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가을이 오면 독서의 계절이라 하여 많은 분들이 책을 가까이 하려고 노력도 하고, 또한 인기 있는 신간서적들을 찾아 서점에 서성거리기도 합니다. 아침저녁으로 찾아 들어오는 선선한 바람과 물들어 가는 낙엽은, 인간의 심연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가 되는 것 같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무엇을 읽어야 될까?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입니다. 책들도 수백 수천 종이 되기 때문에, “어떤 책은 맛을 음미하고 어떤 책은 그것을 삼켜야 하며 어떤 책은 반드시 소화시켜야 한다”고 영국의 철학자인 프란시스 베이컨은 말하였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 분들에게 이 가을엔 우리의 영구적인 양식이 되는 성경을 많이 읽어 반드시 소화하자고 권하고 싶어지네요. 성경은 평생을 읽고 연구해도 다 알 수 없는 깊음과 오묘함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성경을 더 이해하고 가까이 하기 위해 이 성경이 우리에게 오기까지의 과정을 함께 나눠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성경을 다른 말로 “거룩한 책”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 거룩한 책은 미국의 모든 호텔의 객실에는 어디나 있습니다. 주로 침대 옆 머리맡 서랍에 놔두게 되는데, 손님 중에 자살을 기도하려했던 사람들이나, 실의에 빠져있던 사람들이 이 성경을 보는 순간에 자살을 포기하거나 새로운 소망을 말씀 가운데서 찾아낸 간증들을 들을 수 있습니다. 왜 사람들은 성경을 읽고 삶에 변화를 갖게 할까요? 딤후3:16절을 통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소설책처럼 밤새 한번 읽고 그 모든 뜻을 파악하거나 이해하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어떤 분들은 밤에 잠이 안 올 때 성경을 읽으면 잠이 잘 온다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들에게 잠을 주시지만, 성경을 누워서 읽거나 졸린 눈으로 읽게되면 성서 속에 흐르고 있는 강력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지요.

성경을 읽다보면, 어제 읽은 말씀인데도 불구하고 오늘 읽어도 새롭고 그 말씀의 오묘함 속에 정신이 번쩍 깨여지기도 하고, 영혼의 흐름을 너무나 명확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거울로 비교하거나 창으로 비교를 하지요.

성경은 각 가정마다 가족수대로 있거나, 새 번역이 나올 때마다 마련된 성경으로 인해 부족함 없이 성경을 우리는 쉽게 손에 넣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엔 글로 된 성경을 가진 것이 아니라 구전으로 내려왔다고 합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야기로 표현하곤 했습니다. 고대사회에서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과 시인은 아주 중요하여 제사장처럼 존경을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조상들의 옛이야기를 다음 세대로 전수하는 과정에서 과거, 현재의 이야기를 통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하나님 안에서 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과거를 기억하고 승리의 이야기, 평화의 날, 축복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신실하게 지킬 때 따라왔다는 사실을 구전으로 자손들에게 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이 지금도 공동체에 대한 책임이 강한 것은, 신앙공동체를 통해 하나님 안에서 이 세상을 보다 책임 있게 살기 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서를 매일 읽으면서도 편견과 남에 대해 왜곡된 견해를 갖고있는 것은, 성경을 읽을 때 개인적인 면으로 만 읽고 공동체의식으로 읽지 않기에 공동체에 대한 책임의식이 없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지요.

그 후에 활자가 만들어지고 토판과 파피루스와 양피지에 글로 옮겨진 고대문서를 발굴하게 되면서부터 성서학자들이 모아서 편집하게 됩니다. 구약은 히브리말로 쓰여졌기 때문에 히브리 성서라고 불려지기도 했습니다. 과거에 초대 기독교인들 중에는 신약은 받아들이되, 구약은 거부해야 되는 것처럼 생각 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구약을 완성시키러 오셨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것은 기독교를 공허한 종교로 만들어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부인하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결국 구약은 그릇을 만들었고 신약은 그 그릇에 하나님의 은혜를 채우는 성서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구약을 읽을 때, 이해 할 수 없는 부분들이 종종 나오는 것은, 수천년 전에 고대 중동지방인들의 우주관과 세계관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라 합니다. 당시에 그들은 이 세상이 평평한 천막이 기둥에 의해 받쳐진 모양으로, 물에 둘러싸여 삼층으로 되어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맨 위층인 하늘에는 영원한 신들이 있고 중간층에는 약하고 변하기 쉬운 인간들이 살고있으며, 태양은 천막 위를 떠다니다가, 가장 밑바닥 층인 죽음의 세계에 가면 볼 수 없다가 다시 올라온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로 그런 영향이 시편 19편에 볼 수 있다고 합니다.

“해에게는 하나님께서 하늘에 장막을 쳐주시니 해는 신방에 나오는 신랑처럼 기뻐하고 제길을 달리는 용사처럼 즐거워한다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으로 돌아가니 그 뜨거움을 피할 자 없다” (시19:4-6)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다양한 고대중동지방의 문화와 고대인들의 세계관이, 현대 과학적인 세계관과 다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알고, 성경을 읽으면 한층 더 재미있어지겠지요.

오늘날 우리는 성경을 너무나 쉽게 접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중요함을 때로는 망각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엔 평민들이 성서를 읽는 것이 적합하지 못하다고 수세기 동안 교회가 가르쳐 온 적이 있습니다. 성서 한 권을 번역하여 만들어 내는데는 수년이 걸리며, 수많은 학자들이 동원되었기 때문에 교회가 성경을 보호하는데 굉장한 노력을 했다고 합니다.

1536년 윌리엄 틴테일이라는 분은 성서를 영어로 번역했다고 하여 이단자로 정죄받아 산채로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그러나 몇 세대 후에 그가 번역했던 성서는 <훔정역> (KJV)의 기초가 되었는데, 영국 왕의 명령에 의해서 1611년 완성된 성서입니다.

그후 350년 후에 미교회협의회에 의해서 처음으로 <개정표준역>(RSV)이 출판되었을 때 어떤 기독교인들은 그것을 불태워 버렸다고 합니다. 인간은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에서도 새 번역성서가 나왔을 때, 많은 분들이 “성경의 일점일획도 제하지 말라”고 한 말씀을 들고 반발하던 기억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지금도 새롭게 번역되는 이유 중의 하나는, 한 언어가 다른 문화를 접할 때 발생하는 갈등과 언어의 변천 때문이라고 합니다. 번역과정에서 잃어버렸던 의미를 되찾거나, 가깝게 수정하다보니 번역하는 사람들의 지식, 경험, 신학이 그 속에 반영케 되는 것이지요. 히브리어로 “샬롬” (Shalom)은 “평화, 조화, 건강, 온전함, 정의”라는 의미인데, 문맥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번역자들이 많은 고심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아직까지도 샬롬을 완전하게 번역할 수 있는 단어가 영어나 한글에는 없다하지요?

이 성서는 오늘날까지 또한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전해져 왔습니다. 즉, 음악, 조각, 미술, 영화, 비디오 같은 다양한 방법을 통해 전해져 왔습니다. 미술관엘 가보면 유럽의 예술품들은 거의가 성서를 근거로 한 작품들입니다. 1996년에 연합감리교 총회에 미 대통령 부인 힐러리 여사가 어렸을 때 다녔던 교회학교 교실에 걸려있던 선한 목자 예수의 사진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에게 미친 영향을 회상하며 “이런 이미지를 보면서 자란 어린아이가 왜 변화되지 않겠습니까?”라고 반문하였습니다. 우리도 자라나면서 많은 그림이나 조각 속에 예수님의 이야기를 눈으로 읽으며 그 이미지를 그리며 자라난 기억을 하실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 최초의 신약성서가 번역되어 나온 것은 1887년 만주에서 나온 <예수셩교젼셔>였습니다. 스토트랜드연합장로교회 소속 중국선교사인 존 로스가 동료인 맥킨타이어 선교사와 평안도 의주 청년들인 이응찬, 백홍준, 서상륜, 이성하 등을 만나 번역하였다고 합니다. 이 로스번역팀은 5년전인 1882년에 <예수셩교 뉴가복음젼셔>를 실험적으로 펴냈었다고 합니다.

또한 1887년 성서번역자회의를 감리교의 첫 선교사인 아펜셀러와 장로교의 첫 선교사인 언더우드를 번역책임자로 하여 알렌, 헤론, 스크렌톤등이 위원들이 되어 성경번역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로스번역인 <예수셩교젼셔>를 고쳐서 신약은 펴내기로 했다가, 당시의 한글표기법이 통일되지 않은 상태라 더 어려울 것 같아, 새롭게 번역작업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1900년에 신약을, 1911년에 구약을 펴내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성서번역 과정에 한국 감리교회의 첫 선교사인 아펜셀러는 1902년 목포에서 열리기로 한 번역자 회의에 참석하러 배를 타고 가다가 군산 앞바다에서 순교하고 만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런 우여곡절 중에 1911년 대영성서공회의 이름으로 구약은 두 권, 신약은 한 권으로 나눠져 출판되었습니다. 당시엔 인쇄기술이나 종이도 형편없는 것이었지요.

그 후에 성경은 여러 차례의 번역을 거치어 신구교가 함께 번역한 공동번역의 시편과 예언서들은 거의 원문과 같이 아름답게 잘 번역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공동번역이 한국 개신교에서는 잘 사용되지를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1983년부터 개신교회 교단대표들이 대한성서공회에 요청을 하여, 각 개신교 교단별로 성서학자들을 초청하여 다시 번역을 시작하여 <표준 새번역성서>를 새롭게 번역하게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이 아름다운 성경이 나오기까지는, 수천 년의 역사 속에 함께 하신 하나님과 그 언약의 백성들 간의 순교 피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때로는 성경 속에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말씀만을 편식할 때가 있습니다. 어느 분은 요한계시록 만 읽고 의미하시는 분이 있고 또는 어느 한 구절에만 치중한다면 올바른 성경의 흐름을 따라 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히4:12)

이 가을에 성경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 권의 성서는 수천 년을 지나는 동안 사람을 살리고 변화케 하고 치유하였습니다. 또한 이 성경은 우리 자손 대대로 생명의 근원이 될 것입니다. 가정마다 이 성경을 넘기는 소리가 이 가을에 한층 높아지기를 원합니다.

– 윤완희, 9/21/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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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TaeHun Yoon

Retired Pastor of the United Methodist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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