회가 이용당할 때, 신학은 이에 잘못 반응할 때가 종종 있어왔음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음을 두 말할 나위도 없다. 소외에 대한 잘못된 구조적 반응들 중심에는 이에 대한 실천과 더욱 그것이 교리로 스며든 종교의 탑이 종종 우뚝 서 있는 것을 우리는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Snyder는 소외를 향한 잘못된 다섯가지의 반응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 운명을 향한 체념:(25)
운명론은 어떤 것을 바꿀 때, 필연성과 무기력의 감각을 동원 시킨다. 이것이 매일의 생활에 작용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예를 들자면, 우리는 시청을 향하여 싸울 수가 없다든가(?) 또는 여자가 무엇을 할 수 있으랴(?), 더 나아가서는 인생이란 다 그런거야(!) 라던지 또는 그 나이에 우리가 무엇을 재기할 수 있으랴(?)등 그들의 능력을 자동적으로 결정짓고 마는 것이다. 즉 운명론 안에는 예상된 결론에 불가피하게 이르도록 하는 어떤 외부적 힘이나 어떤 내적 원칙에 의하여 결정되고 고착화된 것 즉 그릇된 감각이 있는 것이다.
[2] 문제있음 자체를 거부:(26)
사람이 상황의 현실을 대면할 수 없을 때, 실망과 거절과 실패를 부정한다. 어떤 사실을 부정함으로 소외의 고통으로 부터 벗어나려는 것을 말한다. 사회학자들과 심리학자들은 사람들이 그 들의 삶의 불협화음을 다루는 원칙적인 방법 가운데 한가지로 부정(否定)을 들 수 있다. “인식적 불협화음은 우리가 기대하는 방법이나, 일어날 일들, 그것들이 그리될 것과 그러한 존재가 될 것을 원하는 것과 실제의 그들의 존재 방법 사이에 있는 모순을 말한다.”(27)
[3] 희생자를 책망함(28)
예수님 시대에는 빈곤자과 병인과 불구자, 그리고 사회가 원치 않는 자들의 무리가 제법 큰 덩치였다. 이들은 흔히 ‘무법자(無法者)’, ‘죄인(罪人)’, 혹은 ‘불결(不潔)한 자’로 알려져 있고, 그들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구걸하도록 강요하는 사회제도 속에 살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에게 ‘꼬리표’를 붙이고, ‘추방’을 시키고, 결국은 그들의 형편을 두고 그들에게 그 모든 불평으로 책임을 묻는다. 이 모든 것을 죄로 보고 그죄가 그들이나 그 들의 조상 탓이라고 보았다. 요한복음 9장에 나타난 불구자의 탓을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묻기를, “이 죄가 이사람의 것입니까 아니면 조상의 죄입니까?” 라고 했다. 무법자들을 예수님은 그의 친구로 선언했다. 무법자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언하면서 비난자가 되기보다는 스스로 희생자 중에 하나가 되셨다. 희생자를 비난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 사회안에서 소외를 다루는 보편적으로 쓰이는 형태로 쓰이고 있다. 오늘의 교회도 이처럼 희생자를 책망하면서 청교도적인 죄의식을 희생자들에게 강요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축복이 하나님으로 부터 왔으면 소외는 우리로 부터 온 것이다.
[4] 계속 바쁘게 살아감:(29)
우리의 삶이 어려워지고 두려워질 때, 우리는 흔히 무엇인가 아무일이나 해결을 위해서 해야된다고 믿고 바쁘게 움직이기 일쑤이다. 우리는 실용적이고 매우 활동적인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 무엇인가 하는 것이 아무것도 않하는 것도 낳다고 믿는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어떤 상황을 처리하기 위한 정책적이고 효과적으로 행동하는 것과 그저 단순한 행동주의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우리는 바벨탑 을 바쁘게 짓던 이스라엘을 기억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소외된 상황에 대체할 때, 잉여분이나, 동정심으로나, 집없는 사람들에게 쉘터를 제공하는 행동을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두가지의 위험이 있다고 Snyder는 말하고 있다.(30) 첫째 문제는, 우리의 기분이 우리의 행동에게 지시할 때, 기분이 바뀔 때 마다 우리의 결단과 헌신도 쉽사리 바뀔 수가 있다는 것이다. 3년에서 5년을 주기로 일어났던 흑인인권운동, 베트남전쟁 반대운동, 여권운동, 동성연애운동, 비무장운동등은, 각각 운동이 일어 날 때에는 대단한 흥미와 관심 그리고 행동을 가지고 일어났다가는, 지쳐서 결국에는 흥미들을 잃어버리고 마는 결과들을 흔히들 가져오는 것이다. 두번째 문제는, 단순한 행동주의 같은 종교적 자선사업은 효과가 없음이 이미 확인되여 왔다. 교회예산의 많은 부분이 선교 헌금으로 쓰여지되 세상의 소외 현상(빈곤, 홈레스, 가난한자)에는 크게 변화되여 이바지된 모습이 보이지를 않는다. 근본적인 변형의 사역이 필요한 것이다. 바쁘게 프로그램을 하며 움직인다는 것이 우리의 소외문제를 향한 해결책은 아니다. 그것은 잠시 잠깐의 성취감은 주지만, 먼지가 다 가라않으면, 전과같이 모든 것이 그대로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6] 마술에다 희망을 거는 것:(31)
히스기야왕은 바벨론 포로로 잡혀갈 이스라엘의 운명을 두고 점쟁이들을 불러 들였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진정한 정치적인 분석과 기도에 의지하는 일 이외에 모든 마술에다 희망을 걸거나 의지하는 일을 과감히 배척했다. 마술이란 특정한 공식과 요소와 예식을 사용해서 나오는 것을 사람이 조정하는 과정을 말한다. 이것은 기대하는 것을 확실시 해주는 확인되지 않은 행동들로 신중한 생각과 성실한 일을 대신하게 되는 것이다. 교회가 사회 속에서 우리로 하여금 뜬 소망을 가지고 소외되도록 하는 마술의 주인 노릇을 흔히한다.
Richard Snyder에 의하면 소외란 “이간(離間)하여 사이를 멀리 떼어놓아 낯설게 만들거나 짤려나가게 되는 과정(過程 PROCESS)이다. … 소외 당하는 것은 한 사람이 적당한 장소와 올바른 상황과 합당한 관계로 부터 가혹하게 떼어 취급당함을 말한다.”(32) 그는 더 나아가서 이러한 소외의 그 원인과 실제를 밝혀내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삶의 변형을 위한 가능성을 찾을 수 없다고 단언하고 있다.(33) 그는 소외를 단순히 풀려질 수 있는 문제로 보질 않는다. 소외로 부터 화해로의 바꾸어지는 변형(TRANSFORMATION)이 바로 ‘하나님의 예수 그리스도 내에 계심을 뜻한다’고 주장하고 있다.(34) 한 때 ‘인간취급받지 못하던 사람’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음하고 고통하는 우주의 변형을 위하여 변형받았다고 Snyder는 고백하면서, 세계를 변형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지이지만, 하나님 홀로 완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보고, 그리스도인은 이를 위하여 소명을 받았다고 주장한다.(35)
2. 변형연습 (TRANSFORMING PRAXIS)이란?
폐쇄(閉鎖)에서 열림(더불어, 함께 삶)을 향한 자유화(自由化, 解放化)에서 사용할 수 있는 말이 변형(變形, TRANDFORMATION)과 연습(姸習, PRAXIS)이다. 같은 의미가 되겠으나, 변형 연습은 변화를 연습한다는 의미로 쓰고 있다.
Richard J. Bernsteind은 ‘연습’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PRAXIS는 희랍어로 ‘연습’이라는 뜻이다. 때로는 ‘행동’ 혹은 ‘행함’이라는 실천을 의미하기도 한다. PRAXIS는 일반적인 활동을 의미하기 보다는 ‘특별한 활동을 행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다시말하면, 사회 변형을 목적해서 사회적 현존에 직접적으로 주는 영향을 연습하는 것을 의미한다.”(36)
변형연습은 폐쇄된 개인과 사회를 열린 개인과 사회로 전향을 위한 시도이다. 여기에는 세가지 형태의 이론적인 가설을 세울 수가 있겠다: <1> 성격(性格), <2> 행동(行動), <3> 가치(價値)/성격(性格)이라 함은 칭찬받을 만한 사람의 성품과 비난 받을 만한 사람의 성질을 말하는 덕목을 의미하고, 행동이라 함은 윤리적으로 당연히 해야할 책임을 말하고, 끝으로 가치라 함은 일의 목적이나 그 설명이 좋건 나쁘건 그것을 통한 인간의 삶의 목적을 말 한다.
실천(PRAXIS)은 해방신학과 해방 그리스도론의 방법과 핵심이라고 Paul F. Knitter는 말하고 있다.(37) 실천은 이론의 적용 혹은 목표인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이론 자체를 일으키고 스스로를 교정 하는 기반”이다.(38) 사람들은 먼저 진리를 알고 그리고 나서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것은 아니다. 진리가 실로 알려지고 정당화되는 것은 행위, 행동에서이다.
특히 해방신학이 “교리적인 것에 대한 비판적 요소의” 우위성, 즉 “정론(正論, ORTHODOX)에 대한 정행(正行, ORTHOPRAXIS)”의(39) 우위성을 강조한 것은 예수의 유일회성을 이해하려는 우리의 관심과 맞아 떨어진다. Gustavo Gutierrez는 이것을 더 예리하게 파헤쳤다: “해방신학의 주어는 신학이 아니라 해방이다.”(40) 이것은 과거의 교리적 정경적 형식들은, 규범적인 것이 남아 있다 하더라도 절대적 규범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교리 혹은 전통의 ‘진리’는 항상 진리의 ‘궁극(窮極)적 중재(仲栽)자’에, 즉 ‘실천의 변형적 응답’에 드러나 있어야 한다. ‘올바른 행동'(ORTHOPRAXIS)없는 ‘올바른 지식’ (ORTHODOXY)이란 있을 수 없다.
Paulo Freire는 그의 저서 Pedagogy of the Oppressed 에서 행동과 반성은 함께 유지해야 함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해방의 고민 속에서는 이들을 떼어 놓을 수가 없다. 그는 오직 진실한 말이 있다면 그것은 변형의 언어라고 보았다. 사상과 행동이 함께 갈 때에 참 변형은 깨달아진다고 보았다. 행동이 반성과 분리될 때에, 행동과 반성은 홀로서고, 반성은 평가를 받을 수 없어서 행동은 비정상이 되고 만다. 우리가 말하는 인종차별과 성차별주의와 연령차별과 계급차별등의 변형 연습에도 <1> 행동, <2> 반성, <3> 차후 비판적 반성등이 따라야 한다. [표1]에서 보듯이 변형연습의 성격은 다리 셋을 가지고 있는 관계적 얼개를 보면 분명해진다.

여기의 얼개는 인간 삶의 연합과 상관성 그리고 서로 의존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 얼개는 삶 그 자체 속에 있는 ‘늘 현재’와 ‘피할 수 없는 구조’를 말하는 것이다”라고 Bernard M. Loomer는 그의 발간되지 않은 논문, “The Web of Life”에서 밝히고 있다.(41)
인간적인 도덕과 개인적인 실체는 그것을 형성하는 역동적인 관계들의 얼개에 끼어져 가면서, 또한 그 얼개로부터 생성하기를 계속한다. 그래서 Allan Aubrey Boesak은 격언적인 말을 하기를,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것은 타인의 타인과 함께, 그리고 타인을 위할 때이다”라고 했다.(42)
변형연습은 폐쇄된 개인과 사회를 열린 개인과 사회로 전향을 위한 시도이다. 여기에는 세가지 형태의 이론적인 가설을 세울 수가 있겠다: <1> 성격, <2> 행동, <3> 가치. 성격이라 함은 칭찬받을 만한 사람의 성품과 비난 받을 만한 사람의 성질을 말하는 덕목을 의미하고, 행동이라 함은 윤리적으로 당연히 해야할 책임을 말하고, 끝으로 가치라 함은 일의 목적이나 그 설명이 좋건 나쁘건 그것을 통한 인간의 삶의 목적을 말 한다.
[1] 정체성확인 (해석적)
[2] 행동 (상관적 보완과 상호의존)
[3] 반성 (사회행동)
[4] 차후 예언적, 비판적 그리고 자기성찰적 반영
이와같은 해석학적인 4 단계를 본다면, 교회생성의 변형연습의 첫 단계는 치료(HEALING)로서, 개인, 가정 그리고 단체의 정체성 형성의 진행을 의식하도록 돕는 단계이다. 즉 해석적인 방법이다. 그 둘째 단계로는 연습자체(PRAXIS)로 구체적인 상황들 속에서 정체성과 자아 성찰적 활동으로 비롯된 앎과 행동의 한 방법을 말한다. 즉 연습(演習)은 반성적으로 이룬 행위를 말한다. 이것은 상관적 보완관계이며 상호 의존적이다. 또한 셋째 단계는 사회적 행동이다. 사회 속에서 공동체의 의식과 구조 변형을 위한 일들에 자원함이며, 그리고 넷째 단계는 예언적, 비판적, 그리고 자아 성찰 이라는 반성은 첫 단계로 연결되여 변형된 개인과 사회의식, 구조등 속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다시 찾아나가는 변형연습을 계속 진행하게 되는 것이다.
1) 개인적 방법의 치유:
비판적 해석적 역할의 시도가 치료를 낳는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현존을 위한 증인으로서의 한인 이중문화 가정교회는 함께 모여 예배드리고 친교를 위해서 모이는 장소가 될 뿐 아니라 또한 비판적인 해석을 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해석학적 역할이란: 자아존중, 믿음, 행동을 격려하기 위해서, 이중문화가정의 역사와 문화적인 배경을 이해하는 것; 이중문화 가정의 식구들의 삶을 제한 하고 주시하는 사건들 속에서 책임적인 관련을 짖는 믿음으로 연결하는 것; 성서의 말씀을 재해석하여 우리 시대의 억눌린자들을 위하여 능동적으로 돌보시는 하나님의 현존에 중간 역할을 하도록 관계적 치료적 양식(본보기)들을 양육하는 것등을 말한다. 이중문화가정 교회는 자본주의자들의 계층에게 있어서 일반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않은 작업들과 착취적인 사회 관계들을 야기시키는 보조적 계통을 조명하기 위하여 도전을 받는다. 또한 이중문화가정 교회는 과거 한국문화 전통이 여성을 노예화했음의 의미와 역사를 재 해석하고 이에 변화를 돕고, 스스로의 결단을 내릴 수 있도록 희생자들의 능력을 돋우어주며, 더 나아가서 관계적 양식들을 양육하는 기관들이 되도록 도전을 받는다.
주된 일반사회 속에서 억눌린자들이 연합하고 평등하도록 돕는 정도의 일로는 이중문화가정 교회의 사역으로 충분치 못하다고 본다. 이중문화가정은 그 역사에 의해서 도전을 받는다. 이들 가정을 억압하고 있는 변하지 않는 사회구조 속에서 가족과의 관계나 상속권을 포기당한 채, 좀더 나은 계층으로 연합하는데 관심을 갖는 것 이상의 일을 하도록 도전을 받고 있다. 그 도전과 사명은 바로 인간화된 사회 관계를 향해 일과 사회 질서를 변형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깨닫게 하는 과정이 해석학적 방법의 치료로서 정체성 확인 과정인 것이다.
열린사회에로의 길은 의식화의 문제로 결집된다고 본다. 자신의 정체를 확인하는 과정도 의식화이며, 참 인간이 다른 인간이 교통하는 것은 자신과 타인을 참 인간으로 대할 수 있는 인간의 방법은 바로 의식화를 통해서 의식 개혁이 되어야 가능하다.
만약 인간이 그들의 개인의 역사와 사회의 역사를 실현할 책임을 가지고 있다면, 그들은 세계를 실현하는 일에 그들의 잠재적인 행동을 배우기 위한 자아 의식의 과정이 필요하다. 행동을 취하기 위하여 새로운 의식과 새로운 능력에 도달하려는 이 과정은 일반적으로 의식화라고 한다. 이 의식화란 말은 라틴 아메리카 신학에서 통용되는 말이며, Helder Camara, Paulo Freire, Gustavo Gutierrez와 같은 사람들의 저서들을 통해서 브라질과 그 이외의 나라에서 보편화되었다.
Freire에 의하면, 의식화는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인 모순을 감지하고 현실을 압박하는 요인들을 대항하여 행동하는 계속적인 과정이다”라고 말하고 있다.(43) 따라서 의식화는 사람들이 ‘보다 더 좋은 감정’을 갖도록하는 심리적인 기술이나 교육이 아니다. 이 의식화 문제를 설정한 목적은 개인이나 사회를 변화시키는 공동사회를 의미한다.
2) 상관적 보완과 상호 의존:
한인 이중문화 가정 교회는 그 성격상 상관적 교회가 되도록 강요당하고 있다. 즉 치유가 필요하고 보완이 필요하고, 그 가정을 뒷바침해야 하고, 소외된 사람들, 정신적 혼란에 빠진 사람들, 그리고 사회적으로 버림받은 이들을 도와 주어야하고, 영적 기아(飢餓)를 채워 주어야만 한다.
가정과 일반사회로 오는 인종차별과 한인사회로 부터오는 여성차별은 이중고(二重苦)의 비 인간화 문제를 안고 있다. 이로서 전체 사회의 의식과 구조 속에 치료가 시작되어야 이중문화 가정의 상처에도 진정한 치료가 시작될 수 있다. 따라서 교회에는 이를 위한 새로운 신앙훈련 즉 비인간화하는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정체성과 자아 성찰로 상호 보완적이고 상호 의존적인 ‘함께 함’의 평등관계를 향한 해방연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때에 이중문화 가정의 한인 여성들은 자신의 열등감(劣等感)과 자해(自害)는 인종차별과 여성차별 아래에서 비 인간화의 원인이 될 것이다. 그 결과는 한인 사회와 전체 사회가 온전한 사회로 구원되는 평등사회을 향한 변화 가능성을 가질 것이다. 이것이 긍극적 치유라 하겠다.
여기서 둘째단계인 상관적 협조와 상호의존 방법의 치료를 살펴보기로 하자. 상기에 Snyder의 소외 개념의 6가지의 잘못된 길은, 우리가 닫힌 사회 속에서 발생된 의식으로 보고, 판단하고, 실행하기 때문에 오는 결과이다. 그러면 여기서 열린 사회가 무엇인지를 살펴 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본다. 열린사회나 닫힌 사회에 대한 논의들은 오래전부터 있어왔지만, ‘열린사회 (OPEN SOCIETY)와 ‘닫힌 사회'(CLOSED SOCIETY)라는 대립되는 사회의 유형을 체계적으로 이론화시킨 최초의 사람은 20세기 프랑스의 철학자 H. Bergson이었다. Bergson은 그의 만년의 저서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44) 에서, 열린사회란 열린도덕 (OPEN MORALITY)과 동적 종교(DYNAMIC RELIGION)를 기초로 하는 사회이고, 닫힌 사회란 닫힌 도덕(CLOSED MORALITY)과 정적 종교(STATIC RELIGION)을 기초로 하는 사회라고 규정했다.
한편 K. R. Popper는 Bergson과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열린사회의 이념을 제시했다. 그는 그의 유명한 저서 “열린사회와 그 적들” (45) 에서 신비적 직관에 기초한 열린사회 대신에 합리적 이성에 기초한 열린사회를 옹호했다. Popper는 Bergson이 주장하는 인류애에 기초를 둔 열린사회의 이념은 승인하지만, 궁극적으로 신비적 정신이 열린사회를 창조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비합리적 신비주의는 오히려 열린사회의 적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Popper에 의하면 닫힌 사회와 열린사회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서로 대립되는 성격을 지닌다.
<1> 닫힌사회는 생물학적 유기체의 사회이며, 부족이나 집단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개인이란 전혀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부족주의 내지 집단주의 사회이다. 반면 열린사회는 먼저 유기체적 특성을 갖지 않는 추상적 사회이다. 모든 의사교환은 타이프된 편지와 전보로 행해지고, 모든 일이 밀폐된 자동차로 다니는 고립된 개인에 의해 처리되는 사회이다. 즉 비 인격적인 사회인 반면 자신들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새로운 인간관계가 나타난다. 이것은 정신적인 결속이 생물학적 내지는 육체적인 결속을 대신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적십자 회비를 내는 회원들 끼리는 만나 본일이 없으나 불우한 이웃을 돕는 정신에서 한 식구가 되는 것이다.
<2> 닫힌사회는 계급을 포함한 모든 제도와 규범을 신성불가침한 금기로 보는 성격이 나타난다. 역사운명이 지배하는 것으로 사는 일원론에 기초한 사회이다. 반면, 열린 사회는 창조적인 사회이다. 창조적 특성은 사실과 가치를 엄격히 구별하고자 하는 비판적 이원론에 의해서 뒷바침된다. 이것은 행위 규범의 책임을 자연이나 신을 향하여 물을 수 없으므로 인간이 그것을 개선해 나가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3> 닫힌 사회는 국가가 크든 작든 시민생활의 전체를 규제하려드는 특성을 갖는다. 이것은 정치적 전체주의의 사회를 말한다. 국가는 우상숭배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Aristotle은 국가가 국민의 덕을 보살피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보고있는 것이다. 따라서 개인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 내릴 수 있는 권리가 없다. 반면 열린사회는 개인들이 스스로 판단을 내리고 독자적인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사회이다.
이러한 특징들을 전체적으로 고려해 볼 때, Popper의 열린 사회는 결국 개인의 자유와 존엄이 확보된 사회이며, 개인이 그의 이성에 입각해서 스스로 판단을 내리고 자신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지는 사회로서 해석된다. 이러한 사회는 자유와 평등과 사랑을 이상으로 하는 민주주의 사회라고 볼 수있다.
Bergson과 Popper의 두 종류의 열린사회 중에서 신비주의적 종교에 기초한 Bergson의 열린사회보다는 합리적 이성에 기초한 Popper의 열린사회가 더욱 더 열린사회로 판단된다. 왜냐하면 신비주의는 상실된 닫힌사회를 그리워하는 동경의 표현으로 해석될 수도 있고, 그러므로 열린사회의 합리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해석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열린사회를 다음과 같이 요약 정의할 수 있다고 본다. 열린사회는: <1> 혈연을 포함한 생물학적 결속을 넘어선 사회이다. <2> 개인의 자유와 독창성을 최대한으로 허용하는 사회이다. <3> 개인의 복지를 사회구조의 주된 목적으로 생각하는 사회이다. <4> 독선을 거부하고 비판적 논의를 허용하는 합리주의 사회이다.
즉 모든 개인이 그 자체로서 중요시되는 사회, 특별히 재능이 있는 자의 능력과 성취를 포함해서 모든 자원이 전체 국민의 행복을 위해서 사용되는 사회, 자유와 안전이 정의와 평화와 함께 있는 사회, 자유로운 사람들이 함께 모든 사람들의 자유를 보장해 줄 의무가 있는 사회, 이성에 의한 비판적 논의가 권장되는 사회가 바로 열린사회라보겠다.
우리가 열린사회를 이런식으로 규정한다면 우리는 인류의, 역사를 닫힌사회에서 열린사회로의 이행의 역사로 해석할 수도 있다. 자연 그대로의 사회나 자연에서 갓 벗어난 사회는 닫힌 사회였다. 이에 반해 이성에 의해 창조된 사회는 열린 사회였다. 그러나 완전히 닫힌사회도 완전히 열린사회도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사회는 이 두 요소를 동시에 포괄하고 있다. 그러므로 닫힌사회와 열린사회의 구별은 닫힌 성격과 열린 성격 중 어느 것이 더욱 지배적인가에 달려있다고 보겠다.
닫힌 사회와 열린사회의 갈등과 투쟁은 인류의 역사와 더불어 시작되어 왔다. 인간의 이성은 열린사회를 지향하고자 한다. 그러나 인간의 본능은 닫힌 사회를 갈망한다. 열린사회는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보장해 주지만, 그 댓가로 긴장과 책임감을 요구한다. 닫힌사회는 인간을 운명의 노예로 만들지만, 그 대신 사회의 안정과 질서를 보장해 준다. 인류의 역사에서 기회있을 때마다 닫힌사회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시도가 되풀이 되어 온 것도, 열린사회가 요구하는 긴장을 인류가 견뎌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닫힌 사회는 긴장대신에 휴식과 마음의 평안을 가져다 준다. 그러나 열린사회를 향해서 떠난 인간사회는 동물사회와 달라서 결초 닫힌 사회의 순진함과 소박함에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일단 이성에 의존을 시작했고, 비판력을 활용하기 시작한 이상, 개인적인 책임의 요구와 더불어 지식의 증진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기 시작한 이상, 인간은 닫힌 사회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지식의 열매를 먹은 자는 천국을 잃어버린 것이다. 우리가 인간다움과 이성과 책임의 십자가를 지는 일에 위축되어 버린다면, 인간 앞에 놓인 문제들을 분명하게 이해함으로서, 인간 자신을 강화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상당한 노력을 요구한다. 이것은 이간답게 살기위한 최소한의 댓가이다. 우리는 다시 원시 사회나 동물의 사회로 돌아갈 수가 있다. 그러나 인간이 인간으로 남고자 한다면, 오직 하나의 길, 열린사회로의 길이 있을 뿐이다.
거울의 반사에 비유되는 자기성찰로 부터 비롯되는 열린사회에로의 길은 의식화의 문제로 결집된다고 본다. 자신의 정체를 확인하는 과정도 의식화이며, 참 인간이 다른 인간이 교통하는 것은 자신과 타인을 참 인간으로 대할 수 있는 인간의 방법은 바로 의식화를 통해서 의식 개혁이 되어야 가능하다.
3) 사회적 행동:
Peter L. Berger는 그의 책 Facing Up to Modernity 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개인(個人)과 체재(體栽) 사이의 관계를 간단하게 요약해주고 있다. “사회는 신비로운 힘인 개인과 부딛친다. 즉 개인이란 그의 삶을 형성해 가는 근본적인 힘의 무의식이다.”(46) 이는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개인 자신의 실체란 관계 속에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사회는 개인들의 의식적이고도 의도적인 행위로 부터 전적으로 유출되었다기 보다는, 사람들 사이에서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반면 서로 관계를 참아나감으로 유출된다. 사회는 그래서 인간 주체의 변형하는 행위를 향해 개방되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사회적 자유화와 변형은 생산과 재 생산의 형태와 사회적 관계들의 조직적 성격을 알도록 추구해야만 하고 또한 이를 견뎌 나감을 진술해야 만한다. 사회는 경험과 이성적 조사를 통한 심각한 반영과 지식의 객체가 될 수가 있으며 재 생산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수정되기도하고 더욱이 인간의 행위나 실천(연습)을 통해서 변형될 수가 있다. 실천(연습)은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자의식(自意識, SELF-CONSCIOUS)과 자성(自省, SELF-CRITICAL ACTIVITY)의 행위로 부터 일어나는 앎(KNOWING)과 행함(DOING)의 한 길이다. 그러므로 실천(연습)은 반사적으로 된 행동인 것이다.
개인과 체재는 자신, 인격적 체재들, 가족 체재들, 체재들로서의 기구들, 관료적 그리고 사회적 체재등으로 많은 이미지를 불러올 낼 수가 있다. 이러한 모든 체재들 사이에서 연관된 놀이를 능동적으로 함으로 개인은 아기 때부터 이러한 체재에 익숙함 속으로 자신을 형성해 나가고, 더욱 상세하게 동질화된 것이 그 사람의 한 인격체를 이루는 것이다. 개인을 통해서 보여지는 것은, 이러한 아기는 좀더 강하고 커다란 사회 문화적 그리고 정치적 체재에 끼어들기 위해 종속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다.
개인’과 체재’라는 말은 폭넓은 사회문화적 그리고 정치적 체재와 개인들 사이의 상호 연결을 향한 말들이다. Roy Bhaskar는 개인과 체재(사회) 사이에 연결을 생각함에 다음과 같은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47)

‘진정한 관계들’은 사회 내의 물질적 생존의 하부구조를 의미하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생산의 자본주의자적 방식을 말한다. 이러한 생산 방식은 지배계층과 노동계층과 가난한자의 계층 사회를 필요조건으로 갖고있다. 현대 자본주의 구조는 생산 관계들의 대단히 복한적인 체재인 것이다. 하부 구조나 진정한 관계들은 현상적 형태의 양성을 제공한다.
‘현상적 형태들’은 인간의 경험속에 개념화되는 사회적 실체의 특별한 나타남을 가리킨다. 자본주의 아래 임금과 노동의 관계들이나, 복합적 상하 직업구조, 복합적 계층구조등 처럼 사회 내의 현상적 형태들은 기구화 되고, 사회적 조정을 하게 된다.
현상적 형태들은 ‘우세한 실체’나 ‘객관적 진실’ 혹은 ‘그런 식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것들을 창조한 종속적 구조들위에 비판적 반영을 하기 위한 사회적 형태들 뒤로 돌아가지 않는 한 현상적 형태들은 진리로 나타난다. 현상적 형태들은 그들의 차례가 돌아오면, 특정한 이상적 범위들 안에서 반영한다.
‘이상적 범위’들은 존재하는 사회 실체들을 급진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시도나, 사회의 현상유지를 합법화함을 설명하고 정당화함을 가리친다. 이상(理想)들은 객관적 사회 구조를 향해서 주관적으로 잡은 신념들을 연결시키려고 기능한다. 자본주의 생산의 현상유지를 합법화하기 위해서 섬기는 이상들의 예로는 ‘가지고 있는 자가 앞장서지,’ ‘능력이 있는자가 성공하지,’ ‘가난은 하나님이 일하기 싫은 자를 벌주신 것’ 등이 있다. 이상적 범위들은 차례가 되면, ‘심한 노동이 성공으로 이끈다’는 윤리와 같은 특별한사회적 연습을 뒷바침하고 반영한다.
‘사회적 연습’은 현상적 양식을 제공하는 행위 즉 사고, 팔고, 가격을 흥정하는 등의 행위를 가르친다. 사회 연습은 차례가 되면 현상적 형태를 유지하고, 또한 진정한 관계들의 재 생산을 위한 필요조건이 된다. 상기 도표에서 B에서 D로 그어져 내린 점선은 일상 생활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다. 일상생활 세계속의 일들은 ‘현상적 형태들’, ‘이상적 범위들’, 그리고 ‘특별한 기초적 사회 연습들’ 뒤에 ‘진정한 관계들’의 가면을 쓰려는 경향이 있다.
요점은 사회는 권위의 심오한 자원이 지각하는 주체(主體)으로 독립하는 실체로 존재하나, 연습을 통해서 주체와 원인적으로 연결된 것이다. 이것을 알아보기 쉽게 도표를 만들어 보면:

해석과 치유와 유지와 인도 그리고 도전은 모두 통합해야만 될 사회적 행동들이다. 해석은 실천(연습)과 연결되여져야만 한다. 사회행동은 억압의 고착화된 적절한 구조와 이를 유지하는 사회적 조정(배열)과 과정을 온전한 이해와 변형을 찾으려 노력해야만 한다. 교회는 모자잌 교회 창문 너머로 나와 어머니가 울고 있는 곳, 배고픈 아이들이 있는 곳, 직업을 없는 어머니/아버지가 있는 곳, 식구들이 병으로 앓으나 보험이 없는 곳으로 나와 함께 있어야한다. 사회행동의 사역은 교회 공동체와 일반 사회 공동체가 돌봄과 해방과 사회적 변형의 실천(연습)을 계속해서 발전 전개 시켜나가는 것 처럼, 타인들의 비판적인 관점을 수용할 수 있는 자세가 되여야 한다.
4) 예언적, 비판적, 그리고 자기성찰의 반영:
이중문화 가정 교회는 인종차별주의와 여성차별주의의 구조적 불평등과 잠행적 형태를 확보하는 착취적 경제 사회 조직위에 복음의 능력으로 심판을 선언할 때에, 때로는 예언자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예언자적인 역할은 반영적이라야만 하고, 오늘의 교회와 이중문화가정 교회가 성서와 억눌린자의 빛 안에서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고 심각하게 질문을 해야한다. 이 역할은 교회의 해석하는 작업과 사회적 행동 사역과 일관성이 있어야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 하셨음을 믿는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인 현대사회 속의 교회가 지닌 사명, 즉 ‘변형연습’이야말로 신앙인의 믿음의 훈련이요, 칭의(稱義, JUSTIFICATION)에서 시작된 그리스도인의 완전(完全, PERFECTION)을 향한 성화(聖化, SANCTIFICATION)의 삶이라고 볼 수 있다. 변형연습은 이민 한국인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이 확인된 개인이 비그리스도인의 공동체, 지역공동체와 세계를 잇는 공동체와의 연결된 삶의 행동의 교호작용을 말한다. 즉 개인과 집단과의 상호작용을 말한다.
3. 교회 생성이란?
따라서 교회 생성이란 상호작용된 자신의 진행상태를 말한다. 이 땅에 예수님의 영이 교회의 영이요, 예수님의 육신은 바로 교회(ECCLESIA, GOVERNING BODY)의 몸이다.
예수님이 당하는 자의 모습으로 세상을 하직하시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죽음에서 일어나신 모습은 모든 당하는 자가 죽음과 같은 삶에서 자유해짐을 말하며, 억압하는 자도 그들의 전통, 권력, 관습, 명예등의 유지로 인한 잘못된 인식이나 알지 못하는 가운데 행했던 억압을 통한 비인간화의 행위에서 자유해 또 하나의 죽음에서 일어나 자유화되는 것을 말한다.
이를 위한 운동이 교회생성(ECCLESIOGENESIS)이다. 이 말을 쓴이는 독일계 부라질 태생인 Leonardo Boff 프란시스칸 신부로, 구원의 매체로 이 땅에 그리스도의 몸의 역할과 하나님 나라의 확장의 터인 교회를 기초 공동체(The Base Communities Reinvent the Church) 를 통하여 새로 발명하자는 주창을 했다. 교회의 본래의 사명을 찾은 교회다운 교회가 되기위하여 교회를 옛 터전위에다 다시 출생시키자는 말이다. 새장소와 새 사람의 시작이 아니고, 현재 있는 교회를 새롭게 주님이 진정 원하시는 모습으로 재 출생 시키자는 뜻이다. 이와같이 기성 교회가 순수한 원칙에 입각해서 그 형태를 갖추어 ‘변형위치’를 갖는 것을 ‘교회생성(ECCLESIOGENESIS)’라 한다.
오늘날 교회성장을 강조한 나머지 교회갱신의 호소를 미쳐 들어주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분명히말하지만, 교회 부흥은 교회갱신의 끝임없는 과정이라고 말하고 싶다. 교회가 교회로 남을 수 있는 길은 <1> 현재 교인의 개인 신앙의 변형, <2> 교회의 변형, 그리고 <3> 대 사회를 향한 교회의 관계 변형을 통한 교회공동체의 현재구조에 대한 초월적 변형이 없는 한, 교회는 주님의 영을 빙자한 사회 친교단체나, 사회 사업단체나, 아니면 사회 일반기업과 다를 바가 없어 하나님의 나라확장을 위한 자유, 평화, 평등, 사랑, 믿음, 소망의 역사와는 거리가 먼 단체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우리는 교회를 건물로 생각할 수 없듯이 교회생성은 살아 있는 교회를 기초공동체를 통해서 지어나가는 것을 말한다. 교회생성을 위한 새로운 교회의 기초공동체내에서는 소외된 구조가 없는 상태를 말한다. 이것은 직접적인 관계, 상호관계, 깊은 관계(성찬), 상호협조, 복음을 이해하는 점에 공통성, 회원 수준의 공통성등에서 온다. 여기에는 일반 사회에서 볼 수 없는 것이 있다: 즉 굳은 규칙들, 상하명령계통, 기능을 위한 기존화된 직무와의 관계, 내용의 질, 직위등. 흔히 중심이 없는 문제로 앓고 있을 때 복음으로 쉽게 해결되는 분위기를 호흡함으로, 또는 개인이 서로 서로 상호 연결되여 묶여지는 공동체 삶으로, 감격하는 열심(ENTHUSIASM)이 생긴다.
사회학자 Pedro Demo의 Sociological Problems of Community 에 의하면, 오늘의 사회학은 F. Tonnies가 말하는 사회와 공동체를 대조하는 전통적인 이해를 넘어간다고 보고 있다. 즉 상호이익을 위한 협력관계와 소속감에 의하여 적응된 인간 존재속의 사회적 형성을 공동체라 말하고, 사회는 대조적으로 익명의 사람과 간접적인 인간관계가 주로 보급되 유행해서 이룬 사회적 형성을 말한다. Demo는 말하기를 “공동체와 사회간의 관계는 마치도 공동체를 사회의 유토피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48)
인간의 함께 함이란 언제나 “비인간적(非人間的)인 조직(組織)”과 인간적(人間的)인 내밀(內密)” 사이의 긴장으로 차있게 마련이다. 동등한 공동체내의 최고 우월자가 있는 문제는 구조악을 방지하는 문제와 실체성을 상승시키는 문제와 연결되여 있다. 그래서 고민은 인간존재의 인간화와 복음의 가치와 인간을 인간끼리 좀더 친밀해질 수 있는 인간존재로 이끄는 문제인 것이다. 사회활동적 사회위에선 동등한 공동체의 최고 우월성은 쉽사리작은 모임의 단체로 분활된다. 따라서 동등한 공동체인 교회 재창조를 위한 기본인 기초공동체가 매우 중요하고, 이는 교회라는 사회적 조직 내의 동등한 인간공동체를 말한다.
사랑과 용서와 연대성과 억압적인 힘의 포기와 다른 사람을 용납함등에 뿌리를 내린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동등한 공동체적 정신과 사회적 구조 속에서 충돌과, 이기성, 개인주의, 개인 및 단체 이익, 명령과 규칙을 갖는 압력, 그들의 목표 달성을 위한 매우 딱딱한 과정으로 목적을 설정함등에 대항하여, 새 창조를 향해 적응되여 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횡적관계로 부르셨다. 즉 상호 존경, 상호 관대함, 형제자매로서 함께함, 관계의 단순성등의 상호 횡적관계롤 부르셨다. 종적으로는 예수님께서는 인간에게 하나님과의 진실한 효성의 관계를 열어 놓으셨다. 즉 예술성이 없는 단순한 기도와 하나님을 향한 관대한 사랑으로 인도해 내셨다. 예수님은 사람이 살기위하여 함께 함의 모든 표현하는 정신을 강조함에서 떠난, 인간의 조직과 기관에 대하여 전혀 관심이 없으셨다.
지구촌 속에 교회는 동등한 차원에서 구체적이고 사회 조직적 차원과 절대적으로 공동한다. 교회 안에는 특정한 공동체들로 부터 초월하는 조직적 요소와 그 공동체들 모두를 상호 연관관계를 맺어주는 조직적 요소가 있다. 여기에 교회의 권위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사랑과 희망 속의 하나됨이다.거기에 신앙 안에 기본적인 하나됨을 표현한 신앙고백(신경)이 있다. 또한 각 개체 지역 공동체들을 향한 지구촌의 공통의 목표가 있다. 교회의 제도적 골격(하부구조)을 현재 교회의 역사적 핵심을 왜곡함이 없이 또한 그러한 전통교회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진실로 갱신할 수가 있는데, 그것은 일반인(민중)들의 공동체들의 충격과 추진으로만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사람들로 부터 일어난 교회는 사도들로 부터 일어난 교회와 동일하기 때문이다.
교회가 사회내에서 다른 사회공동체와 동일한 모습으로 한 종교단체로 남을 수가 있고 또 하나의 선택은 생명 공동체가 되여 사회내의 모든 공동체간의 협조와 양육을 담당한 창조적 역할을 하면서 모든 공동체의 중심에서 또한 모든 공동체 속에서 예언자적인 사명을 감당 할 수있으리라 본다. 교회가 이같이 예언자적인 선교의 사명을 회복할 때에 비로서 지구 촌의 구석 구석에서 일어나는 정의를 향한 부르짖음에 하나님의 면류관을 가지고 나갈 수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 못할 때에 교회는 불안전하고, 사무적으로 불쾌함을 맛보고, 결국 에수님을 배반한 제자들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그러면 교회 생성을 위한 기초 공동체를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하나? 기초공동체는 기관구조로서의 교회에 반대되는 점으로 서는 교회의 모습을 제공하는 영원한 미래 제공한다. 영원히 이룰 수 없는 경지를 바라는 것이 아니며 또한 이것 만이 유일한 교회 조직이라는 것도 아니다. 다만 동등 공동체의 정신을 살리고 지켜서 관료적인 기구적 기관의 교회의 모습에서 떠나 교인들 상호간의 직접적인 인간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현재의 회중을 없애고 다른 것으로 대치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전체 교회와 단단히 결속됨을 잃지 않고 교회생성을 계속하는 것은 서로가 변형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을 때, 교회가 조직으로 고착화되지 아니하고 영원한 믿음 운동으로 생성될 것이고,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진정한 모습이리라 믿는다.
다음의 세가지 제시를 연구할 수 있겠다: <1> 교회 공동체는 ‘개인 구원’의 노력에서 ‘인간구원’을 위한 단합과 행동이 구체화되어야 할 것이다. ‘나’는 ‘우리’의 집합적 역사창조에 가담할 때 비로소 사회적 정체(SOCIAL IDENTITY)가 형성된다. <2> 교회가 서로 섬기고 나누는 공동체가 되려면 신념체제의 개방성을 갖고 이견을 이해하는 자세와 이탈마저 포용하려는 동등대화의 자세로 임해야한다. 행동적 차원에 있어 좀더 넓은 안목으로 새로운 생활양식을 용납 내지 수용할 수 있는데서 자유로운 소통, 친교가 이루어 질 수 있다. <3> 교회 공동체는 사회안에 존재한다. 세속적 공동체의 삶은 교회 공동체와 직접, 간접의 관계가 있기 때문에 교회 동동체는 지역사회건설에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하다.
의식화(意識化), 인간화(人間化), 그리고 생성(生成) 공동체(共同體) 형성(形成)으로 인종(人種)과 성차별(性差別)로 인한 소외(疎外)에서 참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유 평등 평화 사랑 소망의 변형연습(變形縯習)이 바로 교회생성(敎會生成) 과정(過程)인 것이다.
[주]
- Embury 한인회중 가운데 이중문화결혼여성 13명을 대상으로, 청소년 시절 (7살에서
18살 까지)을 어떠한 가정환경에서 보냈는가를 구두로 조사한 결과 다음과 같은 결과를 보여 주고있다: (1991년 11월 현재) (1) 성장과정의 가정형편은; 부모와 동거
1명, 부모이혼 6명, 편부슬하 1명, 편모슬하 3명, 계부슬하 0, 계모슬하 5명, 고아원
1명, (2) 부모의 버릇; 부친 술중독 8명, 모친 술중독 2명, 부친놀음 5명, 모친놀음
1명, (3) 성장과정의 부모의 생활정도; 상 0명, 중 1명, 하 9명, 극빈 3명. - 양주삼 감수, 새국어 대 사전, 한영출판사, 서울, 1975, p. 953.
- Ibid., p. 954.
- Webster’s New Universal Unabridged Dictionary, Second Edition, Dorset & Baber,
New York, NY, 1979, P. 46. - The New Encyclopaedia Britannica, Vol. 1, Micropaedia, 15th Edition, Chicago, 1988, p.
270. - Ibid.
- Ibid.
- Ibid.
- Ibid.
- Ibid.
- Ibid., p. 271.
- Ibid.
- Ibid., pp. 6-8.
- Ibid., pp. 8-10.
- Marx의 모든 이론의 출발점인 소외개념은 Eric Fromm이 Marx를 해설한 그의 저서, Marx’s Concept of Man (New York: Frederick Ungar, 1966)에서 밝혔듯이 Marx의 초기 저서들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Dirk J. Struik, ed. The Economic and Philosophic Manuscripts of 1944, (New York: International Pub. Co., 1964). I & C. Leroy Gaylord, The Concept of Alienation: An Attempt at a Definition, in Marxism and Alienation, ed. Herbert Aptheker (New York: Humanities Press, 1965)를 참고하기 바란다.
- T. Richard Snyder, Ibid., pp. 10-11.
- Ibid., pp. 11-13.
- Health Policy Advisory Committee, The American Health Empire: Power, Profits, Politics (New York: Random, 1971).
- Jonathan Kozol, Iliterate America (New York: Doubleday Anchor, 1985).
- T. Richard Snyder, Ibid., pP. 13-14.
- Ibid., pp. 14-15.
- Ibid., p. 16.
- Ibid.
- Ibid., P. 29.
- Ibid., P. 33.
- Ibid., p. 40.
- The Encyclopedia of the Social Science, ed. David Sills, vol. 15. (New York: MacMillan and the Free Press, 1968), pp. 618-621.
- T. Richard Snyder, Ibid., p. 43.
- Ibid., p. 47.
- Ibid., p. 49.
- Ibid., pp. 50-52.
- T. Richard Snyder, Once You Were No People, – The Church and the Transformation of Society, (Meyer Stone Books, Bloomington, IN, 1988), p. 2.
- Ibid.
- Ibid., p. xv.
- Ibid.
- Richard J. Bernstein, Praxis and Action (Philadelphia: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1971), p. IX.
- Paul F. Knitter, No Other Name? – A Critical Survey of Christian Attitudes Toward the World Religions (New York: Orbis Books, 1986), p. 193.
- David Tracy, “Theologies of Praxis”, in Creativity and Metho: Essays in Honor of Bernard Lonergan, Matthew L. Lamb, ed. (Milwaukee: Marquette University Press, 1981), p. 36;
Lamb, “Dogma Experience, and Political Theology”, Concilium, 113(1979) 81; Lamb, “the Theory-Praxis Relationship in Contemporary Christian theologies”, Proceedings of the Catholic Theological Society of America, 1979, p. 171. - Leonard Boff, Jesus Christ Liberator: A Critical Christology for Our Time (Maryknoll, 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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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ernard M. Loomer, “The Web of Life.” The Graduate Theological Union, Berkley, California, October, 1977, p. 1.
- Allan Aubrey Boesak, Farefell to Innocence (Maryknoll, NY: Orbis Books, 1977), p. 152.
- Preire, Pedagogy, Ibid., p. 19.
- H. Bergson, Les Deux Sources de la morale et de la religion Paris, 1932
- K. R. Popper, The Open Society and its Enemies Volume 1, Plato and Volume 2, Hegel & Mark (London: Routledge & Kegan Paul,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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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oy Bhaskar, The Possibility of Naturalism: A Philosophical Critique of the Contemporary Human Sciences (New York: Humanities Press, 1979), p. 27.
- Demo, article in Comunidades: Ingreana base, Estudos da CNBB No. 3 (Sao pau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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