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 완희, (신앙칼럼, #23, LA 크리스찬 투데이, 2009년 4월 1일)
이웃에 살고 있는 리타가 홈리스 고양이 한 마리를 멀리 양자 보내려다가 실패한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몇 년 전부터 헛간에서 흰색 고양이 한 마리가 살아가고 있는 것을 발견하여 먹을 것을 주기도 하고, 가끔 말동무가 되는 가운데 함께 지내오고 있었다. 그런데 이 고양이가 커가면서 주변에 모여드는 새들을 잡아채 가는 것이 여간 눈에 거슬리는 것이 아니었다. 요리 저리 궁리하던 리타는 신문에 광고를 냈다. “사랑스런 고양이 양자 할 분을 찾습니다.”
며칠 후에 낯선 음성의 남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나는 혼자 사는 중년의 남성인데 당신의 고양이를 자식처럼 키우겠습니다.”라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돌봐주는 가족이나 집 없이 밖에서 산다는 것은 얼마나 열악한 환경인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리타는 그동안 날씨가 춥거나, 눈이 오는 날에는 헛간의 고양이 생각에 종종 맘이 편치 않았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비참한 삶을 뒤로하고 “자식처럼 키우겠다”라는 믿음직스러운 보호자가 생겼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며칠 후 그 중년의 남자로부터 공포에 질린 음성이 전화기를 통해 들려왔다. 홈레스로 거친 삶을 살아왔던 고양이는 새 환경과 새 보호자의 사랑과 관심에도 불구하고 집안의 컴퓨터, TV에 연결된 전기줄로부터 시작하여 줄이란 줄은 다 이빨로 끊어놓고 가죽소파와 가구들을 그 거친 발톱으로 여기저기 찢어놓기 시작했다. 그리곤 집안의 화분을 변기로 사용할 뿐만이 아니라, 친근하게 다가가는 주인에게 야성의 근성을 마음껏 발휘했다. 시간이 갈수록 집안은 겉잡을 수 없이 수라장이 되어버렸고, 그 친절하던 남자는 삼일 만에 ‘양자 포기 선언’을 하게 되었다.
우리 가정에도 두 마리의 고양이가 실내에서 정을 나누며 함께 살아가고 있다. 두 마리 모두 생후 삼사 주만에 동물 보호소로부터 데려온 것이었다. 그런데 실내에서 함께 사는 고양이들은 발톱을 빼내야 한다는 조언에 한동안 망설일 수 밖에 없었다. 어떻게 살아있는 고양이의 발톱을 생으로 뽑아 내지? 그러나 며칠 후 우리는 이 어린 고양이들과 함께 살기 위해서는 동물병원에 고양이의 앞 발톱을 의뢰할 수밖에 없었다.
인간과 동물의 조화처럼 인간과 인간사이에 공동체를 이루며 함께 살아가는 일은 서로에게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특히 우리가 속해있는 교회는 내가 자원해서 들어 온 곳 같지만 그곳은 각자 예수님의 특별한 구원의 초청이 있었음이다. 우리는 교회를 통해 내 생각과 판단이 아닌 예수님의 방식으로 서로의 갈증된 사랑을 채워주고 힘을 복돋아 주는 훈련을 끊임없이 해야만 한다.
그런데 이런 신성한 곳에서 우리는 종종 혼란과 고통 속에 빠져있게 되기도 한다. 그것은 변화되지 못한 내 판단의 앞 발톱들이 교회를 상처내고 허물어버리기 때문이다. 교회를 고통 속에 몰아넣는 일은 결국 내 자신의 삶을 해하는 일이 아닐 수 없으며, 나의 인품이 그리스도로 변화받지 않고는 영혼의 홈레스로 남을 수밖에 없다.
리타의 고양이가 헛간으로 되돌아왔다는 소식은 왠지 내 마음 속에 두고두고 깊은 파문을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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