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 완희, 1995
며칠 전 아침 식사를 하면서 창 밖의 우거진 녹음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밖에서 매미의 합창이 일제히 요란하게 들려 왔습니다.
“아니, 왜 이렇게 시끄럽지? 한 마리도 아니고 수백 마리가 한꺼번에 울고 있잖아?”
나도 모르게 놀란 듯이 불평(?)섞인 소리로 중얼거렸습니다. 옆에서 신문을 읽으며 식사를 하고 계시던 목사님께서 의아해하셨습니다.
“아니, 저 소리가 이제 들려요? 난 벌써 며칠 전부터 듣고 있었는데?”
“그래요? 난 왜 지금 갑자기 들리죠? 조금 전까지만 하여도 전혀 들리지 않았는데… ….”
요술에라도 걸린 듯이, 귀청이 열려지며 매미 소리가 확 쏟아져 들어음이 신기할 뿐이었습니다.
목사님은 읽던 신문을 접으면서 “저 소리는 세월의 파도 소리요. 물론 암컷을 찾는 애절한 소리지만, 다음 해를 준비하는 소리라오. 일 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면서 우리에게 들려오는 자연의 소리들은 참으로 다양하거든. 겨울엔 바람소리와 함께 눈이 수북하게 쌓이는 소리, 봄이면 새싹들이 터져 올라오며 언 땅이 녹아나는 소리, 여름이면 천둥 번개를 동반한 폭풍우의 격정적인 소리 … …. 저 매미 소리는 가을이 다가오고 있다고 사람들에게 시간을 알리는 소리겠지요.”라고 했습니다.
세월의 파도 소리, “아!정말 그렇군요! 벌써 매미가 이렇게 많이 울고 있는 것을 보면, 가을이 오겠지요?”
목사님은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저 소리는 일 년 내내 들리는 소리가 아닌, 바로 요즈음에야 들을 수 있는 소리인데, 하루 살기 급급한 우리에게 하늘을 보며 내면을 들여다 볼 줄도 알고, 하나님의 숨결에 귀기울이는 훈련을 하라는 것이 지요.”
목사님의 말씀에 동의하면서 자연의 소리에 소홀했던 점을 잠시 부끄럽게 생각하였습니다. 매미의 한평생 삶은, 한 계절 목숨을 다하여 “맴-맴 외치다 가건만, 마음의 창 한켠을 열어 들려주는 데도 얼마 나 인색했던지요.
그러고 보니 세상에는 많은 소리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듣 는 것보다, 못 듣는 것이 너무나 많은 것 같습니다. 사계절을 통해 들려오는 자연의 소리는 때가 되면 어김없이 들려오건만, 우리는 오늘 하루 땅만 내려다보고 사느라 무감각하기가 일쑤였음을 깨닫게 됩니 다.
소리에는 자연의 순리 속에 들려오는 소리가 있듯이, 인간의 역사와 시대를 통해 들려오는 소리도 있습니다. 소리 속에는 즐거운 소리가 있는가 하면, 가슴을 답답하게 하고 울분케 하는 소리도 있습니다. 또한 소리는 소리인데 침묵의 소리도 있습니다. 차라리 말을 하지 말고 소리를 내지 않는 것이 영원한 소리가 되어 심령을 쩌렁쩌렁 울릴 때도 있습니다.
조국 광복 50주년 기념일을 맞이하면서 많은 소리들이 역사의 길목에서 웅웅거렸습니다. 그 소리들은 우리의 가슴을 미어지게 하기도 하고, 놀라게도 하고, 슬프게도 하며, 혼동케 하는 소음 속에서 시련과 고통을 얼마나 처절하게 당해야만 했는지, 우리 모두는 압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복잡한 의식 세계 속에 거하게 되었고, 외국 식자들은 우리 민족의 난해한 의식 세계를 알기가 거의 불가능하다고도 고백할 정도로, 기뻐도 마음놓고 웃지 못하고, 슬플 때 아픔을 내어 놓고 울지도 못하는 등 자신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기를 주저합니다.
그리운 조국! 바다 건너 이 땅에까지 들려오는 소리가 있습니다. 신 도시 아파트 주민들의 한숨소리, 벽이 갈라지는 소리, 부정과 부패가 부둥켜안는 소리, 권력과 부가 결탁하는 소리, 삼풍이 무너지는 소리, 기독교인들이 무너지는 소리, 광주의 소리, 반복되는 신당 창당 선언 소리 … ….. 그런데도 어디선가 자꾸만 통일에의 노랫소리가 금방이라 도터질 듯이, 터질 듯이 들려오는 계절 속에 우리의 가슴은 설레며 자꾸만 휘청거립니다.
광복 50년이 되는 올해도 우리의 허리는 분단과 한, 지역 감정과 편협된 인간 관계의 철조망에 휘감긴 채, 통일이라는 엄청난 숙제를 받아쥐고 있습니다. 금방이라도 “아버지! 어머니!” 하고 이름을 불 러보면 웃음지으며 달려올 것 같은, 피맺힌 얼굴들은 아직도 희미한 모습으로 멀찌감치 서서 몸부림칠 뿐입니다. 어느새 축복 속에 태어난 해방둥이들은 한평생 아픔을 등에 업은 채, 석양 속으로 걸어가고 있습니다.
광복의 기쁨을 차마 만끽하지도 못하고 분단 병을 앓고 있는 오늘, 내가 먼저 분단되어 있음을 하나님께 회개합니다. 내 속 깊은 곳엔 남을 향한 불신과 적대감으로 가득 차 있음을 하나님께 회개합니다. 이웃을 먼저 생각지 않고 내것을 먼저 생각했던 것을 하나님 앞에 회개 합니다. 거저 받은 은혜, 값을 받으려 했던 것 하나님께 회개합니다. 민족 해방 50년의 길목에 서서 화해의 물결이 남으로부터가 아닌, 나로부터 시작되기를 진정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올 여름의 뉴욕은 참으로 더웠습니다. 그러나 그 여름의 더위가 고비를 넘긴 요즈음, 목사관 뜰안의 여기저기에 떨어진 매미의 허물 딱지들을 바라보면서, 죽은 시간의 한맺힌 껍질들을 새삼스레 다듬어 봅니다. 그리고 매미가 되어 온 종일 소리내어, 누군가의 창가에서 목이 쉬도록 울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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