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꽃 이야기” (목사관 서신, 분꽃이야기, 열두번째) 2001, 윤 완희

우리 집 정원에는 진분홍빛 분꽃들이 한창 어우러져 그 아름다운 자태를 마음껏 자랑하고 있습니다. 지난 봄 어머니가 심어주신 몇 개의 씨앗에서 한껏 가지들이 뻗쳐나오더니, 수도 셀 수 없는 꽃송이들이 너도나도 다투어 한여름 내내 피고 지었습니다.

분꽃들은 한낮의 해 아래 몹시도 수줍음을 타는 듯, 꽃잎들을 단단히 닫아두었다가 해가 서산 넘어갈 때쯤이면, 그 샐쭉한 꽃잎을 벌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달이 하얗게 떠오르는 저녁이면 청아하고 단아한 모습으로 활짝 피어나 그 우아함이 절정에 이릅니다.

암팡지게 피어난 어여쁜 꽃잎들을 바라보노라면 마치도 불꽃이 튀어나오는 것과 같은 삶의 열정을 느끼게 됩니다. 누구의 삶이 이토록 싱싱하고 성실할 수 있으며, 누구의 삶이 이처럼 순수하고 아름답게 피어날 수 있겠습니까?

분꽃은 예전부터 시골마당의 한쪽 부분을 차지하여, 여름이면 여인 네들의 꽃시계로서의 일목을 담당하기도 하였습니다. 할머니들은 꽃 잎이 벌어지기 시작하는 때를 맞추어 나이 어린 며느리들에게 보리쌀 을 가마솥에 앉힐 때가 되었음을 알려주었습니다. 하루종일 논밭에서 일하고 돌아오는 남정네들을 위해 때를 맞춰 맛있는 저녁식사를 준비 하려면, 밥을 짓기 전에 먼저 보리쌀을 푹 삶아내야만 구수한 보리밥
을 준비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분꽃은 아이들의 소꿉놀이에도 없어서는 안 될 꽃이었습니다. 색색의 꽃잎을 따서 여자 아이들의 긴 머리에 잔뜩 꽃고 각시놀이며, 사금파리에 짓이겨진 벌건 꽃잎은 소꿉놀이 밥상에 올려지고, 까만 씨앗 속에서 나오는 하얀 가루는 계집아이들의 연한 피부 위에 분가루가 되어 발라지기도 했습니다.

우리의 이민 보따리에 묻혀온 분꽃은 자기의 모든 고독과 아픔마저도 꽃으로 피워낼 줄 압니다. 늘 이웃으로 함께 살아가던 채송화와 봉선화가 곁에 있어 주지 않아도, 주인의 손에 심겨지는 대로 말없이 있는 자리에서 목숨 다해 최선의 아름다움과 인내와 기쁨과 절제를 다 이룹니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팔벌림을 쉬지 않고 바람과 해와 달과 비와 천둥까지도 달게 받으며, 필 때와 질 때를 가릴 줄 아는 지혜가 있습니다. 행여 지나가는 나비가 잠시 머무르기라도 하면, 꽃들은 감사하여 몸을 흔들며 함께 춤을 춥니다. 저녁의 은은한 달빛을 사모하고 밤새 애간장을 다 쏟아놓는 풀벌레의 연가에 아침이면 더 붉어진 분꽃들의 수줍은 얼굴들 … …

지난 달 억수 같은 소나기가 며칠씩 쏟아 부어지던 날, 분꽃들이 모두 앞으로 쓰러져 버렸습니다. 연약한 잎사귀와 꽃잎에 며칠을 빗줄기에 얻어맞은 뿌리들이 견디지 못하고 땅 밖으로 거의 뽑혀진 것이었습니다. 저는 서툰 솜씨지만 얼른 줄을 동여매 주고 몸을 가눌 수 있 도록 흙을 다시 덧입혀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언제 쓰러졌었느냐는 듯이 다시 뿌리에 힘을 얻고 하늘을 향해 맘껏 심호흡을 하고 있었습 니다. 그 작은 몸에도 천명이 있어 허락하신 명이 다할 때까진 쉽게 흙으로 돌아갈 순 없는 듯하였습니다.

분꽃의 성품은 늘 명랑하고 순백합니다. 언니들의 순박한 미소 같기도 하고, 아기들의 방실거리는 모습 같기도 하고, 이웃집 새댁의 함초롬한 모습이기도 하며, 화려하거나 유별나지 않고 정감이 오고가는 귀여운 꽃, 어느새 세월의 나이를 그 작은 몸에도 속일 수 없어 검은 씨앗 또르르 이 땅에 남기우고 미련없이 떨어지는 꽃잎, 꽃잎들 … …. 그러나 내일에 다시 똑같은 생명으로 부활하리라는 굳건하고 확실한 큰 언약을 씨앗 한 알 한 알마다 잊지 않습니다.

누가 이 꽃에게 시간과 세월을 말하시고, 누가 이 꽃에게 내일을 약속하셨단 말입니까?

A flower bed filled with Four O'Clock flowers (Mirabilis jalapa), blooming in vibrant pink, magenta, and yellow hues. The scene is set in late afternoon light, with soft shadows and a peaceful garden atmosphere. No text.

Unknown's avatar

About TaeHun Yoon

Retired Pastor of the United Methodist Church
This entry was posted in Essay by WanHee Yoon, Four O'Clock Flower Story. Bookmark the permalink.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