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을 지키던 여인” (목사관 서신, 사슴처럼 뛰는 영혼들이여, 첫번째 이야기) 1994, 윤 완희

한 밤중, 막 꿈길에 들어서려는 찰나 누군가가 어깨를 흔들어 깨웠습니다. 그리고 비몽사몽간에 말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제 짐을 당신 이불 밑에 두어도 좋습니까?”

겨우 눈을 비비며 바라보니, 금발의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얼굴이 백짓장처럼 파리한 여인이, 시커먼 비닐 자루를 힘겹게 들어, 내 발 밑 이부자리를 들추고 집어넣으려 하고 있었습니다.”

“……노! 노오!”

잠결이었지만, 질겁하며 나는 몸을 겨우 반쯤 일으킨 채 여인에게 외쳤습니다.

“… … 저기 부엌 한쪽 구석에다 갖다 놓으세요!”

나는 단호하게 말하며, 손가락으로 불이 꺼져 있는 부엌을 가리켰 습니다. 여인은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아무 소리없이 짐을 끌고 돌아셨습니다. ‘아니, 그 시꺼먼 보따리에 무슨 보물이 들어 있다고, 남의 이부자리 속에다 맡기려 한단 말이야?’ 간이용 침대 위에서 곤한 잠을 침해당한 나는 발 밑에 더러운 것이 묻기라도 한 듯 부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여인들의 기침소리와 앓는 소리, 화장실 들락거리는 발소리, 코고는 소리로 인해 잠을 쉽게 들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나는 다시 피곤한 육신을 추스리며 곧 단잠으로 빠져들었습니다.

10여 명의 무숙자 여인들이 매주 금요일, 저녁 7시경이면 맨해튼 본부(Partnership of Homeless Shelter)에서 출발하여, 저녁 9시경이면 교회에(Embury U. M. C, Queens Village) 도착하게 됩니다. 그들이 도착하는 즉시 간단한 차와 스낵을 든 후, 교회에 산더미같이 마련 된 헌옷들을 고르며, 잠시 패션 모델의 기쁨을 누립니다. 여인들은 색깔이 화려하고 앞가슴이 훤히 드러난 드레스들을 한 번씩 입어보기도 하고, 몸에 휘휘 감겨오는 잠자리 날개같은 이브닝 드레스와 잠옷들을 걸쳐보며, 거울 앞에서 여성인 자신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확인해 보기도 합니다. 여인들은 흑인이든 백인이든 동양인이든 모두 아름답습니다. 어디서 세레나데의 음률이 들려오기만 하면, 감미로운 춤이 그녀들을 밤새도록 즐겁게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곧 여인들은 내일 아침이면 매서운 겨울바람이 종일 몰아쳐, 빌딩 숲에서 견디어 낼 만한 따뜻한 코트와 양말, 스커트 등을 고른 후에 모두 잠자리에 들곤 합니다.

그러나 잠자리마저 편할리 없습니다. 자신들의 전재산을 끌어안고 잠들었어도 번번이 잃어버리는 소유품들로, 그녀들은 늘 불안해합니 다. 밤새 화장실에라도 가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무거운 짐보따리들을 죄다 끌고 가야 마음이 편한 모양이었습니다. 무숙자들이 시에서 마련한 쉼터에 가기를 꺼려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자신들의 소유물이 알게 모르게 늘 침해를 당하고 있다는 것 때문입니다. 믿을 수 없고, 사랑할 수 없고, 남들로부터 늘 무언의 거절만을 당해 온 그들의 영혼은 항상 피곤해 보였습니다.

어느새 여기저기서 새벽잠을 깨기 시작한 여인들의 짐을 챙기는 부산함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저는 새벽녘 커피를 준비하려고 일어 서는데, 한밤중에 짐을 맡아달라고 하며 이부자리를 들추던 여인이 장승처럼 서서 그 시커먼 보따리를 안고 있는 모습이 멀찌감치 보였습니다. 여인은 밤새 뜬눈으로 서서 밤을 지킨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여인의 흰 얼굴은 파리하다 못해 석고상이 된 채, 그녀의 파란 눈망울은 피로와 슬픔이 가득 덮여 깊은 어둠 아래 자리잡고 있는 듯했습니다.

‘아! 이 여인은 하룻저녁이라도 쉬기를 원했음이 분명하였구나! 교회의 넓은 지하실 공간에서 신뢰할 수 있는 곳은 내 이불 밑이라고 생각했을 터인데. 그녀의 짐을 하룻 저녁만이라도 편안히 누군가에게 맡기려 했었을 텐데 … …. 그녀의 추운 영혼을 누군가의 뜨거운 가슴 안에서 불 붙이기를 원했을 텐데 … …. 나는 부끄러움으로 그녀의 얼굴을 마주 바라볼 수 없었습니다. 평소 내 영혼 안에 따뜻한 빈자리가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 착각하던 교만함은 여인 앞에서 무참히 무너져 내려앉고 말았습니다. 여인은 삶의 늪 속에 사랑의 밧줄을 누군가가 던져 주기만을, 밤새 기다리다가 지쳐 영혼의 상흔을 더 깊게 남겼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녕 자원봉사자임을 자청하고 나선 내 자신이 진정 누구를 위한 자원봉사자였던가! 가끔씩 무숙자들 틈에 끼어 그럴 듯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흉내내었음이 결국 백일하에 드러나지 않았는가! 번쩍이는 포장지로 꾸며놓은 알맹이 없는 선물이여!’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
움이라.” (마 11 : 28~30).

‘내 죄짐의 더러운 봇짐들을 하루에도 수 없이 신고도 없이 주님 앞에 내팽개치듯 맡기었어도, 그분은 단 한 번도 거절치 않으셨건만 … …. 아니, 오히려 불신과 고독과 절망을 끌어안고 불면의 밤을 새우는 나를 찾아, 당신의 뜨거운 가슴 안에 품어주시며 쉼을 주지 않으셨던가!’

어둠을 뚫고 새벽녘에 스쿨버스가 도착했습니다. 이미 어디서부터 인지 스쿨버스에 탑승하고 따라온, 20여 명의 남자 무숙자들이 여인들을 보고 무표정한 얼굴로 “굿 모닝!” 하며 아침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여인들은 뒤뚱거리며, 저마다 힘겹게 짐을 들기도 하고 짊어지기도 하며 버스에 올라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밤을 지키던 여인도 무표정한 모습으로 시커먼 비닐 자루를 힘겹게 안고, 버스의 뒷좌석으로 쓰러지듯 비집고 들어섰습니다. 노란 스쿨버스는 어둠이 꼬리를 감추고 있는 새벽을 향해 방향을 틀고, 무숙자들은 오늘도 그들이 채워야만 될 도시의 길목으로 숙명처럼 가고 있었습니다.

나는 사라져 가는 스쿨버스에 손을 흔들며, 황급히 뒤돌아 여인들이 떠나간 빈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여인들이 비워 놓고 간 흐트러진 침대에는, 그녀들의 체온이 아직도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중의 침대 하나만은 흐트러지지 않은 싸늘한 담요가 반듯이 접혀 있어, 또 다시 나의 영혼을 흔들어 깨우고 있었습니다.

“제 짐을 당신 이불 밑에 두어도 좋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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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TaeHun Yoon

Retired Pastor of the United Methodist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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