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배경과 문제
1. 지역적 배경
본 교회는 지리적으로 뉴욕주 나소 카운티 서쪽 경계선에 인접한 뉴욕 시 퀸즈 보로 동쪽 경계선에 위치하고 있다. 이 경계선에는 북으로는 Union Turnpike, 서쪽으로는 Francis Lewis Boulevard, 남쪽으로는 Murdock Avenue, 동쪽으로는 Belt Parkway, Cross Island Parkway, and Winchester Boulevard가 놓여 있다. Northern State Parkway로 이어지는 Grand Central Parkway가 동네 북쪽으로 Long Island Expressway가 또한 가로지르는, 롱아일랜드와 뉴욕시 사이 중심에 놓여 있는 교통의 요지로 볼 수 있다. 브롱스나 코네티컷 주로 관통하는 Throughsneck Bridge와 연결되는 Clearview Expressway가 동네 북쪽 한 귀퉁이 Hillside Avenue에서 끝나고 있다. 교회의 위치는 잘 알려져 있는 Jamaica Avenue 220가에서 한 불락 북쪽에 위치하고 있어서 초행길에 찾 아오기가 용이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The Story of Queens Vi1lage (1) 에 의하면, 1640년대 Connecticut으로부터 건너온 사람들이 Hempstead에 정착해 살다가, 그 중 20여 가정이 서쪽으로 이동을 원하여, Hempstead와 Canarsie사이의 땅을 인디언으로 부터 총 두 자루, 외투 한 벌, 화약과 납등과 바꾸었다. 1656년 3월 21일에는 Jamaica (Hawtree Creek 과 Lewis Boulevard, 206th Street)에 정착을 하고 나서, 1663년 3월 7일에는 다시 인디언으로부터, 서쪽의 Spring Creek (오늘날의 Brooklyn-Queens 경계선)과 동쪽의 Hook Creek (오늘날의Queens-Nassau 경계선) 사이의 땅을 구매했다.
Queens Village는 북쪽의 Grand Central Parkway을 따라서 해발 200 feet 높은 대지에서 남쪽 Murdock Avenue를 따라서 해발 60 feet의 평지로 기울어 내려간다. 서쪽의 Queens 지역에서 동쪽으로 Wantagh에 이르는 평원을 “대 평야”로 불려졌던 반면, Queens Village를 1600년대까지 “작은 평야”로 알려졌었다.(2) 나무 하나없이 해안의 풀들 만 자라고 있어서, 1600년도 마을 공식 기록에는 7월 8일 까지는 인근 지역에 동물의 사료들을 제공하기 위하여 아무도 풀을 깍지 못하도록 법령을 세웠고, 1661년도에는 8월 10일 이전에 풀을 깍는 사람은 벌금을 냈다고 한다.(3)
본 교회가 속하여 있는 뉴욕시 행정구역은 Queens Village에 속한다. 이 마을은 Community Planning Board #13(동사무소와 같은 곳)에 속하며, 학군으로는 29 학군에 속한다. 공립학교로는 고등학교(912) 하나, 중학교(68) 하나, 국민학교(K-5) 4개가 있다. 사립학교로는 Prep School(k-8) 하나, 루터란 교회 학교(k-8) 하나, 천주교학 교(K-8) 둘이 있다. 교회로는 유대인 회당이 3개, 천주교가 3 개, 성공회 교회가 1 개, 루터란 교회가 3 개, 연합감리교회가 1 개, 개혁장로교회가 1 개, 연합장로교회가 1 개, 희중교회가 1 개, 침례교회가 3 개, 오순절교회가 1 개가 있다. 그리고 YMCA 하나, 도서관 하나, 파출소 하나, 우체국 둘이 있다. 우편번호 구역으로는 11427, 11428, 그리고 11429의 3 구역으로 형성되여 있다.
Queens Village가 뉴욕시의 일부 행정구역이 된 것은 1898-1919년 사이에 있었던 것 추정된다.(4) 동네신문이였던 Queens County Times, 1971년 9월23일자에 의 하면 1685년, 영국의 Charles왕 2세의 부인인 Graganza의 Catherine 여왕의 명예를 위하 여, 마을 이름이 Queens Village로 지여졌다고 한다.'(5) 1850년에 첫 우체국이 세워졌고, 1857년에 첫 학군이 정해졌다. 1871년에는 기차 정거장이 개설되었다. 1889년에 처음 으로 소방대의 조직과 함께 건물도 지어졌고, 1896년에 전화가 처음 대중에게 유용하 게 되였으며, 1897년에는 Jamaica Avenue선상에 전차가 지나가게 되었다. 1898년에 전 기가 들어왔고, 1899년에는 시로부터 물이 공급되기 시작했다. 1905년에는 전철이 1924년에는 시내버스 차고가 동네에 세워졌고, 10여개의 노선이 지나거나 이 곳을 종 점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1955년 처음으로 고등학교가 마을 안에 설립됐다.(6)
이 마율의 인구는 1980년도 인구센서스에 의하면 59,734명이였으나 1989년에는 60,680명으로 만 9년 동안 946명이 늘어나는 완만한 성장을 보이고 있으 나 최근 인도인과 필리핀 그리고 서반아 인들이 백인노인이 퇴직하고 이사나간 자리 에 들어와 채우고 있다. 즉 인구성장은 완만하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소수민족으 로 구성원이 변화해 가고 있는 것이다. 가족수는 1980년에 18,909 가정에서 20,447 가 정으로 늘어나서 총 1,538 가정이 늘어났다. 이것은 분명히 세계인구성장 비례인 1.72%와 미국의 인구성장 9.8%, 그리고 뉴욕주의 성장 추세인 2.5%보다 훨씬 뒤져 원만하게 성장하는 16% 해당한다. 이것도 분만을 통한 자연 인구 증가가 아니라 소 수민족의 인구가 (인도인과 필리핀인 그리고 자마이카인 등) 이사해 들어와서 인구의 성장을 보이기 때문에, 주민의 구성 요원이 극적으로 바뀌어 나가고 있다.
그리고 평균 가족당 수입을 보면, 10여년 사이에 S23,217.67에서 •$38,873.67로 S15,656 증가한 전형적인 미국의 중산층이 주를 이루고 있는 마을이라 볼 수 있다. 그 내용을 우편번호 구역별로 보면 다음과 같다.(7)

[표 1]에서 보듯이 평균 나이가 35.6세에서 37.7세로 2.1세로 나이가 들어 감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표 2]에 나타나듯이, 교회가 위치한 11427과 11428 지역에 는 65세 이상되는 노인이 20.1%와 14%의 인구로 11429지역의 9.7%에 비교하면 2 배 이상의 노인 인구가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표 3]에서 보듯이 인종비율이 교 회가 위치한 11427과 11428은 백인이 76.8%와 75.7%인 반면 11429지역은 흑인이 77.5%로서 상반된 현상이 지역에 따라 한 마을에 나타나있다. 교회에서 한 불럭에 있는 Jamaica Avenue 남쪽 건너편부터 시작되는 11429 지역에는 흑인인구가 집중해 있는 지역이다.

기타는 주로 인도인 필리핀인들과 극소수의 중국인과 스페니쉬인으로 구성된다.

[표 4]에서 보듯이, 11427과 11428의 백인 지역이 11429 흑인 지역에 비해 홀로 사는 노인이 많다.

[표 5]에서 보듯이, 11428 지역이 가장 오래 전에 정착된 지역이고, 다음은 11427 그리고 11429 지역순으로 마을이 형성됐다고 본다. Embury 연합감리교회의 목사관은 1780년에 세워진, 이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집으로 이 곳에 처음 정착한 농 장주의 집이였다.”(8)
2. 교회적 배경
Embury 연합감리교회 영어회중은 1924년 10월 독일 감리교인의 동부연회에 의해서 Miss L.W. Buettner로 하여금 이 지역에 독일말을 사용하는 감리교회 하나 를 교회로 세울 만큼 충분한 인구가 있는지 여부를 조사하라는 사명을 맡긴데서 비 롯됐다. 그 조사결과 100가정 이상이 영어 예배하는 교회를 원했고 이에 그 당시 Brooklyn과 Long Island Society의 감리사인 Dr. Hubert B. Munson 목사에 의하여 창립예 배가 1925년 1월25일 주일 아침에 115명이 참석한 가운데 치루어졌고, 1925년 3월1일 교회가 조직됐고, 1925년 5월6일 첫 목사로 Rev. William H. Stewart가 파송됐다. 1926년 12월 12일에는 교회당 착공예배를 드렸고 1927년 4월10일 준공예배를 드렸다.(9) 현재 교인수가 256명으로 주일 참석과 현금을 하는 수가 99명이다. 교인의 60%가 퇴직한 노인들이고 교인의 75%가 백인을 이루고 있다. 교회행사를 결정하는 임원회 는 90%가 백인이다. 따라서 이들의 가치관은 과거의 관습과 추억의 회상 그리고 마 을 친구들과의 친교에 달려있다.
퀸즈 빌리지는 뉴욕시의 변두리이며 나소 카운티에서 돌을 던져 닿을 만한 거리에 위치한 동네로서 지난 수 년 동안 많은 가정이 특히 백인 가정이, 그 중에 젊은 이들이 롱아일랜드 지역으로 이사를 나가고 흑인, 스페니쉬, 인도인, 해이티 사 람과 동양인으로 그 자리가 메꾸어져 갔다. 기독교인들이 이사 나감과 더불어 교회 의 노인들은 계속 세상을 떠남으로 동네의 모든 교회들이 60년대 이후 계속교인들을 잃어가고 있는 추세에 있다. 한편 흑인들은 Jamaica Avenue 남쪽의 흑인 교회에 많이 참석하는 반면 Jamaica Avenue 북쪽 백인교회들에 참석을 꺼려하고 있는 사회현상이다.
1983년 6월26일 Embury 교회(METHODIST EPISCOPAL)가 이웃에 있던 Calvery 교회(UNITED EVALGELICAL)와 병합하면서” Rev. Thomas Fisher목사가 부임해 서 흑인을 위한 목회에 관심을 둔 결과 현재 계속해서 흑인 젊은 가정이 늘고 있다.
또한 1987년 한국인 윤태헌목사가 담임자로 파송되여 옴으로서 교회의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 1989년 교회 임원희에서 한국어 희중을 시작할 것을 만장일치로 결정하고,” 윤목사가 가족을 중심으로 한국어 예배를 오후 1시 시작한 지 1년 만에 1990년 12월9일 창립예배를 드리고, 1991년 12월 1주년에는 결산 약S40,000과 31명의 교인으로 성장했다.”(13)
한국어 회중의 특이한 현상은 13명이 국제결혼경험을 갖고 있는 점이다. 5명은 현재 국제결혼상태로 잘살고 있고 , 2명은 이혼 중에 있고, 2명은 이혼후 혼자 살고 있고, 1명은 이혼후 한국인 남자와 재혼, 1명은 이혼 후 한국인과 동거) 모두 30대에서 50대 중반까지의 나이 분포이고, Astoria, Woodside, Jackson Height, Elmhurst, Flushing 등지에서 거리에 상관없이 인간관계와 교회의 특수성 때문에 찾아오고 있다.
- 문제 개요
본 논문 구성을 위한 교회내의 7명의 연구반원들이 저자와 함께,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발견하게 됐다. 한인회중의 성인들을 다음과 같은 9가지 종류로 구분 할 수 있다: (1) 갖 이민 온 한인 부부, (2) 이민 온지 10년 이상된 한인 부부, (3) 한인 남편으로 부터 이혼하고 홀로 사는 여성, (4) 한인 남편으로 부터 이혼 수속 중이거 나 있는 여성, (5) 별거 중에 있는 부부, (6) 흑인인 히스페닉 남편으로 부터 이혼한 여성, (7) 흑인이나 히스페닉 남편으로 부터 이혼 수속 중에 있는 여성, (8) 흑인/히스 페닉/백인 남편과 첫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여성, (9) 흑인/히스페닉/백인 남편과 두번째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여성, (10) 흑인/히스페닉/백인 남편과 이혼 후 한 인 남성과 결혼 수속중에 있는 여성등이다. 이러한 한인회중의 절반 이상이 가정에 심각한 문제들을 갖고 있음이 발견되었고, 그들의 문제가 갖고 있는 정도가 또한 다양함이 발견되였다. 그 문제들이 평상시에는 눈에는 뜨이지 않는 것은 문제가 해결 되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사실은 보다 심각하게 심화되어 가고 있음이 종종 발견되 였다. 이렇게 심각하게 숨어있는 문제들은 단지 Embury 한인회중에 만 있는 것이 아 니라, 한인 공동체 어디에나 즉, 국제 결혼 공동체를 넘어 한인 이민 공동체에 보통 내재하고 있음이 발견된다. 상당수의 성인들이 심리상담자나 심리치료자의 도움을 받고 있다. 국제결혼 경력의 한인 여성이 Embury Homeless Shelter에서 종종 발견됨을 볼 수 있고, 이들은 또한 주립정신병원이나 감옥에서도 발견되곤 한다. T. Richard Snyder는 이러한 이들을 일컬어서, “이용당한 이들, 변두리 인생들, 불안정한 인생들, 멸시당한 이들, 삭제(짤림)당한 인생”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 Embury 교회의 한국어 회중에 41%가 국제결혼여성이나 경험 소유의 여성으로서, 13명중 8명이 이혼을당한 후에 경제적, 사회적, 도덕적, 종교적, 심리적 상황 에 미치는 후유증으로 말미암아, 자신감이 사라져서 매우 낮은 자기존중(SELF-ESTE EM)을 보이며, 또한 극심한 우울증이나 정신병을 동반한 가난과, 소외의 삶이 긴 장되고 힘겨운 매일매일 영위하게 한다.
이러한 소외의 근본 문제는 기존 교회의 외면에도 있다고 본다. 기존이민교회는 교회자체 물량적 성장과 전통적인 개인의 성령체험 그리고 교회학교의 성 장을 위한 교육정책등에 몰두하고 있다. 여기에 몇가지의 문제가 제시 된다. (1) 그리 스도인 가정의 소외 문제, (2) 그리스도인의 사회로부터의 소외.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믿음의 길은 새로운 시대와 장소, 즉 새로운 문화에 변함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제 시할 수 있어야 한다. 새로운 문화라는 것은 전통적인 교회안에서도 같은 교인들 중 에서도 시대가 변화됨에 따라서 발견된다. 따라서 소외는 새로운 문화에 적응치 못 할 때에 오는 괴리현상으로 교회는 늘 같은 교회내에서도 새시대를 위해 생성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교회는 변형되어야하며 민감한 대응책을 계속 마련해야 한다.
그러나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꺾어진 날개나 ‘변두리의 가치(MARGINAL VALUE)’를 삶의 온전성(WHOLENESS OF LIFE) 즉 평화(SHALOM)로 향할 수 있 도록, 교회내에 현재 방법연구나 제시 혹은 실행이 없다는 점이다.
- Embury교회의 문제들은 바로 삶의 온전성(평화)으로 부터 소외라는 근본 문제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발견하게 됐고, 본 논문은 이러한 문제 해결을 위한 한 방편의 시도가 필요함에 부응하여, 그리스도인의 간절한 기도 중에 하나임을 밝혀둔다.
다음과 같은 세가지의 사역영역에서 “교회생성을 향한 변형”을 시도하려 한다.
[I] 개인변형을 위한 치유사역: 회복을 위한 개인적 변형연습으로 이것은 개인의 정체성을 찾기위한 의식화의 사역을 말한다. 이것이 출애급 생성이다.
[II] 교회변형을 위한 ‘더불어’ 사역: 평등 공동체를 형성하기위한 변형연습으로 공동체의 인간화 사역을 말한다. 이것이 십자가 생성이다.
[III] 사회변형을 위한 예방사역: 작은 공동체가 사회조직을 공동체로 생성키위한 변형연습으로의 사역을 말한다. 이것이 평화생성이다.
- 문제 분석
1) 이민 속의 인간존재- 본 논문은 인종(/)과 성(1)의 차별(분) 대우를 받는 이민자의 정체성 위기가 경험하는 고난에 맞추려고 한다. 기회와 자유의 땅에서 5년 이 상을 살고 난 대부분의 이민자가 스스로 질문하기를, 나나는 누구냐?라고 자신에게 묻는 다. 그는 (1) 경제적 생존, (2) 자녀와의 문화와 언어의 차이로 오는 세대차 문제, (3) 미국 문화에 대한 자신의 고민, (4) 미국에서 사용할 수 없는 자신의 훌륭한 기술이나 직종을 사용 못하는 수치스러운 감정등으로 고민한다. 그래서 자기 실현을 잃버렸다. 따라서 다 음과 같은 삶의 영역에 대단히 불만족한 삶을 살아간다: (1) 신체적 필요, (2) 안전의 필 요, (3) 사회적 필요, 그리고 (4) 자기 존중의 필요. 이민자는 눈으로 보이지 않는 많은 방 향과 환경으로부터 긴장과 눌림을 받는다.
하나님은 고난당하는 사람을 보신다. 자유의 땅에서 자유를 잃은 이민자들을 보신다. 하나님은 그들이 자유롭기를 원하신다. 미국은 개척자의 땅이며, 자유경쟁의 땅 이고, 자유 기업의 땅이다. 사상이나 상업이나 아무 곳에도 인간을 지위와 위치로 깍아내 리지 않고, 자신의 능력대로 그 면류관을 받을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자유경 쟁은 어떤 사람들을 형편없는 가난과 기아와 죽음에 까지 이르게 한다. 세상 속에 이러한 실패는 도덕적 오점을 낳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조직의 힘에서 비롯되는 문제를 엿볼 수 가 있다. 개인의 삶 위에 군림하는 조직의 압력이 계속되고 있다. 더욱이 협력과 협동 속 에 믿는 종교와 같은 풍요로운 사회의 역설은 갈등이라는 마귀에 의해서 끊임없이 지배를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 속에 공공의 인간관계에서도 비인간화되었으나 그로인해 회복되지 못했고, 존경받을 만한데 그것 또한 회복되지 못했으며, 종교에 의해서도 회복 되지 못했다. 이민자는 도움이 필요하다.
- 이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 사회조직의 힘을 인간화합과 동시에 고난받는 개인의 생활안정과 행복을 위해서 교회는 일해야한다. 이민자가 자존심을 잃을 때 우울증이 온다. 이민자는 자신의 희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동기유발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 교회 는 다음 세 가지를 해야하리라 본다: (1) 의식화를 위한 치유사역으로 개인의 정체를 확 인하기 위한 개인변형에다 촛점을 둔 사역이다. (2) 인간화를 위한 변형사역으로 개인들 이 모여 집단의 몸을 이루어 조직의 평등화를 위해서 함께 함(EMPATHY)의 대화훈련의 사역이다. (3) 생성 공동체를 위한 예방사역으로 교회가 누룩이 되여, 자원봉사(VOLUNTA RY SUFFERING)를 통해서 사회변형을 해나간다.
- 2) 이민 과정
- 과거 개척이민 (1882-1905) 역사는 1882년에 체결된 통상 및 우호조약으로 한미 양국의 국교가 수립되면서 한국인의 미국 방문 및 거주의 자유와 기회가 허용되면서 부터 시작된다고 보는 것이 통상 인식이다. 한미국교의 시작으로 외교관과 학생들이 미국에 건너오나 정식 이민은 1903년에서 1905년 사이에 7,226명의 한국인이 65척의 배에 실려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기 위해 건너오면서 비롯된다고 본다. 그들 중 80% 이상이 남자 성인이였으며, 한국에서의 직업은 농업 이외에 노동자, 군인, 기독교 교회의 종사자, 그리고 유학자였다. 그 중 상당한 수가(40%정도) 기독교인 이였으며 하와이 교포 중 대다수가 교회에 나갔다. 한국인의 하와이 이민은 1905년 한국 외무부가 인천 및 다른 항구도시의 시장에게 한국인의 이민출국금지를 명령 함으로 얼마동안 끝나게 되었다.
- 1906년과 1949년 사이의 이민은 먼저, 1906년에서 1924년 사이에 약 2,000명의 한국인이 하와이와 미서부에 건너온 것으로 시작된다. 이 당시 미국에 건너온 한국인을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는 정치적 망명자와 학생들이다. 둘째는 한국 교포 남자의 사진을 보고 결혼을 약속해서 온 여성들(Picture Brides)이 이 시기에 미국에 온 다른 하나의 큰 무리를 형성한다. 이 시기에 있었던 한미 이민 사상 획기적인 또 하나의 사실은 1903-1905년 사이에 하와이에 왔던 개척이민자들이 상당수가 미 본토와 멕시코로 재 이주했다는 사실이다. 켈리포니아의 벼농장과 철도건설에 일하기 위해 2,000명 이상의 한국인이 1906-1924년 사이에 하와이로 부터 미 대륙으로 떠났는데
대부분이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했다. 또한 다른 1,000여명은 멕시코 유카탄으로 옮겨 사탕수수 재배농장에서 일을 했으며 그들 중 많은 수가 큐바로 재 이주했는데 이러한 근거로 멕시코와 큐바에 지금도 한국인이 적지않게 살고 있다. 1924에 미국에서 가장 보수적인 이민법이 국회를 통과해서 동유럽 및 남유럽으로 부터의 이민이 크게 타격을 받게 되었으며 한국 및 다른 아시아 국가로 부터의 이민은 완전히 막혔다. 그래서 1924년부터 1945년까지 한국인의 이민 수는 1년에 20명도 못될 정도로 거의 막힌 셈이다.
1950년과 1969년 사이의 이민은 다시 점차 증대되어 1960년대에는 그 속도가 가속되었다. 그 두가지 이유는 첫째, 남북의 분단과 이에 따른 한국 전쟁으로 미국이 군사, 정치, 경제적으로 한국에 깊이 개입했다는 사실이며, 둘째는 1965년에 미국에서 과가의 보수적인 이민법을 개정해 아시아 제국에도 문을 열게 되었다. 이 때 태평양 연안국에 1년에 100명을 허락했는데, 1950년에서 1969년까지 20년사이에 32,957명의 한국인이 미국으로 이주했으며 75,241명의 한국인이 학생이나 정부의 대표, 혹은 임시 방문객으로 미국을 방문했다. 방문객의 상당수는 돌아가지 않고 불법으로 체류하거나 영주권을 받았다.(15)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미국에 이주한 한국인을 크게 네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 한국에 주둔한 미군과 결혼해서 이민 온 한국 여성들이다. 미 이민국 자료에 따르면 1950년 이래 지금까지 4만명 이상의 한국 여성들이 미국 시민권자의 배우자로 이민왔는데 이들 대부분이 미군과 국제결혼한 사람들이다. 둘째는 미국 시민에 의해 입양된 고아들이 한 큰 부분을 차지한다. 뉴욕 타임즈지는 1977년 3월 1일자 기사에서 1955년부터 그 당시까지 1,300여명의 한국 고아가 미국시민에 의해 입양되었다고 했는데 지금은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세째, 학생, 연수원, 지사원, 특파원 및 임시방문으로 미국에 왔다가 나중에 영주권을 받고 돌아가지 않은 사람들이다. 문교부 통계에 의하면 1953년부터 1973년까지 1만명 이상의 한국인이 유학으로 도미했는데 그 대부분이 귀국하지 않고 이곳에 영주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네째, 1965년에 개정된 이민법의 혜택으로 건너온 간호사, 의사, 약사, 및 다른 취업 이민자와 그 가족들이 1960년대 한국인의 미주 이민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16)
한국에는 여자와 남자의 비율이 비슷한데 비해, 재미 교포사회에서는 여자가 숫적으로 앞서고 있으며 이것도 한국 이민자들의 특성의 하나이다. 미 이민국 자료를 보면, 1970년의 경우를 보면 한국인 이민자들의 남녀의 비율이 33대 67로 여자가 압도적으로 우세했는데 그 이후 여자 우세 현상이 점차 둔화되어 1984년에는 42대 58로 어느정도 평형을 이루었다. 한국인 여자 이민자가 남자 이민자 보다 숫적우세를 보이는 이유로 세가지 사실을 비교할 수 있다. 첫째, 한국 주둔 미군이 한국인 여자와 결혼해서 배우자를 미국으로 초청한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한국전쟁으로 시작된 미군들의 한국 여성과의 결혼은 한국전쟁이 끝난지 오랜 지금 그 수가 점점 증가해 최근 몇년 동안 34천명의 한국 여성이 매년 시민권자의 배우자로 미국에 이민왔다. 둘째로 미국시민에 입양되어 들어오는 한국인 고아들 중 여자의 수가 남자의 수 보다 훨씬 많다는 사실도 재미 교포 여성의 숫적 우세에 기여를 한다. 세째로 한국인 간호시 이민이 교포사회에서 여성의 숫적 우세의 한 요소가 된다. 1970년 초기에 비해 1980년대에 들어 한국인 이민자의 남여 비율이 어느 정도 균형이 잡힌 이유는 바로 최근에 한국인 간호사 이민이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민병갑 교수는 이민사회의 성차별의 근거 즉 평등한 남여 관계를 유지하기 힘든 이유에는 최소한 두 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 이유는, 대부분이 자영업을 운영하는데, 대부분이 남편과 함께 일을 하기 때문에 남편의 사업에 제공하는 노동은 본인의 권리신장에 직접적인 도움이 못된다. 독립해서 고용되어 일할 경우 여성들은 자기 자신의 이름으로된 수표로 임금을 받아오기 때문에 남편의 가게에서 일하는 것보다 경제적으로 더 독립할 수 있게 된다. 둘째는 대부분이 한국인이 운영하는 곳에서 한국인들 끼리 일을 하면서 우리 말과 우리 문화를 유지하기 때문에 다른 아시아계 소수민족 보다 남성우위 관습을 더 오래 유지할 수 있다. 남여를 구별하는 우리의 전통은 우리의 언어와 모든 관습에 반영되어 있기 때문에 언어와 관습에 우선 미국화되지 않고 남여 평등을 이루기는 힘들다.
3) 이중문화 가정의 이해
이중문화 가정이란 흔히 국제결혼 가족과 이족결혼 가족을 말하며 문화와 국적이 다른 배우자를 기반으로 이루어진 가정을 뜻한다. 미국은 복합문화 사회로서 여러 종족의 이민으로 이루어져 왔다. 이에 따라 사회학자들은 다른 종족 사이의 결혼과 이중문화 가정을 대상으로 많은 연구를 해 왔다. 특히 최근에는 우리 민족의 인구가 해의로 이동함에 따라 이민 교회가 급중하고 있으며 적지 않은 목회자들이 이중문화 가정에 관심을 두고 목회의 방향을 정하고 있다.
여기서 살펴보고자 하는 이중문화 가정은 소위 국제결혼율 통해 1950년 6.25 이후 한국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들과 결혼하여 미국으로 이민오게 된 13만명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이룬 이중문화 가정이다. 또한 이민가정에서 자란 1.5세나 2세 자녀들의 상당수가 이족 결혼을 했거나 앞으로 하게 될 것이다. 특히 대도시, 한인 인구가 적은 중소도시와 농촌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교포 가정의 경우, 이족 결혼이 과반수 이상으로 높아지게 되었다. 그러기 때문에 국제결혼가정, 이족결혼가정, 양자가정 등등의 이중문화 사역의 역할은 더욱 중요시되고 다양화되어야 할 것이다.
4) 이중문화 가정의 역사적 배경
보건사회부와 이민국 통계자료에 의하면 이민법이 개정된 1965년 이후 한국 이민자들이 급증했다. 그러나 이들 한국 이민자 이외에 초기 이민의 토대를 이룬 한인들의 대다수는 국제 결혼한 사람들과 그들이 초청한 가족 친지들이라고 한다. 6.25 이후 한국사회는 경제 빈곤, 사회 불안정, 도시화 등으로 불안한 상태에 빠졌다. 많은 여성들이 교육, 취업, 인간 대우면에 있어서 불균등한 처우를 받았다. 특히 빈농가정에서 태어나 진로가 암담해 보이던 젊은 여성들이나 도시 하층 젊은 여성들이 꿈의 나라로 보이는 미국으로 갈 수 있는 기회는 국제결혼의 길을 찾는 일이었다.
한국 주둔 병사들과 결혼하여 미국으로 온 한국 여성들에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외로움의 고통이 뒤따르게 되었다. 출가외인의 몸에다 국적이 다른 미군과 결혼해서 일단 미국으로 오게되면 친정 식구들을 다시 보기란 아주 힘든 일이 되었다. 지금은 한인 교회, 식당, 비디오, 한국 여객기 등을 통해 한국 문화나 한국인들을 접할 기회가 많이 있지만 5,60년대와 70년대 초기만 해도 문화 단절로 인한 고독감과 이문화에 대한 부적응의 문제는 아주 심각했다.
한편 이런 와중에서 한인교회를 중심으로 미국을 제 2의 고향으로 만들려는 노력이 시작되어 70년대 부터는 미기지촌 근교에 한인 교회가 급증하게 되었다. 주로 가장 많은 병력이 주둔하고 있던 미보병 2사단(동두천)과 오산 미공군기지를 거쳐 미국내의 보병사단과 공군기지가 있는 지역에 전속하여 오게 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미국으로 오게 된 한국인들이 가족들을 초청하여 한인 교회를 만들게 되었다.
5) 이중문화 가정에 대한 이해
국제결혼하게 된 군인 가족들은 전속으로 인해 주거지 변동이 잦을 뿐 아니라 문화 차이와 냄새가 다른 한국음식에서 빚어지는 몰이해로 이혼이나 별거 등 부부와 가족 간에도 많은 갈등을 갖게된다. 또한 자녀들에게 한국 문화를 전승하고 가르치는 일에도 어려움은 물론 문화 차이에서 오는 미국인 시집 식구들과의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일에도 어려움을 느낄 때가 많다. 언어의 문제, 적응상의 문제, 소외감, 정신 긴장, 박해, 남편으로 부터의 학대, 사회의 외면등 고독과 외로움으로 어려움을 격는다. 이러한 여러 가지 정신적 스트레스로 인해 감정 처리가 불안하고 부부 관계나 교우 관계에 있어 갈등과 반목을 일으킬 때도 있다. 이러한 어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에 대한 신앙 안에서 굳굳히 살아가려고 하고 한국인으로서 긍지를 갖고, 성공한 이중문화 가정을 이룬 여성들도 많이 있다. 바로 이런 이들이 보여주는 많은 장점들과 이들이 한국 이민 사회와 나아가 한국에 까지 미친 공헌은 결코 가볍게 간과할 수 없다.
많은 국제 결혼 여성들은 인내심, 자긍심, 의리, 상부상조의 정, 이중문화 적응력, 신앙심, 애국심, 동족애가 풍부하며 이민 토착기에 생활력과 의지력으로 성공한 모범적인 가족도 적지 않다.
실로 전후 한국사회가 필요로 하는 많은 영역에 저들은 물질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도움을 주었고 특히 이민교회 육성에 있어서 모퉁이 돌의 역할을 감당했다. 미국 이민의 상당수의 가족 초청을 도왔을 뿐만 아니라 가정 복지면에도 현대의 심청으로서 기여한 바가 알려진 것은 극히 드물어서 빙산일각일 뿐이다. 민간대사로서 유학생들의 자매로서, 입양아들의 친지로서, 자양 각색의 처한 환경에서 소수민족의 인권 신장에 적지않은 기여를 해왔다. 모국의 사회제도에서 생활 안정과 교육과 자가발전을 꾀하기 어려웠던 시기에 가족과 친척을 떠나 낯선 이국에서 주위의 아무런 도움없이 이중문화 가정을 꾸려 나가는 이들에게 감사할 조건들이 비일비재하다.
(1) 미국내의 대다수의 국제 결혼 여성에게 나타나는 소외의 삼단계 현상들:
소외의 첫째 단계는 국제 결혼 여성이 미국 땅을 바라보고 올 때 품었던 큰 꿈이 부서지고 또 실망하는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들이 지니고 있는 과거의 불행 한 가정형편이나 성장과정을 볼 수 있다. 한국에서 미군과 결혼을 했을 때 그들은 미국에서의 신데렐라와 같은 새 행복의 꿈을 꾸고 태평양을 건너왔다. 그들의 행복 한 꿈은 그들의 “가정”에 도착하자 공중분해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남편의 박봉과 남편의 식구들과의 언어소통의 불편 및 문화차이 그리고타국에서 갖았던 외로움에서 벗어난 남편의 무관심은 부인의 언어와 문화 충격과 더불어 부부사이에 관계를 불편 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신혼생활 몇 개월 만에 이혼하는 부부가 85%-90%에 가깝다고 교회내의 한 국제결혼 여성은 밝히고 있다. 어떤 남편은 아무런 경제적인 도움을 주 지 않아서 언어와 사회 인습을 모르는 여인들은 한마디로 “버림받아 쫓겨나는 신세” 가 되여, 미래를 향한 공포로 인한 불안으로 정상적인 사회 공동체로부터 버림받은 처지로 갑자기 전락한다. 심한 경우에는 잠잘 곳도 없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 도움으 로 부터, 자녀들로부터, 정상적인 직장으로부터, 심지어는 하루 세번의 식사마저 걱 정하며 그날 머물 곳을 염려해야되는 3등 인생이 되고 만다. 이러한 과정은 그들에 게 커다란 정신적 손상을 가져온다.
소외의 두번째 단계는 다음과 같은 현상으로 나타난다. 가정을 떠난 여성들은 친구들이 살고 있는 도시로 간다. 아무 기술이나, 사회적으로 일할 준비가 없 는 여성들은 삼분의 이가 쉽게 돈벌이를 할 수 있는 마사지 팔러에서 일한다. 도시 의 한국여성이 일하는 맛사지 팔러는 맛사지 서비스 이외에 매춘 행위를 하는 상업 이 행해지고 있다. 그들은 미래에 대한 공포를 잊고 극심한 외로움과 과거를 잊기 위하여 술을 마시며 마약을 시작한다.
소외의 세번째 단계의 현상을 살펴보면; 이 단계는 가정을 떠난 국제 결혼 여성들의 마지막 인생의 단계인 것이다. 정신 불안정과 분열 및 지병으로 인하여 직업을 잃고, 끝내는 홈레스 쉘터를 전전하거나, 정신병원으로 보내지게 된다. 정신 병원으로 보내지는 경우는 자신을 해할 수 있거나 남을 가해할 수 있다고 판단될 때 에 보로(Borough)마다 있는 시럽 병원이나 정신 클리닉에서 진단해서 주립정신병원(Q ueens Vilage에 위치)으로 보내진다. 병원에서는 밖으로 환자에 대한 정보를 내 주지 를 않아서 한국인 환자의 수를 정확하게 확인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리고 얼마는 마 약사용이나 거래로 시럽 내지 주립 교도소에서 형기를 끝나기를 기다리며 복역하는 국제결혼 여성도 있다. 집행유예로 나오는 경우, 그들을 변호할 수 있는 쉘터가 없 어서, 쉽사리 옛 생활 수단인 맛사지 팔러나 마약 사용하는 옛 생활로 돌아가고 만 다. 사회가 만들어낸 현대 사회악 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이에 대한 대책이나 한인 여성들 만을 위한 쉘터 하나 없는 형편에 있다. 이것이 “외국 땅”에서 온전한 삶(SHA LOM)으로부터의 소외된 상황인 것이다.
(2) 미국내 국제 결혼 한인 여성의 소외화의 세가지 형태:
이와 같은 비인간화 되가는 국제결혼 여성의 제반문제들을 다음과 같은 소외의 세가지 형태로 구분해보고자 한다. 삶의 온전성(WHOLENESS OF LIFE)은 개인적으로는 성실과 책임성으로부터 오며, 이는 타인과의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상호 존중하는 삶을 영위하고, 사회의 정의를 구현하는데 앞장서는 평화로운 삶의 모습을 이룬다. 그러나 사회가 국제결혼 가정을 소외시키면서 그 온전한 삶의 근거를 제공 하지 않고 있다. 이들이 겪고 있는 소외를 세가지 형태로 분류하면서 문제 해결을 향한 방향을 모색하려한다.
I. 개인적 성실과 책임성으로부터의 소외 (의식화의 문제):
본 교회 연구반은 교회내에 국제 결혼 여성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극심한 외로움 (소외의 제일단계)은 결국 자신들을 폄하하는 자기비하 (LOW SELF-ESTEEM)에 쉽게 빠져들게 된다. 그들은 그들의 문제가 심각함을 아는 듯하나 진정 그 문제들의 원인들은 모르는 것 같다. 자신의 능력을 과소 평가하는 여인들은 가정 주부로서의 안정된 개인의 평화가 가정안에서 형성되지 않는다. 따라서 “내가 누구인 가?”를 먼저 알지 못하고는 평화, 즉 온전한 삶이 없다고 본다. 본 논문은 먼저 성서 적 교회생성을 향한 현대교회의 변현연습에 있어서 개인의 정체성(Who I Am)을 찾 는 것을 기본이요 출발점으로 보고 시도한다.
II. 인간 상호간의 존중으로부터의 소외 (인간화의 문제):
교회 연구반은 국제 결혼여성들의 남편들이 한국인 아내들과 매우 다른 배경 즉 언어, 문화, 음식 그리고 사고방식등의 차이로 부부 서로가 인간관계의 진정 한 창문을 열어 놓고 있지 못함을 발견한다. 서로 간의 심각한 질투심이 교회생활을 하는 동안이라도 내적평화를 방해하는 경우와 가장 가까운 친구과의 관계에서도 잦 은 불화를 갖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일들이 국제 결혼여성의 의지에 반 해서 일어나고 있음도 발견했다. 그들은 이러한 소외에서 벗어나려고 부단히 노력하 나 그들의 인내성이 훈련되여 있지 않아서 교회생활이 저들의 인간관계에 전혀 효과 가 없음을 알았다. 따라서 이들의 특징 중에 하나가 교회행사에 참여하기를 꺼려하 나 자신들 끼리는 서로의 감정과 생각을 허물없이 나눌 수 있음을 본다. 그러나 그 들끼리의 갈등과 대립은 자주 생기고, 얼마 후에는 갈등과 대립이 없었다는듯이 다 시 만나 전처럼 서로 지낸다. 교회도 한 곳에서 오래 머물기 보다는 자주 이동하는 경향이 있음을 발견했다. 이러한 대인관계의 문제들은 개인 삶의 성실성에 대한 경 험이나 기술이 없으며, 또한 자신이 한 일에 대한 책임성의 결핍으로 인한, 인내심 결여의 결과로 본다. 따라서 가족과 친구 및 공동체내의 인간관계에서 평화를 찾을 수가 없다. 국제 결혼여성들은 한인 공동체로 부터 소외되여 살고 있다. 상호간의 좋 은 기회를 많이 놓칠 경우도 있고, 좋은 봉사의 기회도 놓친다. 대중이나 공동체내에 나타나서 봉사하는 것을 무척이나 꺼리고 있다. 심한 경우에는 국제결혼한 사실을 숨기기 위해, 개인적인 접촉을 스스로 막는 경우도 있다. 마치도 일반 한인교회 교인 들이 사회봉사에 익숙치 않은 경우와 같다. 더욱 안타까운 점은 한인 공동체가 고의 든 아니던 간에 국제결혼 여성들을 말과 행동으로 차별해온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 실이다. 따라서 “내가 누구인가?”를 모르거나 남을 모르고서는 온전한 삶이 있을 수 없다.
II. 구조적 평화로부터의 소외 (대화 공동체 문제):
대부분의 국제결혼한 부부들은 그들의 친분관계를 국제결혼한 사람 중 남편의 인종에 따라 개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그들을 위하여 유효하고 강력한 사회 단체가 뚜렸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들 스스로 친목 회를 구성하였다가 3년여 유지된 후 30여명의 회원이 3년전에 뉴욕에서 해산된 경우 가 있는 것 외에는 아직 발견할 수가 없다. 그들의 남편이 그들의 한국부인들을 버 릴 때, 이 여인들은 아무 곳에도 도움을 청할 기관이 없다. 그 자체를 수치로 알고 감추어 버린다. 만하탄에 Asian Women Center가 하나 쉘터를 소유하고 있으나 학대 받는 여성에 한하여 받고 있어서 한국인 여성이 많이 이용 못하고 있는 형편에 있 다.
또 한가지 간과할 수 없는 점은, 한인 공동체내에 보이지 아니하는 국제 결혼여성을 향한 차별이 그 정도가 심하다는 것이다. 이 점은 극심하여 국제 결혼 여성을 위하여 사회정의에 입각한 평화나 화해는 이민 공동체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한 가정에서 자녀가 다른 인종과 결혼하는 것에 찬성하는 부모가 극히 적음을 상기 할 때, 한인 이민 공동체가 진정으로 사회 구조적 차별주의에서 벗어나서 진정한 사 회정의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한인 이민사회의 공동체적 의식화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본다. 엠버리 신앙공동체는 예수님께서 변두리 인생의 여인들에게 관심을 쏟으시고, 그 선교를 “ECCLESIOGENESIS”(20) 즉 교회생성(화술소) 에 두신 것 처럼, 이름 없이 이국 땅에 버려진 국제결혼여성들을 위하여 신앙공동체를 생성하는 교회이다. 이것 은 하나의 작은 시도이나 이러한 이론과 방법은 어떠한 소외된 상황에도 적용되어서 교회가 주님의 귀하신 몸으로 영원히 생성되기를 기도한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본 교회 연구반은 같은 이해의 관점을 가지게 됨을 서로 확인하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문제의 근원을 질문하여 보고 깊이 연구되 어야 할 중요한 과제라고 서로 일치를 보았다. 주님의 몸되는 교회가 조직과 건물의 교회가 아니라 개인이 하나님의 형상인 자아의 정체성을 확인 함으로 치유되는 변형 과 사람들이 관계적 자아로 대내적 대화를 통한 교회 생성의 동등 공동체로의 변형, 그리고 책임적 자아의 대외적 관계로 창조적이고 사회구조 변형에 앞장서는 교회생 성을 끊임없이 연습하는 것이 진정한 선교임을 확인 했다. 이것은 작업은 개인의 의 식화, 교회의 인간화, 사회의 생성화의 과정을 거친다. 이 변 형은 쉬지 않는 반복 운동을 통해서, 교회의 기존 조직과 건물 및 교인으로 더불어 새로운 교회로의 생성을 가능케하는 활동력이 되는 것이다.
[주]
1. Vincent F. Seyfried, The Story of Queens Village, New York, The Centennial Association, 1974, p. 11.
2. Ibid., p. 7 & 9., 부록 [A-1-2]
- Ibid., p. 11
- Ibid., p. 87.
- Queens County Times, September 16-23, 1971, Pp. 8-9., 부록 [A-1-1]
- Queens Village Chambers of Commerce, The Queens Village Guide, 1989, p. 19.
7. [표 1,2,3,4,5]는 MARKET STATISTICS, a Division of Bill Communications Producers of the Survey of Buying Power, 633 Third Avenue, New York, NY 10017, 5/15/90.
8. 교회병합 제 5 주년 기념 교회 역사, 1988년 6월 26일, p. 5.
Vincent F. Seyfried, Story of Queens Village, Ibid., & 부록 [A -1-4]
- Embury 연합감리교회 창립 102주년 기념예배 순서지에서, March, 3-10, 1935., & 부록 [A-1-3]
10. The 1991 Annual Charge Conference Report of the Embury United Methodist Church, p. 7.
- 교회병합 제 5주년 기념 교회역사, Ibid, p. 1.
- Embury 연합감리교회 임원회의록 (Minute of the Administrative Board of the Embury
United Methodist Church, 9/1989) - 할렐루야 연합감리교회 제 3 차 교인총회보고서, 1991년 12월 29일. & 부록 [D-1]
- T. Richard Snyder, Once You Were No People (Bloomington, IN: Meyer Stone Books,
1988), p. xiv.
- 민병갑, 미국의 소수민족, (New York: Queens College, 1990), P. 158.
16. Ibid., p. 159.
- Ibid, pp. 170-171.
- Ibid., pp. 185-186.
- 이부덕, 이중문화 가정과 목회의 방향”, 연합감리교가족 Vol. 5 No. 2 가을호, pp. 14-15.
20. 교회생성(Ecclesiogenesis)이란 말은 Leonardo Boff신부가 남미 부라질에서, 가난과 정치적 독재 밑에서 전통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는 교회가 자유, 정의, 사랑을 구현 할 수 없음을 알고, 기초 공동체로 교회를 시작하자는 의도에서 교회(Ecclesia)라는 말과 창조(Genesis)라는 말을 합성하여 “Ecclesiogenesis”라는 책을 썼고, 필자는 이를 “교회-생성 (Church-Birthing)”이라고 본 논문에서 그 뜻을 살려 사용하고 있다. 필자가 본 논문에서 사용하고 있는 “교회생성”의 의미는 사회와 교회속에 자리잡고 있는 소외 원인들의 위험성들을 변형시키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며 종합해 나가는 그리스도인의 경건훈련과 그 과정 결과 및 무리를 교회생성이라 말하며,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일컬어서 “변형 연습이라 말한다. 따라서 필자는 교회를 사건의 과정으로 보며, 건물과 직으로 말하지 않음을 밝혀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