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부르기만 하여도 금방 문을 열고 들어오시며 “내가 여기 있다”라고 응답하실 것 만 같은 아버지! 세월이 갈수록, 생전에 가지셨던 아버지의 꿈이 내 마음속에 소리 없이 익어가며 되살아나고 있다. 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 시절에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가난하였으며, 남으로부터 늘 속임과 이용만을 당하시던 순전한 분이었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를 상실하거나 휘청거림 없이, 평생을 남의 멍에를 대신 메어 주는 자, 베푸는 자로 최선을 다하셨던 모습으로 내 마음에 잔잔히 남아계시다. 올해로 아버지가 떠나신 지 35년이 되어간다. 그러나 왠지, 아버지의 향취와 온기를 더 가까이 느낄 수 있는 것은 연륜 탓일까?
1900년대 초, 아버지가 자라시던 시절엔 시국이 뒤숭숭하고, 대부분의 백성들이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시절이었다. 아버지는 빈농의 자식으로 소학교를 나오셨으며, 일정치하에서 17세의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가 유리공장엘 10여년 이상 다니며 살고 있었다 한다. 그러나, 객지에서 영 돌아오지 않는 동생을 형님이,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전보를 보내어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고 말았다. 고향에 돌아온 아버지는 29세의 나이에 17살 된 어린 아내를 맞이하셨다. 어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아버지는 중매쟁이를 통해 나이를 25세로 속이셨다고 한다. 결혼한지 몇 달 후에 동회에서 호적조사가 나와 호적을 대조해 보니, 어머니가 상상도 할 수 없는 늙은(?) 남편이었음이 그만 드러난 것이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속은 것이 분하여서 일주일 간 식음을 전폐하고 울면서 두문불출하셨다고 한다. 그 때문이었는지, 아버지는 어머니를 금이야 옥이야 돌보시며 무척이나 아끼셨다. 어머니와 결혼 후, 아버지는 다시 일본으로 가셨으나, 일본생활은 그리 오래 갈 수 가 없었다. 고향에 돌아가자는 어머니의 성화로, 결국 한국으로 다시 돌아와 전라도 황등면이라는 곳에 자리 잡으셨다.
아버지는 천성이 남의 일이라면, 밤을 새워가면서도 몸을 돌보지 않고 애쓰셨기 때문에, 동네에서는 ‘법 없이도 사는 최서방’으로 불렸지만, 가난에서는 도저히 헤어날 재간이 없던 분이셨던 것 같았다. 그러나, 아버지가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고부터 그 봉사와 희생은 더욱 더 빛을 발하여, 장로로서의 중직으로 많은 일을 감당하셨고, 방앗간을 운영하시는 축복도 누리셨다. 6.25가 터졌을 때, 아버지는 빈 교회를 지키며 피난을 끝내 사양하셨고, 새벽마다 주의 제단을 성실하게 지키셨다. 공산당원들이 천하를 삼키기라도 하듯이 헤집고 다닐 때에도, 아버지는 오히려 미처 피난가지 못한 이들을 찾아 돌보았다. 결국 아버지는 ‘지독한 악질분자, 예수쟁이’로 색출되어 처형 날짜를 기다리던 중, 종전이 되었다. 아버지는 폐허된 서울을 향하여 새로운 삶의 정착지로 정하셨다. 낯선 서울의 지리와 사정을 잘 안다는 분을 따라 서울역에 도착했으나,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사기와 속임수, 절망뿐이었다. 아버지의 꿈과 희망이 거센 회오리바람이 되어 어디론가 흩어져 버리고 말았다.
당시 서울거리에는 전쟁의 북새통에 부모를 잃은 아이들, 북에서 탈출한 피난민들, 가족을 잃은 사람들로 법석이고 있었다. 아침이면 “밥좀주소!”하고 외치는 깡통을 든 거지들은 끊임없이 대문 있는 부잣집들을 두드렸다. 우리 집은 비록 피난민들이 모여 사는 판잣집이었으나, 늘 거지 떼들이 시도 때도 없이 들끓었다. 아버지는 밤이고 낮이고 깡통 들고 헤매는 아이들만 보면, 데려다가 씻기고 입히고 먹이며, 그의 연고자를 찾을 때까지 수개월, 수년을 돌보셨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손과 발, 귀가 동상에 걸리어 붓고 터져있었고, 수개월 이상을 목욕도 못하고 옷도 바꿔 입지를 못하여, 온 몸이 부스럼과 이로 들끓어, 그 형상은 말할 수 없이 참혹하였다. 우리는 한 밤 중에 자다가도 불현듯, 아이들을 목욕시키고 있는 부모님의 모습을 늘 발견하곤 하였다. 아침이면, 생면부지의 남자아이가 나의 아끼는 옷을 입고 있거나, 언니, 오빠의 옷을 걸치고 있을 때는 질겁을 하던 우리의 모습이 기억으로 살아난다. 낯선 아이들이 몇 명씩 집에 들어오면, 우리 육남매 자녀들의 불평은 대단하였다. 더군다나 동네에 나가면, 아이들이 놀려대었다. “완희네 는 거지하고 산다!”
처음에 올 때는 더럽고 험상궂게 망가지고 상처난 아이들은, 일주일이 지나면, 혈색이 돌아오고, 거친 피부가 뽀얗게 변하고, 동상이 가라앉는 현상은 어린 내게 몹시 신기하게 보였다. 개중에는 몇 주씩을 묵다가, 집안의 쓸만한 책이나 옷, 그릇 등을 챙겨 가지고 도망가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한번도 그 애들을 탓하거나, 화를 내시는 모습을 볼 수 가 없었다. 오히려, 우리 자녀들과 이웃들이 화를 내면 “그 애가 필요하니까 가져 간 거야” 하시며 호탕하게 웃으셨다. 아버지의 웃음소리는 여름날의 소낙비처럼 나를 흠씬 적셔주곤 하였다.
그러나, 서울 생활은 아버지에게 견디기 힘든 고난의 나날이었다. 믿었던 이들의 속임수와 각박한 인심, 전라도 사람이라는 사회적 차별과 무시함. 자연을 떠난 거친 도시환경과 공해, 사랑하는 친척들과의 단절… 아버지는 심장병과 폐결핵에 결국 쓰러져, 병상에서 회개의 기도로 하루를 보내시곤 하셨다. 그 때 아버지가 즐겨 부르시던 찬송가가 몇 곡 있었다. 그 중에 “나 주를 멀리 떠났다 이제 옵니다”를 부르실 때면, 나는 왠지 불안해지기만 했다. 행여나 아버지가 우리를 내버려두고 멀리가시지 않을까? 그러나 아버지는 당신의 마지막 시간을 지고한 모습으로 단장하고 계셨으며, 어머니께 진심으로 용서를 구한 것이 하나있었다. 그것은 나이를 속여 결혼했던 일이었다. “내가 당신에게 몹쓸 일을 했던 거야!” 육남매 자녀들을 떠맡은 어머니의 생활고를 지켜보는 것이 아버지 마음을 견딜 수 없게 하셨으리라! 또한 아버지는 목사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섬기시던 황등리 교회를 훌쩍 떠나, 그로 인해 직분감당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에 대해 늘 애통해 하셨다.
아버지가 52세의 연세로, 하나님 품에 안기시기 며칠 전에, 천국을 오르시는 꿈을 꾸셨다. “… 어느 병원엘 갔는데, 모든 사람들이 흰옷을 입고 빛이 환하게 쏟아지는 2층으로 사다리를 통해 오르고 있었다. 나도 얼떨결에 사람들을 따라 올라 가려고 하는데 어느 인자한 얼굴을 한 분이 환하게 미소지으면서 삼일 후에 오라고 하더라…” 숨을 헉헉 몰아대시며 생명의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계시던 아버지의 얼굴에, 순간 넘치던 희열! “…! 아버지가 곧 돌아가시려나 보다!” 당시에 겨우 40세가 된 어머니의 당혹스러움과 눈물 속에서, 나는 외로움과 소외의 벼랑 속으로 한없이 추락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안 계시면, 난 어떻게 살지?”
아버지의 장례가 끝난 후, 학교에 갔던 첫날,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길가의 포플러 나무의 노란 잎새가 몇 가닥 붙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고, 집집마다 마당에는 코스모스가 씨앗을 잔뜩 가슴에 품고는 눈부신 아침 햇살과 장난질을 하고 있었다. 여느 때와 같이 개천 옆을 지나 학교 운동장을 들어서는데, 다리가 자꾸 만 헛디뎌지며 끝도 알 수 없는 허허로운 공간 속으로 한없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며칠전의 나 자신과 오늘의 나는 전혀 다른 아이인 것만 같았다. 6학년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참새처럼 재잘거리던 수십 명의 아이들이, 갑자기 찬물을 끼얹듯이 조용해지며 나를 일시에 주시하였다. 선생님도 갑자기 조용해진 아이들을 바라보다가 얼른 시선을 나에게 보냈다. 그리고 나의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주시며 “가까이 오라” 하시고는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나는 선생님 앞에 서서 그저 억울한 심정으로 엉엉 울었다. “우리 아버지는 10여 년간을 병을 앓다가 돌아가셨어요!” 나는 누구에게 라고 할 것 없이, 외쳐대었다. 불쌍한 나의 아버지. 내가 커서 아버지의 병도 치료해 드리고, 큰 효도를 하려고 했었는데… 아버지는 내가 자라기를 기다려 주지 않고, 너무나 빨리 내 손목을 놓으신 것이 못내 안타깝고 아프기만 하였다.
나의 아버지! 그분은 나라와 민족의 격동기에 한 포기의 민초로 사시다가, 아무런 흔적 없이 사라져 가셨다. 그 분은 이 땅에서 사시던 동안, 실패와 좌절의 강에서 무척이나 허우적거려야 만 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가물거리는 생명의 심지 안에서 빛을 향한 서툰 걸음을 포기치 않으셨다. 철없는 자녀들과 수십 명의 낯선 거지아이들, 전쟁의 아픔 속에 절망을 안고 살아가던 거친 이웃들에게 “하나님 아버지”의 손이 되시어, 그들을 알게 모르게 일으키시기를 즐겨하셨다. 자신은 비록 병든 몸으로 고향엔 돌아 갈 수 없었으나,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던 어린것들을 밤이고 낮이고 찾아내어 고향을 찾게 하고, 부모 형제자매들을 되찾게 해주시던 나의 아버지! 인생의 거친 광야에서 생수의 샘을 파시고, 그 자리에서 단순한 행복을 즐기시던 분. 나는 나이가 들어가도 아버지는 그 모습 그대로, 내 손을 놓지 않으셨음을 이제사 알고 감사케 된다. 아버지가 마지막 순간까지 놓지 않고 바라보시던 그 높고 먼 지평선은 어느 매쯤이었을까?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이 진해질수록, 시간의 책장 넘기는 소리가 조급하게 들려온다.
— 윤 완희, 6/7/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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