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이 70대의 노인으로 이루어진 교회 성가대에 테너 독창자, 웬델 홀(Wendel Wohl) 씨가 새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는 70대보다는 약간(2) 젊은 68세의 멋쟁이 신사였습니다. 오랫동안 테너로 수고하고 있는 델러(Dehler)의 박자와 쉼표를 상관치 않는 개성적 음색으로, 성가대 지휘자의 이맛살이 펴지지 않던 중, 웬델의 출현은 성가대의 음질을 평균 수준으로 올려놓는 대단한 변혁의 계기가 된 것입니다. 그의 테너 솔로 또한 일품으로서, 예배시간에 불려지는 그의 성가곡은 듣는 이로 하여금 감동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의 무르익은 목소리를 타고 흐르는 성가는 차라리 애가라고 부르고 싶었습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는 인간의 회개와 신을 향한 절규가 온 성전을 메운 성도들의 영혼을 언제나 무서운 노도로 흔들곤 했습니다.
그는 매주 목요일 저녁에 있는 성가 연습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하였으며, 소프라노 대원들의 뒷좌석에 앉아 가끔씩 던지는 농담은 지루한 연습 시간을 곧잘 웃음바다로 만들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진정 누구였는지 나는 알 수 없었습니다. 짧은 사귐을 통하여 자신이 누구인가를 곧 밝히는 우리의 습성과는 달리, 개인적인 삶에 대해서는 좀체 드러내지 않는 미국인들의 습성대로 근 1년이 넘도록 나는 그
를 충실한 성가대원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여름이면 많은 교우들이 여행을 즐기므로 성가대도 두 달간 여름방학을 하게 됩니다. 목요일마다 있는 성가대 연습 시간의 그와의 짧은 대화도 막힌 지가 몇 주째 되던 어느 주일 아침, 그가 중풍으로 쓰러졌 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노인들이 대부분인 교회로서 한 사람이 병 중에 있거나, 쓰러지는 일은 온 교회에 심리적으로 큰 영향을 끼칩니다. 교우들은 모두가 근심하며 염려하는 가운데 그의 회복을 위하여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병실을 방문하려고 기도문을 준비하고, 한창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고 있는 살구빛 장미 세송이를 정원에서 잘라 내어, 목이 가는 꽃병에 담았습니다. 이 세상에 꽃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 인간의 한계를 아시는 신은 언제나 우리가 찾는 것 이상의 것들을 마련하시는 것 같습니다.
웬델과는 오랜 친구로 알려진, 성가대 지휘자 밥(Bob Dehler) 씨와 함께 그가 누워 있는 롱아일랜드의 North Shore 대학병원을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밥을 통하여 그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하여 밥과 그의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밥이 들려준 웬 델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단원으로서 웬델은 젊은 시절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만난 아름다운 소프라노 가수와의 결혼 생활에 세 자녀를 얻게 되었습니다. 성품이 호탕하고 자유분방한 그들의 삶은, 현실의 삶을 동행하는데 많은 오류를 갖게 되었습니다. 특히 자녀문제에 있어서 그들 부부로서는 어찌 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들에게는 현실의 화려함, 인간이 추구하는 명성을 얻기 위하여, 영적인 미래를 생각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습니다.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부모들의 방종함을 보고 자라나기 시작하였으며, 사치와 마약, 음주로 인한 사고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들 부부는 뒤늦게 그들의 삶이 무엇이 잘못되어 있었는지 발견하고 종교를 찾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마음을 바로잡고 가정을 구하기 위하여 믿었던 종교는 사이비 종교로서 그들의 영혼을 편케 하거나 능력있는 삶의 변화를 가져다 주지 못했습니다. 사이비 종교의 평신도 회장까지도 역임한 바 있었던 웬델은 다시 사이비 종교를 탈퇴한 채, 자녀들의 문제로 힘겨운 세월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한때 그는 고등학교의 음악교사로 봉직하면서, 비행 청소년들을 위하여 선도에 심혈을 기울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을 마약과 술로 젊음을 방탕하게 보내던 32세의 장성한 그의 큰아들이 어느 날, 집안에서 목매달아 자살하고 말았습 니다. 아들의 사체 곁에서『어떻게 성공적인 자살을 할 것인가?」라는 책이 발견되었습니다. 어떻게 성공적인 부와 명성을 얻을 것인가를 추구하며 살아온 이들 부부는 아들의 자살 앞에 망연자실하였습니다. 지금까지 목적을 향하여 질주해온 일들이 한낱 물거품에 불과했다는 충격 속에, 부인은 스트레스로 인한 갖가지의 병에 시달리며, 죄의식에 사로잡혀 가던 중 별거를 선언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와중에 결혼한 둘째 딸이 바람둥이인 남편의 편벽에 견디지 못하고 결혼생활 4년 만에 이혼을 하였습니다. 남편에게 두 아이를 말기고 친정으로 돌아와서 새로운 인생의 출발을 계획하고자 했으나 어 린 자녀들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을 주체할 수 없게 되어 괴로운 나날 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들을 찾아가 해후의 기쁨 을 잠시 누린 후, 집으로 돌아오던 날 낯선 호텔 방에서 약물 자살을
하고 말았습니다. 29세의 젊은 나이로 … …..
그의 젊음이 다하여 기력은 쇠약해지고 인생의 해는 기울어져 가는 길목에서 맞이한 바람은 흑독하였습니다. 자신을 돌아보며, 자학의 비웃음 뿐이었습니다. 그의 영혼은 광야를 향하여 소리치는 아이처럼 쓸쓸하였고 고독했습니다. 그의 젊음을 돌이켜 무대가 아닌, 피나는 영혼과 영혼의 부딪침이 있는 삶의 현장에서 일찍이 그 가치를 알았더라면 하는 속죄와 뉘우침의 눈물은 파도처럼 언제나 그를 휘몰아쳤었습니다. 자식을 예상치 않은 사고로 잃은 부모들의 눈물은 살아 생전 결코 마르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아픔 또한 처절해서 뼈를 마르게 하고, 피를 마르게 한다고 하는데 … …. 하물며 제 스스로가 목숨을 끊었으니 … ….. 그것도 3년이라는 세월 안에 젊은 두 목숨이 … ….
나는 그의 상처에 눈먼 자가 되어 그의 속에 빙산처럼 잠겨져 있는 슬픔을 방관한 이 시대의 또 하나의 방관자였음에 소스라치게 놀랐습 니다. 나의 기도는 어디에 가 있었던가. 종교의 형태와 형식은 즐기기를 원하지만, 내가 어디 성실한 자인가? 다시는 누구에게도 “How are you? Fine, Thank You!” 라는 인사를 못 나눌 것만 같습니다. 그는 언제나 내게 “Fine, Thank You” 로 응답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사람이 사람을 안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나아가 그의 심령에 흐르고 있는 피멍 어린 언어들을 발견했을 때, 인간에 대한 격렬한 사랑의 뜨거움을 비로소 체험하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 내가 하늘의 태양을 보고 그 찬란함이 아름답다고 호들갑을 떠는 순간에, 어떤 이들은 태양의 빛이 암벽처럼 무거워 견딜 수 없다고 소리지를지도 모릅니다. 서로를 진정으로 알기까지는, 태양은 오직 찬란하다고만 주장합니다. 그러나 태양 빛이 암벽처럼 무겁다고 몸부림치는 사람의 심령을 안 후, 우리는 태양의 양면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에어컨디셔너의 바람이 땀으로 젖은 등줄기에 확 들이치고, 주홍빛 사각형 타일이 병원 내부를 환하게 밝혀 주고 있었습니다. 다른 병원의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깔끔한 현대식 건물 안의 주홍 빛 장식이 웬 지 좋았습니다. 중환자실(Intensive Care Unit)을 찾아 다가설 때, 왠델이 누워있는 병실 앞에 두 여인들이 벽을 기대고 서서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밥의 걸음이 빨라지면서 두 여인들을 향하여 반잡게 달려가 포옹을 하였습니다.
“미세스 윤, 이분이 웬델의 부인이고 이분은 따님이지요!”
밥의 표정은 몹시도 홍분되고 기쁜 모습이었습니다. 처음 만난 두 여인은 내게 있어서 오랜 교분을 나눴던 사람들처럼 친근감을 갖게 하였습니다.
“이 환자는 가족이 없습니까?” 하며 엊저녁까지도 의아해하던 간호사들 앞에서 할 말을 잃었었다는 밥의 고백을 상기하며, 진실의 부름이란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웬델의 얼굴은 몰라보게 부어있었습니다. 가끔 눈을 뜨고 사람들의 얼굴을 돌아보곤 하였으나, 곧 다시 눈을 감았습니다.
“여보 제가 누군지 알고 계셔요? 저의 말이 들리면, 제 손을 꼭 눌러 주셔요?” 그의 부인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를 들여다보았습니다.
그의 손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그가 누워 있는 병실 쪽을 향하여 자꾸만 고개가 향하여졌습니다. 육중한 병동의 창문에 파란 하늘이 물결치듯 흐르고 있었습니다. 불현듯 그의 테너 솔로가 닫혀진 창들을 타고 들려 오는 듯했습니다. 그의 노래는 마치도 절벽과 절벽을 사이에 두고 외치는 사람의 마지막 메아리처럼 내 영혼 안에 큰 목소리로 끊임없이 들려졌습니다. 부끄러워 가슴을 움츠립니다. 사람과 사람끼리의 무관심, 만남의 불성실, 무력한 나, 아득한 이웃 … ….
교회의 편안한 앞자리에 앉아 그의 애가를 즐기던 나는, 애처러운 주님의 눈길 앞에 나는 무었이라고 변명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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