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짐과 만남의 미학

사람은 어머니 뱃속에서 나오는 순간부터 사랑하는 것들로부터 떨어져 나가야 만 하는 경험을 갖고 살아가게 됩니다. 아마도 삶의 계속적인 변화와 유동성 때문이겠지요.

제가 아직 국민학교도 들어가지 않았던 때였습니다. 전라도 군산이라는 곳에 저희 외갓집이 있어, 외할머니 댁을 어머니와 함께 방문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군산에 온 김에 조금 떨어져 있는 곳에 사시는 친척을 방문코자 가시면서, 저를 잠시 떼어 놓고 가시게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가신 후, 낮동안엔 이모와 외삼촌들이 몹시 귀여워해주고, 맛있는 것을 사주시니까 그런대로 어머니가 옆에 계시지 않음을 별로 느끼지 못하고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그런데 밤이 늦어 호롱불마져 꺼지게 되고 낯선 벼개를 베고 누워있으려 하니, 몸과 마음이 그토록 불안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나중에는 그 두려움을 이기지 못해서 훌쩍훌쩍 울다가 엉엉 소리내어 울게되었습니다. 놀란 이모와 삼촌, 할머니가 곁에서 달래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나중엔 울다가 지쳐서 잠들 때 까지 어머니를 찾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머니가 곁에 있어주지 않는다는 것, 그 자체가 어린 저에게는 공허함과 두려움, 슬픔이었습니다. 난생처음 맛본 잠시의 어머니와의 떨어짐, 그것은 잊을 수 없는 큰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느끼는 것은 우리의 삶 자체가 영생에 이를 때까지 이렇게 늘 사랑하는 이들과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지요. 사람뿐 만이 아니라, 때로는 키우던 짐승과, 쓰던 물건과, 즐기던 환경과, 애지중지하던 소유품들과 우리는 영원히 이 땅에서 함께 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늘 만남과 헤어짐의 회전 속에서 또 새로운 사랑의 다리를 놓으면서 가야되는 삶, 이 땅을 떠날 때까지 순간 순간 반복되겠지요. 오늘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이 헤어짐과 만남의 미학에 대해서 함께 나눠보겠습니다.

미국인구의 이동률을 보니까, 일년에 약 20%의 인구가 이사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가 되어있습니다. 해마다 쏟아져 나오는 대학생들의 대학을 따라 이동하는 숫자만 해도 대단하겠지요. 아마도 우리 이민사회의 이동률은, 이민 초기보다는 많이 나아졌겠지만, 지금도 생활의 안정과 자녀들의 학군, 사업상으로 살던 지역과 교회를 떠나야 만하는 교우들도 우리 주변에는 많이 있으리라 사려 됩니다. 저희가정도 이민와서 처음 자리잡았던 곳에서부터, 남편의 공부, 목회를 따라 이사하다보니, 이민생활 18년동안 약 5번을 이삿짐을 쌌다 푼 기억이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가장힘들고 마음 아팠던 일들은 사람과의 헤어짐인 것 같습니다. 이사 할 때보면, 그동안 마음과 마음을 나누었던 사람들과는 물론이요, 무관심했거나, 서로 마음이 상했던 사람들까지도 이 사랑의 줄로 매여져있었던 것을 확인케 됩니다. 이렇게 사람의 한평생이 자의에 의해서나 또는 타의에 의해서, 늘 새롭게 만나고 해어짐의 연속 속에 살아지요. 때로는 영원한 이별이 될 수 있고, 때로는 공부나 취직을 위한 잠시의 헤어짐이 있지만, 사랑하는 이들을 보내거나, 떠나는 일들은 유쾌한 일은 분명아닙니다. 그토록 많은 연습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언제나 이 헤어짐에 어색할 뿐 아니라, 늘 깊은 상처를 얻게됩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시간이 지나면 언제나 치유가 되는 사실입니다. 믈론 상흔은 남아있지요.

요즈음은 이사철은 아니지만, 저희가 속해있는 감리교는 매해 6월달에 있는 연회를 통해 목사님들의 이동이 공식 발표가 됩니다. 그래서 7월 초 부터는 각 교회마다 새로운 목사님과 가족들을 맞이하느라고 몹시 부산한 움직임들이 있습니다.

저희와 오랫동안 친분을 나누며 그리스도 안에서 깊은 사랑을 나누던 Searfoss 목사님 내외 분이, 감독님 명으로 교회를 필라델피아로 파송을 받아 이사를 가시게 되었습니다. 갑작스런 일인지라 서로가 당황하고 섭섭하고 놀라기도 했습니다. 또한, 그 목사님이 담임하시던 교회의 성도들의 섭섭함은 이루 말 할 수없음을 지켜보면서,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참으로 귀한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평소에는 가까이 있는 분이 얼마나 훌륭하고 좋은 분인지 모르고 지내다가, 막상 이사를 통해, 또는 죽음을 통해 작별을 고하게되면 그 때부터 그 분이 계시던 빈 자리가 너무나 크게 여겨지게 됩니다. 그리고 언제나 그러듯이 좀더 사랑하고 이해하고 지낼 것 그랬구나 하는 후회 속에 보내게 됩니다. 제가 지난 주간에 Searfoss 사모님과의 헤어짐을 나누며 보낸 편지가 있습니다. 이 시간에 여로분들과 함께 나누겠습니다.

“ Mrs. Searfoss 사모님께!

사랑하는 사모님! 우리는 오늘 그 동안 파 오던 우정과 사랑의 샘을 잠시 중단해야 될 시간이 왔습니다. 그 귀한 만남의 골을 더 깊게 파내려 갈 수 없다는 것이 못내 아쉬움을 갖게 합니다. 사모님!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우리는 서로의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임을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만의 조용한 대화의 장소를 물색하다가, 오히려 번잡한 쇼핑몰로 발길을 옮기게 되었었죠. 우리의 무의식 속에는 낯선 군중들 속에서 목사의 아내라는 옷을 훨훨 벗고, 십대소녀들처럼 한없이 자유스러워지기를 원했던 것이었지요.

우리는 시간과 시선의 제약 없이 백화점의 고급 물건들을 손으로 만져보기도 하고, 걸려진 드레스를 서로의 몸에 대보면서 낄낄거리기도 했습니다. 비록 우리는 아무 것도 산 것도 없었고 서로를 특별한 말로 위로하지 않았어도, 이미 위로를 받았었고, 서로의 우정을 가슴에 걸고 집에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날 이후, 우리는 목사의 아내들만이 가질 수 있는 기쁨과, 마음속의 괴로움들을 눈길만 마주쳐도 금방 알 수가 있었지요. 어느 날, 사모님께서 풀 타임 잡을 얻으시어, 대학의 학생처장으로 승진되었을 때의 기쁨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 일이 약 6개월 전의 일이었던가요? 그런데, 그 기쁨을 온전히 만끽하기도 전에 목사님의 원치 않는 전근으로 이렇게 포기해야 만 된 사모님의 아픔을 무엇으로 위로를 해야 좋을 지요. 또한 사랑하던 성도들과 헤어질 때의 상처가 치유되기까지, 홀로 얼마나 많은 날들을 앓아 누워야 할까요!

사모님! 목사님들은 안수 받는 순간부터, 3가지를 늘 준비하고 사셔야 된다고 합니다. 설교, 이사, 죽을 준비라고 하던가요? 우리 사모들은 과연 어떤 준비가 필요할까요? 저는 어느 날 문득, 사모들의 삶을 바라보면서, ‘포기하는 준비’가 늘 있어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것은 물질로부터, 명예로부터, 인간관계로부터, 사랑하는 것들로부터, 매어있거나 연연할 수 없는 삶, 그것이 바로 주님 닮아 가는 생활이라고 봅니다. 인간을 위해 줄 것이 더 이상 없을 때, 자신의 몸까지도 포기해서 십자가에 내어놓는 모습 말입니다.

사모님! 이젠 우리가 함께 나누던 우정뿐만이 아니라 사모님이 사랑하던 모든 것들과도 가까이서 만날 수 없게 되었군요. 사모님이 늘 정결하고 아름답게 꾸미었던 목사관 내부와 뜰악. 사모님의 취향과 관심을 한눈에 금방 알 수 있었던 성탄절 이브의 따뜻했던 디너와 허심탄회한 대화들. 여름이면 한아름 들고 오시던 풋풋한 오이와 토마토들. 이젠 모두 세월의 앨범 속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하셨어요. “…Saying goodbye we also may be able to say hello to a future that holds new possibilities. (잘있어요라는 말은 새로운 가능성을 갖고있는 미래를 향해 안녕하십니까 하고 인사하는 것과 같다) ” 사모님! 새로운 미래와 가능성은 언제나 이렇게 우리의 아픔과 고통을 건너 여기까지 우릴 인도했습니다.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나듯, 야곱이 삼촌 집으로 도망을 가듯,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가듯, 모세가 가나안을 향하듯, 떠나는 이들의 손에 하나님은 잘 그려진 지도를 결국 들려주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들의 심령에 보이지 않는 믿음을 쌓게 하셨고, 그 믿음을 통해 미래의 문을 하나씩 하나씩 열어주셨습니다.

사모님! 어딜 가시든 하나님의 현존 속에 함께 있음을 기억하며, 또 하나의 크나큰 포기를 결행하시고 발걸음을 옮기시는 사모님께 사랑과 존경을 보냅니다. 사랑하는 친구가.“

청취자 여러분! 새로운 미래를 열기 위해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선택받고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알수 없는 미래를 향해 믿음으로 나아가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적인 “헤어짐과 만남”은 더욱 더 중요한 의미를 갖게합니다. 고후 5:17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라는 말씀처럼 새로운 피조물인 그리스도인은 이전 것들로부터 작별을 늘 고하며, 새로운 하나님의 진리와의 만남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전 것들과의 헤어짐은 늘 우리를 아프게 합니다. 거기에 우리의 영혼과 육신이 안주해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영원한 종노릇 함을 그냥 놔둘수 없었기에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거기를 떠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결국 광야 길에 나선 이스라엘 민족은 빈들에서 굶주리게 되니, 애굽에서 종노릇하며 가마 솥에서 건져먹던 고기 맛을 다시 떠올리며, 주의 종 모세를 괴롭혔습니다. 그들은 이전의 종노릇하던 삶과 육신은 작별했어도 영혼은 거기에 그대로 매여있었기 가나안 땅에는 결국 들어 갈 수 없었습니다.

우리의 삶은 헤어짐과 만남의 연속입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서의 사역을 마치시고 하늘에 승천 하시기 전, 제자들과의 마음 아픈 헤어짐을 단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늘 평소에 함께 다니시던 베다니 앞까지 데리고 가서 손을 들어 축복하시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삶 속에 위로자로 치료자로 지혜자로 영원히 떠나지 않고 함께 하십니다. 이주간에도 이사를 계획하시거나, 또는 사랑하는 이들과의 혜어짐과 새로운 환경속에서 만남을 앞둔 분들이 있으시다면, 성령님의 위로와 인도하심이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결국 이 모든 과정이 본향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아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변화를 기쁨과 소망 속에 담대하게 받아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 윤 완희, 7/1/1998

Unknown's avatar

About TaeHun Yoon

Retired Pastor of the United Methodist Church
This entry was posted in As I Am, Devotional Essay, Essay by WanHee Yoon, faith-column, Letter from the Parsonage. Bookmark the permalink.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