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님은 우리 가정에서 “보스”라는 별 명을 가지고계셨다. 물론 제일 어른이시니까 당연한 것이지만, 그 이면에는 아무도 말릴 수 없는 그 분 만의 고집과 까다로움, 예리하신 판단력과 기억력은 그 어느 자손들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나는 결혼 이후, 목회를 돕는다는 이유로 시어머니를 곁에서 모시거나 자주 찾아 뵐 수 없는 형편 속에 살아왔다. 시어머님은 칠순이 넘으신 의사이신 큰 아드님과, 육순이 넘은 목사인 둘째, 회갑이 되어가는 사업가인 세 아들들이 “호랑이”라 불렀던 분으로 자녀들을 엄하고 절도있게 키우셨다. 며느리들에게도 예외 일수가 없는 분이었다. 며느리들이 신앙생활과 살림을 잘하고 있는지 늘 살피는 것은 물론이요 종종 새 이불이나, 신발, 옷, 잡수실 것들을 사다드리면 그것을 그냥 그대로 받지 않으셨다. 과연 이것이 최상의 것인지 아닌지 두고두고 생각하시다가, 받으신 선물들을 거의 몇번 씩 다른 것으로 바꿔다 드려야 만 성이 풀리시는 분이었다.
또한 수년 전에 연로하신 시어머님이 양로원으로 거처를 옮기신 후, 자손들이 어머님을 방문할 때는 어머님 만을 위한 선물을 가져 갖다가는 늘 불호령이 떨어지곤 하였다. 수고하는 병원의 직원들과, 같은 병동에 계신 모든 분들을 위한 배려가 없는 자식들의 방문은 결국 즐거워하질 않으셨다.
지난 8월말, 시어머님이 95세의 연세로 그분의 생을 마치셨다. 한양 조씨로 황해도 평산군에서 태어나시어 이곳 미국의 뉴져지 양로원에서 생을 마치시던 날, 나는 비로소 시어 머님이 어떤 분이었는가를 더욱 깊이 알 수가 있었다. 시어머님은 16세의 어린 나이에 결혼하시어 14세의 남편 유학을 위해 서울로 시부모를 따라 이사를 하시게 되었다.
유난히도 총명하시었으나 여아는 언문을 배울 수 없던 시절이어서 훗날 교회를 다니면서 독학으로 한글을 깨우치시 고 성경을 읽으셨다. 서울에서의 생활은 미신을 지성으로 섬기셨었다. 그러나 어느날, 앞집의 예수쟁이의 남편이 사망 했을 때, 그들은 통곡 대신 찬송과 기도로 장례식을 하는 것 에 감동이 되어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셨다.
시어머님은 자신의 성품처럼 철저하고 예리하게, 신앙생활을 하셨다. 가난 속에서 큰 아들을 의대를 보내신 후, 학자금 마련에 늘 눈물이 마르실 날이 없으셨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일 전에는 구겨진 지폐는 다리미질을 하거나, 은행에 가셔서 새돈으로 바꿔 십일조와 감사헌금을 평생을 하셨다.
그리고, 육이오 사변후, 일사후퇴의 엄동설한의 피난길에 는 등에 업힌 둘째 아들을 살리기 위해 당신의 금지환을 한조각의 개피 떡과 선뜻 바꾸셔, 동상으로 빨갛게 부어오른 어린 아기의 손에 쥐어주셨다. 시어머님은 그 아들이 이국의 땅에서 허기진 영혼들을 먹이고 돌볼 것을 어찌 아셨는지!
시어머님은 한국의 척박한 역사 속에 가난과 무지, 차별과 소외 속에서도, 신앙으로 꿋꿋이 살아 남은 한국의 딸이었다. 험란했던 시대의 풍랑 속에도 굴하지 않으시고 자녀들을 신앙으로 키우셨고, 그렇게 손주 손녀들에게도 가르치셨다. 무엇을 하든 최상의 것으로 주님께 하듯 하라고 몸소 실천 하셨다.
나는 어머니의 찬 손을 잡고 소리없는 오열로 하직인사를 드렸다. “어머님! 감사합니다! 당신은 저의 영원한 보스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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