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둔 병기

“따르릉, 따르릉” 이른 아침에 아이들을 학교에 막 데리고 나서려는데 전화 벨이 급하게 울렸다. 각 가정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아침 8시가 되기도 전에 목사관에 전화 벨이 울리는 것은 긴급한 일임에 틀림없었다. 나는 약간은 긴장을 하면서 전화를 집어드니, 목소리가 귀에 익은 분의 전화였다. 그러나 상대방은 나의 음성을 확인하자마자 분에 찬 목소리로 봇물이 터진 듯이 “어떻게 나에게 그럴 수가 있느냐?”며 호통을 치었다. 어떨 결에 “무엇 때문에 그러시냐?”고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모 행사에 자신의 이름이 기대했던 곳에 들어있지 않은 것에 대한 분노였다. 그 분은 그 일을 빌미로 다른 여러 가지의 일들을 끄집어내며 비난을 해대었다.

그만 아이들이 학교 갈 시간이 늦었다고 종종거리는 바람에 전화를 일단은 끊었으나, 갑자기 된 야단을 맞고 생각해 보니, 마음 한 쪽에서 마른나무가지가 타들어 가듯이, 나 자신도 모르게 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집에 돌아오니, 이곳 저곳에서 그 분의 전화를 받은 듯 많은 충고가 들어와 있었다. “사모님, 잘 하셔야됩니다. 잘못하면 시작 전에 일을 그르치십니다.” 도대체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마음속에 조금 전까지 만해도 솟아나던 해맑은 기쁨의 샘이 그 분의 전화 한통화로 흙탕물이 된 것처럼 영혼이 혼잡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문득 20여년 전, 부산의 첫 목회지에 갔을 때, 어느 연세 많이 드신 할머니께서 나의 등을 쓰다듬으며 하셨던 말씀이 불현듯 솟아났다. “쯧쯧쯧, 이렇게 고우신 분이 전생에 무슨 죄가 많아 사모님이 되셨오!” ‘…? 죄가 많다고요? 누가요?’ 당시 유행하던 미니 스커트를 입고, 교인들을 첫 대면하던 나는 기가 막혀서 샐쪽해 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오랜 세월을 타종교에서 살아오셨던 할머니가 사모들의 삶이, 보기에 처량해 보이고 때로는 가엾어 보였기 때문에 전생의 죄의 대가를 치르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씀은 어느 정도 맞는 말씀이었다. 우리 조상들의 죄가 어느 정도인지는 몰라도,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그 후로 늘 자각하며, 오늘도 죄인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모란, 목사님들처럼 자신의 전 생애를 하나님께 헌신하겠노라고 시작부터 서원하고 가는 길은 아니어도, 세월이 흐르매 어느새 구도자의 길을 함께 걷는 동행자가 된 것만은 틀림없다. 그 길은 한마디로 거친 광야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광야에 기쁨과 평화의 샘을 곳곳에 숨겨두셨다가, 필요할 때마다 놀라움과 기쁨으로 터트려 주셨고, 오히려 세상의 물이 없어 헤매 이는 이들에게 나눠주고자 하는 여유조차 주시었다. 또한 나의 삶을 이끌고 계시는 주님 안에서의 구함과 응답은, 남이 알지 못하는 행복과 즐거움으로 늘 채우셨다. 사실은, 사모이기에 남달리 받아온 그 동안의 사랑의 보석들과, 자스민의 향기에 비할 수 없는 사랑의 향취로 영혼은 늘 호사하지 않았던가! 때때로 다가오는 작은 비난들은 내게 소금이 되고, 하나님 안에서 오는 겸손하라는 채찍임을 이제 나는 알고 있다. 그러기에 마음이 어두워지고 좌절해지는 순간이 오면 나는 하나의 숨겨진 병기를 활용한다. 그것은 금식 기도이다. 며칠씩은 아니더라도 하루, 또는 이틀, 가족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한다. 놀라운 것은 이 병기를 사용하였을 때마다, 찾아오는 마음의 평정과 하나님의 위로와 겸손이며, 거울 속처럼 드려다 보이는 연약하고 추한 내 모습이다.

어느 선배 사모님은 누군가가 마음을 어지럽히거나, 가슴 아픈 이야기를 전화통에 전하면, 그 전화를 놓는 즉시 일주일간을 작정하고 그 분을 위해서 기도로 매달린단다. 그러면, 웬일인지 일주일 후에는 상대방이 전혀 다른 태도로 사모님을 대한다는 말씀이었다. 근 40여년을 목회현장에서 찾아낸 사모님의 병기였던 것이다. 그 병기로 선배 사모님은 험산준령을 넘고 넘어, 이제는 오히려 초연한 노장의 멋이 흐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우리의 삶 가운데, 비난이란 사랑의 다른 표현이라고 자위해 보고싶다. 나의 충분한 관심과 사랑을 받기를 원하는 이들에게 미처 그 모든 필요를 채워주지 못했을 때 ‘내가 여기있어요!’라고 알리는 손짓과 같은 것- 비난하는 이들의 마음인들 오죽 아프고 힘이들까? 올한해도 이 비난들이 내 영혼에 소금이 되어 더욱 더 성숙한 신앙인이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으며, 숨겨진 병기들을 다듬어 본다.

윤 완희, 1/20/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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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TaeHun Yoon

Retired Pastor of the United Methodist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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