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신부” © 윤 완희, (신앙칼럼, #35, 1999년 11월)

얼마전, 금박의 화려한 글씨로 아름답게 장식한 한 장의 청첩장이 가을 바람 속에 날아왔습니다. 겉봉투엔 Mrs. Doris Matinez라고 선명하게 찍혀진 이름이, 전에 목회하던 미국인 교회의 교인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두 생명과 두 마음이 영원한 사랑 속에 하나가 되기 위하여, 신부 도리스 마티네스와 신랑 도널드 핼스테드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가장 행복한 날에 당신들을 초대합니다.”

온 가족이 믿을 수 없는 사실에 놀라움의 탄성을 지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랑 신부가 팔순을 내다보는 과년한(?) 나이에,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가장 행복한 날’ 이라는 표현이 마음 깊이 와닿았습니다. 대부분 그 나이에 인생을 정리하는 것이 상정인데, 새로운 인생의 시작을 향하여 가슴 부푼 소망을 지닐 수 있음에, 마음껏 축복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사실, 지난 봄에 음악회에서 만났던 도리스는 너무나 흥분되어 있었습니다. 그녀의 노안으로 떨리는 눈꺼풀 속에 충혈된 눈동자는, 기쁨을 못이기는 듯한 아련한 빛을 머금은 채, 저에게 살짝 속삭였습니다.

“이건 절대 비밀인데, 난 지금 사랑에 빠졌어요! 우린 어쩌면 곧 결흔하게 될 거예요.”

곧 결혼하게 될 것이라는 할머니 도리스의 표정은 저의 놀라움을 무색하게 했습니다.

“…… 상대가 누구냐고요? 도 … 도널드예요!”

“네? 정말이세요?”

저는 믿을 수 없어, 몇 번이고 도리스에게 다짐하여 물었으나, 그녀는 자랑스러운 표정을 연방지으며 소녀처럼 수줍은 홍조를 띠었습니다. 그녀의 너무나 큰 기쁨을 포옹으로 함께 나누며, 곱사등처럼 튕겨져 나온 등뼈가 그날따라 사랑스러워 자꾸만 쓰다듬어 주었습니다.

수년 전, 도리스는 암과 투병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금혼식을 10년 앞당기어서 거창하게 금혼예식을 치른 적이 있습니다. 그 때도 온 가족과 교인들이 교회에 초대된 채, 목사님의 주례로 이른 40주년 혼인식을 치렀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 손에 달려 있음이 확실한 사실입니다. 암으로 곧 죽을 것이라는 도리스는 지금도 건강하고, 멀쩡하던 남편 매니는 어느 날 갑자기 심장마비로 먼저 하늘나라로 가게 된 것이었습니다.

남달리 의지가 강하고 고집불통이며, 크라이슬러 자동차 딜러의 매니저로 평생을 보냈던 도리스는 남편과 부모가 물려준 유산으로 유복하게 살고 있었으나, 그녀에겐 누군가가 필요했습니다. 그녀의 신랑 되는 도널드는 수려한 외모와 매너가 뛰어난 노신사로서, 세 번 결혼한 경력이 있는데 불행하게도 그의 부인들은 모두 암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게 되어, 외로운 여생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저는 한 번도 그의 생전의 부인들을 만나보진 못했어도, 그가 여생을 얼마나 외롭게 살아가며 누군가를 무던히도 찾던 모습을 잊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고픈 상대를 찾으려는 사람의 욕망, 그것은 생기입니다. 그 생기는 또한 자기를 잊게 합니다. 영원한 젊음이 삶의 터전을 가꾸어 줍니다. 세월의 연륜이 결코 사람을 추하게 하지 않습니다. 사랑하고 있는 그 자체가 기쁨이 되어 변두리의 삶이 아닌, 생의 중심으로 서게 합니다. 사랑하기에 고통과 아픔도 동반하지만, 참고 견딜 만한 가치를 부여합니다.

머잖아 눈부신 하얀 드레스 속에 교회 중앙을 걸어 들어갈 그녀를 상상하며 창 밖을 물끄러미 내다봅니다.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를 누비고 달려오는 찬바람 속에, 그녀가 걸어온 80평생의 시간과 공간이 찰나였음을 알게 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생의 순간까지도 또 다른 인격을 찾아, 하나가 되려는 의지와 정열 앞에, 거룩한 사랑의 신비를 어루만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신랑이요, 교회는 그의 신부라 칭한 말씀이 조금은 이해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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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TaeHun Yoon

Retired Pastor of the United Methodist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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