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져지 드루대학교 가을풍경은, 고즈넉한 전원의 아름다움 속에, 한 폭의 진한 수채화였다. 선명한 색깔의 빨강, 노랑 잎들의 낙엽들이 오가는 갈바람에 우수수 떨어질 때면, 각가지 피부색깔을 한 신학생들의 어린 자녀들이, 쌓여진 낙엽 위에서 다람쥐처럼 굴러대었다. 또한 그네들의 젊은 아내들은 꿈꾸는 듯한 눈매로, 하늘 저 멀리 달려오고 있는 신천지를 잡으려는 듯이, 햇살이 내려 쪼이는 가을 하늘을 곧잘 올려다보곤 하였다.
가을이 깊어져 가고 있는 어느날, 큰 딸 세나의 여섯 번째 생일을 맞이하게 되었다. 나는 이웃의 신학생들의 어린 자녀들을 우리 학생 아파트에 초청해 놓은 채, 부지런히 생일파티 준비를 하였다. 그런데, 아직 한시간이나 남짓하게 남아있는데, 밖에서 인기척이 부스럭거렸다. 나는 이상하여서 유리문으로 밖을 내다보니, 세나를 그토록 좋아하는 [셈]이 벌써 문밖에 와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는 두 손에 무엇인가를 정성스럽게 든 채, 상기된 표정으로 연방 벙긋 벙긋거리며 중얼 거리고 있었다. 나는 아이의 그런 모습을 흥미롭게 훔쳐보노라니, 아이의 손에는 유리로 만든 백조 모양의 조그만 어항이 들려있었다. 거기엔, 찰랑거리는 맑은 물 속에 한 가닥의 해초와, 그 사이를 빨강 색의 붕어 한 마리가 열심히 헤집고 다니었다. 아마도 세나의 생일선물로 들고 왔음에 틀림없었다. [셈]은 그 조그만 어항 속의 붕어가 입질하는 모양을 시늉 하면서, 그 큰 눈을 떼질 못하고, 어서 속히 세나의 손에 들려주고픈 듯이, 안달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그런 아이를 먼저 집으로 들어오게 할까, 아니면 더 기다리게 할까, 하고 망설이고 있는데, ‘우당탕탕’ 하는 소리와 함께 한 떼의 아이들이 계단 위로 올라 오고 있었다. 학생 아파트에 살고 있는 신학생들의 자녀들이, 다 몰려 온 것이었다. 아이들은 [셈]이 들고 있는 어항을 보자마자 눈을 휘둥거리며, 서로 먼저 보겠다면서 어깨 싸움을 하고 [셈]은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태도로 어항을 두팔로 감싸안으며, 돌아서 버렸다.
나는 서둘러 생일파티 준비를 마친 후에, 공주 모양으로 한껏 멋을 낸, 세나를 문 가운데 세웠다. 그리고, 문을 활짝 열면서 아이들을 환영하자, 아이들은 서로먼저 들어오느라고 한꺼번에 좁은 문을 밀치고 들어섰다.
그 순간 갑자기 “쨍”하는 소리와 함께 [셈]의 비명이 날카롭게 아파트의 낭하를 울리었다. 아이들이 서로 밀치는 바람에, [셈]이 들고 있던 어항을 그만 놓친 것이었다. 눈 깜빡 할 사이에, 유리백조 어항은 산산조각이 나고, 금방 까지도 자유롭게 헤엄을 즐기던 빨강 색의 붕어는 공중으로 잠시 튀어 오르더니만,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힘없이 나가떨어졌다. 문 앞엔 깨어진 유리조각, 엎질러진 물과 한 오라기의 해초, 할딱거리는 빨강색 붕어가 우리 모두의 정적 속에 한동안 멈춰 버렸다. “그것은 세나 것이야!” [셈]의 목매인 울음소리가 그 정적을 깨었다. 세나도 금방 울상이 된채 당황하였고, 둘러 서있던 아이들도 말을 잊게되었다. 그토록 홀로 행복해 하며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하던 조금 전의 [셈]의 표정은, 슬픔과 분노 가득하였다. 아이는 생일파티가 다 끝나 가도록, 연신 눈물을 훔쳐대었다.
올해 세나는 23살의 처녀가 되었다. 청년이 된 [셈]을 길에서 만난다 하여도 우린 그 애를 결국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셈]의 깨어졌던 선물은 어느 날, 문득 내 삶의 현장에서 퇴색 함 없이 되살아났다.
그 날은 삶에 있어서 가장 힘들고 당혹스럽던 날이었다. 사람들은 등을 돌리고, 진실은 없다 하고, 거짓 사랑이 목소리를 높이고, 과장된 허세가 초라한 내 영혼의 골짜기를 덮어 올 때였다. 나는 몇 주씩, 몇 달씩, 참으로 답답하고 허기진 영혼으로 가슴앓이를 하며 눈물을 닦아내고 있을 때, 그 백조 어항 속의 빨강색 붕어는 세월의 퇴색된 숲길을 헤치고 찾아와 주었다. 그리고, 진정한 사랑의 선물이란, 비록 깨어졌을지라도, 아니 비록 전달되지 못하였어도, 영원히 상대방의 가슴에 살아 남아 있음을 속삭여 주었다. 사랑한다는 것- 살아있는 자들만이 누리는 아픔이며, 타오르는 불꽃같은 슬픔이며, 향내나는 들꽃의 아름다움이라며.
하나님께서는 인류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선물로 보내시었다. 그러나, 주님은 역사의 문전에서 그렇게 상하시고 짓밟히고 산산히 깨어져 버리셨다. 그 분은 늘 목이 마르셨고, 허기지셨으며, 배반 당하셨으며, 죽임까지 당하셨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었다. 하나님의 깨어진 선물이셨던 예수 그리스도는 삼일 후에, 사망의 문을 여시고 일어나시었다. 그 예수님은 지나간 2,000여년 동안 얼어 붙은 인류의 가슴에 초록의 생명을 돋아나게 하시고, 어둠 속에 빛의 문을 여시었고, 전쟁 중에 평안을 선포하시고, 병든 이들의 치유의 손길로 우리에게 함께 계시어, 오늘도 이렇듯이 우리는 다시 살아 오르고 있지 않는가! 아니, 그 선물은 영원히 인류의 가슴 속에서 한번도 은총의 날개를 결국 접으시질 않으셨다. 우리를 사랑하기에, 주님은 얼마나 아프셨고, 고독하셨고, 슬퍼하셨을까.
아, 오늘도 드루대학교 교정에서 올려다보던 그 가을 하늘 아래서, 왠지 붉은 단풍 같은 사랑의 아픔이 내 심장 위로 자꾸만 떨어져 쌓인다. 가을 속에선 그 분의 숨결이 더욱 더 깊고 가까이 들려온다.
© 윤 완희, 1999년 10월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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