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가꾸기” (목사관 서신, 도시에 남은 사람들, 열다섯번째 이야기) 1994, 윤 완희

목사관 거실에는 올해 거의 15년 이상 된 한 그루의 난이 있습니다. 저희 시어머님이 갖고 계시던 난에서 새끼가 나온 것을 정성스럽게 떼어 선물로 주시면서 잘 키우라고 몇 번씩 당부하신 것입니다. 처음 몇 년간은 시어머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특별히 신경을 써서 키웠는데, 세월이 흐르니 거실 한쪽에 있는 둥 마는 둥, 전혀 신경을 쓰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난은 지금까지도 생명을 유지하고 있으며, 작년에는 처음으로 아름다운 흰꽃들을 탐스럽게 피워 저희 가족에게 큰 기쁨을 선사하였습니다.

시어머님은 저희 집에 전화를 하실 때면, 아이들과 가족들의 소식과 함께 난이 잘 자라고 있는지도 꼭 확인하셨기에, 난꽃의 소식도 전 하곤 하였습니다. 어머님은 당신이 귀히 여기시는 난 꽃을 며느리도 귀히 여기며 돌보고 있는 것이 확인되면, 언제나 만족한 듯이 화제를 다른 곳으로 옮기곤 하셨습니다. 시어머님은 얼마나 자상하신지, 아이들의 생일이 다가오면, 아버님과 함께 정성껏 카드를 보내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잘 받았는지 확인하시고, 생일이 지난 후에는 애가 얼마나 기뻐하였는지를 꼭 물으셨습니다. 아이들도 생일 때면 틀림없이 도착하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생일 카드에 무엇보다도 기뻐하며, 두 분의 사랑과 정성에 감사드리곤 하였습니다.

며칠 전에도 둘째아이의 생일을 앞두고 어머님이 전화를 주시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전화에 어머니는 둘째딸 아이의 생일을 말씀하시다 말고 갑자기 울먹이기 시작하셨습니다. “애야, 이젠 애들에게 이 할머 니, 할아버지 노릇도 못하게 되었구나 … …. 클린턴 대통령이 사인했단다. 나하고 할아버지는 일찍 죽었어야 하는데 너무 오래 사는 것 같구나!”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어머니! 무슨 말씀하세요? … … 아하! 그 웰페어 삭감안 때문이군요!”

저는 요근래 떠들썩하고 있는 웰페어 삭감 개정안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어머니의 말씀을 통해 금방 피부로 느끼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목회하고 있다는 이유로 미국에 오신 후 단 한 번도 생활에 대해 걱정하거나 신경쓰지 않도록 배려하시며, 노인 아파트에서 웰페어로 여생을 보내고 계시던 시부모님에 대한 송구스러움과 미안함, 미국 사회보장제도에 대한 고마움 등 만감이 교차되었습니다. 그동안 낯선 미국에서의 노후 생활에 보람과 자신을 갖게 하고, 나름대로 삶의 기쁨을 펼칠 수 있게 하였던 이 고마웠던 제도가, 미국 역사 속으로 묻혀간다는 일은 사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어머니에게 “자식들이 있는데 무슨 걱정을 하세요? 어머님, 아 버님도 시민권을 신청하시면 되잖아요? 어머니! 하나님은 하나의 문이 닫히면 또 하나의 문을 이미 준비하고 계시다는 것을 아시잖아요?” 라며 큰소리를 치며 위로를 드리면서도, 마음속에 답답함이 가득 차 올랐습니다. 시민권은 물론, 영주권도 없이 불법으로 거주하고 있는 그 수많은 사람들이 앞으로 감수해야 할 불이익과 어려움들을 어떻게 처리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안타까웠습니다. 또한, 가난한 이웃을 상대로 장사를 하고 있는 동포들의 생활 영역에 미칠 여파는 자못 클 것이라는 신문 보도가 메아리처럼 들려왔습니다.

저는 어머님과의 전화를 끊고 몹시 부끄럽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시부모님이 자식을 의지하고 믿고 사는 것이 우리의 미풍양속인데, 그 동안 웰페어에만 맡기고 무관심하게 수년을 살아온 덕에, 부모님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실망조차도 감지하지 못하고, 내 생활 하나 꾸려가기에만 급급했던 것입니다.

저는 노인 아파트에서 외롭게 살고 계시는 시부모님을 생각하며 오랜만에, 한동안 잊고 있었던 난을 들여다보았습니다. ‘… … 쯧쯧, 이렇게 무정할 수가 있었나? 생명은 같은 생명인데 … ….’

난은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채, 목이 말라 잎조차도 겨우 가누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오랜 세월을 말없이 거실의 한구석에 서서, 자애로운 어머니의 모습처럼 포근하고 변함없이 있었던 것입니다.

“얘야… … 나하고 할아버지가 너무 오래 사는 것 같구나 … …” 심렁의 강물 위에 후둑후둑 빗방울이 커다란 동그라미를 자꾸만 그리었습니다. 그리고, 난꽃을 바라보면서 그동안 귀히 여기며 가꾸지 못했 던 것을 깊이 후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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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TaeHun Yoon

Retired Pastor of the United Methodist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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