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근래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상대방에게 갖는 기대감이란 것이 얼마나 무익한 것이며 불필요한 에너지를 쏟게 하는지를 생각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사실 기대감이란 것은 일방적인 상상력에 의한 나의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그 기대감이 채워지지 않았을 때의 불편한 심사는 전적으로 상대방에게 떠맡기는 일이 우리에게 너무나 비일 비재하게 일어납니다.
몸이 둔하여 전혀 무용에는 소질이 없는 아이에게 무용수가 되기를 기대한다거나, 음악적인 감각이 없는 아이에게 세계적인 음악가를 기대한다거나, 선천적으로 몸이 기형아로 태어난 아이를 정상적인 신체 를 지닌 아이와 비교하여서 가족들이 창피하게 생각하거나 절망과 고통 속에 살아가는 일은 서로의 불행을 초래하는 일이 됩니다. 그러나 그 모습 그대로 서로 인정해 주고 받아들일 때, 불필요한 스트레스를 받지 않음은 물론이요 행복의 조건이 따로 필요치 않음을 깨닫게 됩니다.
몇 년 전에 교회를 돌봐주던 사찰 할아버지의 손주 중에 선천성 신체 기형아로 많은 병을 앓고 있는 다니엘이라는 열두 살짜리 손주가 있었는데, 온 가족이 그를 얼마나 열심히 진심으로 사랑하는지 놀랄 정도였습니다. 사찰의 며느리 되는 부인도 가벼운 선천성 신체 기형 증세가 있는데, 손주까지 그런 증세로 태어났으니 얼마나 안타까웠겠습니까? 그러나 그 가족은 오히려 신체가 정상적이고 부자인 사람들 보다도 더욱 자주 모여 사랑을 나누고, 그 가정에 웃음꽃이 밤이 맞도 꼭 떠나지를 않았습니다. 그 가정엔 전혀 그늘이 없었습니다. 행여나 목사님이나 저희 가족 누구를 만나게 되면, 손주 자랑을 하느라 붙잡고 놓아주질 않을 정도였습니다. 다니엘은 늘 휠체어에 앉아 고개도 못 가는 채 입을 헤벌리고 침을 흘리고 있음에도, 다정하게 가서 소개를 시키고 손을 붙들어 주게 하고 포옹과 키스를 꼭 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미국인들의 입양아 자식 사랑은 참으로 눈물겨울 정도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분 중 두 딸아이를 입양해서 살고 있는 미국인들이 있는데, 한 명은 한국에서, 한 명은 중국에서 입양을 하였습니다. 이분들 은 딸들의 뿌리를 찾아주기 위해, 한국에서 온 딸은 한국말을 가르치고, 중국에서 온 딸은 중국말을 가르치며 그 나라의 예절과 풍습을 연구하느라 부부가 무진 애를 쓰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머잖아 신체 부자유아를 더 입양할 예정이라는 말에 고개가 절로 숙여졌습니다. 사랑할 수 있을 때, 후회함 없이, 아무런 기대감 없이, 최선을 다하여 그저 사랑할 줄 아는 저들의 자연스러운 생활이 참으로 부러웠습니 다.
사랑하는 데는 조건이 없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저 자신도 무언가 ‘기대 라는 조건을 은근히 붙일 때가 많았던 것을 솔직히 인정케 됩 니다. 아이들이 공부를 잘해 주기를 기대하고, 어디 가서든지 남보다 인정받기를 기대하고, 모든 일에 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아 주기를 기대하는 일들은 곧잘 나 자신을 피곤케 하고 절망케 하고 화나게 하
는 어리석은 경험을 남깁니다.
예수님은 이 추하고 약한 자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으시고 무조 건적인 사랑으로, 이 모습 이대로 받아주셨는데, 가족이나 성도를 사 랑하는 것조차 조건을 달고 무엇인가를 ‘기대’ 한다는 일이 얼마나 큰 죄악인가를 회개하게 됩니다. ‘그 모습 그대로’ 사랑할 줄 알고 받아 들일 수 있는 심령은 분명 하늘의 선물입니다. 그것은 결국 남을 위한 것이 아닌, 내 자신의 영혼의 평안을 위해서, 더 높은 삶의 질과 행복을 위한 자세인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