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28~30일에 뉴욕 주 엘렌빌(Ellenville)에 있었던, 미 연합 감리교 감독 주재 수양회(Bishops Convocation) 강사 중에,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의 손자 되는 아론 간디(Arun Candhi)와 부인 되는 수난다(Sunanda) 간디가 참석하였습니다. 책과 영화를 통하여 마하트 마 간디의 정신 세계와 비폭력주의에 대하여 영향을 받고 있었던 사람으로서, 그의 친족을 만난다는 사실은 특별한 감동을 불러일으키기 에 충분하였습니다.
아론 간디는 서아프리카에서 태어나, 6세부터는 할아버지인 마하 트마 간디의 손에 의해 자라났습니다. 그는 20대에 인도의 저널리스트로 활약하였습니다. 그는 정규 학교교육을 한번도 받아 보지 않고 자라났음에도 불구하고 네 권의 책을 저술하고,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비폭력주의 사상과 정신 세계의 전수를 위해 비폭력주의 학술연구원을 미국에 설립하여 활약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의 부인 수난다는 간호사로 인도 여성들의 계층 차별의식의 타파와 어린이와 여성들의 건강을 위하여 일하고 있습니다.
그가 소개한 사상 중, 잊을 수 없는 예화를 한 토막 소개하고자 합니다.
7세의 아론은 할아버지가 주신 3인치 정도의 몽당연필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는 할아버지 모르게 몽당연필을 밖으로 집어던져 버리고, 할아버지께 달려가 새 연필을 달라고 조르기 시작하였습니다.
“네가 쓰던 연필이 어디 있지?”
“그것은 너무 작아서 버렸어요!”
“얼마나 작은지 볼 수 있을까?”
“버렸어요. 어디 있는지 찾을 수 없어요”
“찾아오렴.”
할아버지의 부드러운 눈매가 아론을 올려다보았으나, 어린 아론은 거절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 밖은 이미 어두워서 나가서 찾을 수가 없어요”
“그래? 손전등을 사용하면 되겠지?”
결국 아론은 캄캄한 밤중에 밖에 나가 연필을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휙 던져 버린 연필을 찾기란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 무서움과 외로 움에 싸인 채, 두 시간이 지난 후에야 연필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어디 보자. 흠, 이것은 열흘간은 더 사용할 수 있겠구먼·… …”
어린 아론은 울상이 된 채 할아버지를 바라보았습니다.
“아론, 이리 와 앉거라! 너는 두 가지의 교훈을 잊지 말거라! 첫째는, 세상에는 수 십 만의 어린이들이 평생에 한 번도 이런 연필을 잡아보지도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 아직도 사용할 가치가 있는 것들을 버린다는 것은 낭비다. 둘째, 이 작은 연필이 쓰레기가 되어 우주에 끼치는 영향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필요에 의하여 사용하던 것들은, 남김없이 모두 사용해야 한다. 낭비하는 버릇은 우주 환경을 깨뜨리고 우주의 질서를 문란케 한단다.”
1980년대 미국의 미시시피 대학의 초청으로 미국에 온 아론 간디는 캠퍼스에 널려져 있는 연필과 볼펜으로 간디 사상에 대한 논문 연구를 초안하는 데 사용하고도 남았다고 합니다. 연필을 줍는 그를 처음에는 이상하게 보던 캠퍼스의 대학생들이 모두 연필을 주워다가 그에게 주었다고 합니다.
1940년대에 벌써 우주 환경에 관심을 가졌던 간디의 사상과 철학의 깊이에 새삼스레 고개가 숙여집니다.
2000년대를 눈앞에 둔 우리 세대에 새롭게 부상한 ‘지구환경을 가꾸자”라는 캠페인을 우리 모두가 얼마나 절실하게 실천하고 있는지 부끄럽습니다. 우선, 나의 가정을 돌아보더라도 책상 서랍, 리빙룸 서랍, 의자 밀, 틈이 있는 곳마다 사용치 않는 연필, 몽당 크레용들이 먼지처럼 버려져 있습니다. 언제부터였는지 몰라도, 아이들에게 물건의 가치에 대한 강연(?)을 아예 포기한 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새 학기가 되면 으례 새 크레용과 새 연필들을 사서, 새 가방의 새 필통에 넣어줌으로 나의 할 일과 책임을 완수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던가 싶습니다.
낭비는 인류의 앞길에 죽음의 선포와 같습니다. 죽어가고 있는 모성의 대자연을 이어받을 후손을 생각하면, 우리의 낭비는 생명과 직결된 문제들입니다. 병든 물고기를 먹고, 희뿌연 하늘 밑에서 갖가지의 공해병으로 죽어갈 우리의 후손들을 생각만 하여도 아찔해집니다.
해가 갈수록 이상 기후 현상이 지상의 여기저기에 천재지변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우리가 비록 깊은 사상가이거나 철학자가 아니더라도, 신앙인으로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를 가꾸고 돌봄이 우리의 사명임을 새롭게 직시해 봅니다. 그것은 곧 세계를 향한 우리 자신들의 새로운 신앙의 정립입니다. 비폭력주의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폭력이 사라지는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연을 파괴함을 벗어나, 겸손히 자연과 함께 공존함을 배우며 살 때 이루어진다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세계를 가꾸고 돌볼 능력이 없는 교인은 역시 하나님 앞에 떳떳한 모습으로 설 수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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