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

물방울처럼 시간이 머리끝에서 떨어져
목을 타고, 가슴을 지나, 배와 넓적다리를 흘러
마침내 발바닥으로 스며들었다.

[이제 끝났어. 네 여정을 즐겨라.]

거리마다 찢어진 울음이 흩어지고,
통곡과 절망의 외침이 바람을 찢었다.
말과 눈물, 군중이 사방으로 밀려나며—
하나의 나라가 닻을 잃었다.

시간은 불이었고,
진짜 빛은 타오르고 있었다.

우리는 밭을 갈고, 우물을 파고, 나무를 심었다.
겨울을 긁어내며, 얼굴을 바꾸고, 이름을 바꾸어 살아남았다.

[너는 나를 실망시켰다.
부디 나를 배신해라.
나는 너를 깊이 사랑했다.
너를 믿었다.
그래서 ‘예’라고 말하며, 나 자신을 팔았다.]

그러나 너는—
현기증에 쓰러진 뒤,
권력의 도구로 쓰이다가
어둠을 낳는 데에 이용당했다.

나는 길을 잃었다.
다시 처음부터 살 수 있다면.

내 모든 일은 허무로 돌아갔다.
마당도, 집도, 나무도, 마을의 문도—
심지어 마을 자체도 사라졌다.

핏빛 돌들이 발밑에서 구르며
수천 명이 허무 속에 서 있었다.

나는 이제 내 시체 안에 있다.
약속을 지켰다.
순간을 붙잡았다.

그리고 땅은— 또 하나의 종양을 키웠다.

여인의 가슴 위로
바람이 떨리는 감정을 실어와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 후기:

이 시는 개인의 상실을 넘어, 국가적 붕괴와 배신의 기억을 담고 있습니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이후, 한국은 권력의 공백과 혼란 속에서 방향을 잃었고, 1980년 광주 의거는 그 상처를 더욱 깊게 새겼습니다. 나는 이 시를 통해, 그 시절을 살아낸 이들의 내면 풍경을 물방울처럼 흘러내리는 시간의 이미지로 그려보고자 했습니다.

“밭을 갈고, 우물을 파고, 나무를 심었다”는 구절은 민중의 삶과 희망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그 희망은 “얼굴을 바꾸고, 이름을 바꾸어 살아남았다”는 절박한 생존의 몸짓으로 왜곡되었고, 결국 “핏빛 돌들이 발밑에서 구르며 수천 명이 허무 속에 서 있었다”는 절망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시의 중심에는 배신과 사랑, 그리고 그 사이에서 무너진 신뢰가 있습니다. “나는 너를 믿었다. 그래서 ‘예’라고 말하며, 나 자신을 팔았다”는 고백은 단지 개인의 감정이 아니라, 권력과 민중 사이의 파괴된 계약을 상징합니다. 그 배신은 단순한 정치적 사건이 아니라, 한 시대의 윤리적 붕괴를 의미합니다.

마지막 구절, “땅은 또 하나의 종양을 키웠다”는 표현은 그 이후에도 반복되는 폭력과 침묵의 구조를 암시합니다. 광주 이후의 한국은 단지 상처 입은 땅이 아니라, 그 상처를 덮고 또 다른 억압을 키워내는 땅이었습니다.

「무덤」은 그 시절을 살아낸 이들의 내면에 대한 기록이며, 동시에 잊혀진 진실을 붙잡으려는 시도입니다. 나는 이 시를 통해, 죽음과 침묵 속에서도 떨리는 감정을 실어오는 바람처럼, 기억과 감각이 다시 어루만질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 윤 태헌,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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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TaeHun Yoon

Retired Pastor of the United Methodist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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