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가족은 우리와 피부가 다른 타민족들과 믿음 생활을 10여 년 이상 한 경험이 있습니다. 처음 목사님께서 안수를 받고 첫 목회지인 네델란드계 백인들이 주류인 교회에서 그들을 섬기며 사랑을 나눈 경험은 우리 삶 속에 얼마나 값지고 귀한 경험이었는지 모릅니다.
미국에 온 지 3년, 귀와 입이 열리지 않은 것은 물론이요, 단일 민족 안에서 자라나고 교육을 받아온 우리에게 갑자기 이민족의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고 일하는 것은 처음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기도와 찬송을 하여도 가슴에 뜨겁게 와닿지 않으니 답답하기만 하였습니다. 교인들을 방문할 때나, 여선교회 회의나 각종 모임이 여간 부담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말을 잘 듣지도 못하고 할 줄도 모르니 눈치 만 보고 미소 짓거나, 적당하게 Yes’와 No’를 하다가 돌아오기 일쑤였습니다. 한인 사회와는 전혀 닿지 않고 동떨어진 외로움과 답답합 속에서 때로는 지루하기만 했습니다. 저는 가끔 이런 마음을 달래기 위해 늘 찾아가는 곳이 있었습니다. 그곳은 목사관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허드슨 강가였습니다. 봄이면 강물에 비쳐지는 꽃들의 물결과 여름이면 녹음이 녹아 내리는 듯한 초록의 물결, 가을이면 산불이 난듯 붉어져 흐르는 물결과 겨울이면 강물 위에 떠다니는 흰눈 섞인 얼음 조각을 바라보며 주님께 하소연했습니다.
“주님! 저는 너무 외로워요! 답답해요! 친구가 필요해요! 말동무가 필요해요!”
그러면 주님은 언제나 잔잔한 물결로 응답하시곤 했습니다.
“사랑해라! 사랑해라!”
얼마 후 목사님은 새벽 기도회를 시작했습니다. 새벽이면 교회의 현관 문을 활짝 열어놓고 목사님과 둘이서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새벽에 육중한 교회의 문을 열라치면 현관문 위에 자리잡고 있는 비둘기 떼들이 새벽잠을 설친다고 야단 법석이었습니다. 우리는 새벽이면 한국 찬송을 실컷 부르고, 찬 마루에 엎드려 교우들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새벽 기도회를 시작한 지 6개월 후, 어느 50대의 유대인이 지나가 다 들렀노라며 교회당에 들어왔습니다. 그는 이웃 교회에 다니는 프랭크 호프만이라는 건축회사 사장이었는데, 새벽마다 교회 문이 열리고 있음을 늘 호기심을 갖고 지내곤 하였습니다. 어느 날 성령의 감동 속에 “같이 가서 기도하라”는 강한 부추김에 왔노라며 감격의 눈물을 비오듯 흘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유대교에서 개신교로 개종한 지 얼마 안 된 신실한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는 새벽이면 우리와 함께 새벽 제단을 쌓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몇주 후엔 본 교회의 교인인 자동차 정비소에 다니고 있는 30대의 닐 어원이 호기심에 한 번 나와보더니, 계속 나오기 시작하였습니다.
1년 후, 마을에 있는 개혁장로교, 천주교, 순복음교회, 침례교, 감리교 등 일곱 개의 교회가 새벽 기도에 연합으로 모이기 시작하였습니다. 목사님, 신부님, 수녀님, 평신도, 병원에 수술하러 갈 사람들, 감옥에서 나온 사람들 등 모두가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찬송과 기도를 드리며, 그 마을에 제2의 영적 각성시대가 열렸다고 하며 감격의 눈물 을 흘렸습니다.
기도 제목들을 나누며 주님의 사랑에 서로를 위로하며 얼싸안기 시작하였습니다. 기타 반주에 맞추어 복음성가와 찬송가를 힘껏 부르며 서로의 사역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였습니다. 그동안 눈에 보이지 않던 산같은 벽들이 녹아내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숨통이 조이던 것과 같이 답답했던 심령이 심호흡을 한 듯이 목사관의 삶에 생기가 솟아 났습니다. 영어를 잘 못해 늘 미소로 감싸오던 교우들은, 어느새 저의 미소를 수많은 말보다도 더욱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때, 왜 하나님께서 인간의 무표정한 얼굴 위에 미소를 그려넣어 주셨는지 이해 할 것만 같았습니다.
무엇이든지 한 번 시작하면 변함없이 시행하는 미국 교인들을 대상으로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일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 기도 그룹이 형성되고 믿음으로 삶을 살아야 함을 배운 교우들은 무엇이든지 실행해 보고자 애를 썼습니다. 마치 잠자던 거인이 일어섬과 같았습니다. 주일이면 성도들이 회중 앞에 나와서 신앙고백을 하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교회 탑과 지붕이 수리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교회 주변에 꽃이 심겨졌습니다. 교회 문이 일주일 내내 잠겨질 줄을 몰랐습니다. 주일학교가 차기 시작하였습니 다. 30년 전에 입었던 어린이 성가대 가운이 박스 안에서 기지개를 펴고 나왔습니다. 교인들은 김치와 미역국, 만두를 먹을 줄 알게 되었습 니다. 저는 여선교회 회원들에게 김밥, 볶음밥, 만두 만들기를 가르쳐 습니다. 저도 그들로부터 칠면조를 굽는 법과 호박 파이 만드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교인들이 교대로 영어 개인 지도를 해주었습니다. 봄이면 강물에 가서 고기를 잡고, 여름이면 독립일 축제와, 가을이면 온 교인들이 볏짚타기 속에 말이 끄는 마차를 타고 황혼이 붉게 물든 들판에서 찬송을 부르며 자연을 즐겼습니다. 겨울이면 눈사람 만들기, 썰매타기, 연극 준비로 분주한 나날을 보내었습니다.
몇 년 후, 우리 가족은 감독님의 파송으로 교회를 옮기게 되었고, 프랭크와 닐은 평신도 사역자가 되어 목회자가 없는 교회를 맡아 담임하며 섬기는 주님의 귀한 일꾼이 되었습니다. 저희 가족은 떠나온 후에도 수년 동안 일 년에 한 번씩, 교회의 초청에 의해 가족 음악회를 열곤 했습니다. 그 때마다 우리는 더욱더 국경과 인종을 초월한 사랑과 그리움을 느끼며 기쁨으로 그들과 해후를 하며, 믿음 안에서 우리 모두 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인하는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인간을 하나로 만들지 않고 여러 가지 색깔로 다양하게 만드셨는지, 이해가 되던 시절이었습니다. 인종과 인종, 민족과 민족의 연합은 거 룩한 일입니다. 우리는 이웃에 있는 다른 색깔의 이웃과도 사랑을 나누며 서로의 것을 배우고 이해하는 노력 속에 형제애를 나누며,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며 살아야겠습니다. 인종과 인종의 문제는 정치인이나 특별한 지도자가 해결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믿음 안에서 사는 우리들이 먼저 사랑을 할 때, 서로의 벽과 이질감은 오히려 멋진 조화의 재료가 되어 우리의 삶을 더욱더 아름답고 풍성하게 수놓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