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폐결핵 환자였는지 아셨어요?” 쇼설워커의 목소리는 당황하고 놀란 음성으로 전화기에서 왕왕거렸다. “…? 아시다시피 저도 그녀를 만난 건 처음이라고 어제 분명히 말씀드렸지요!” 수화기에서 조금은 가라앉은 음성이 차분하게 들려왔다. “…그녀의 연고자나 종이로 된 서류를 정말 발견 할 길이 없을까요?” “글쎄요. 어제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모 한국식당에 그녀의 짐을 맡겼는데, 저보고 대신 맡아 달라하니 곧 시간을 내어 찾아가 보겠습니다.” 쇼설워커는 속히 찾아봐달라는 부탁을 몇번씩 하고서야 조금은 안심이 된 듯이 전화를 끊었다.
105 경찰서로부터 연락이 온 것은 약 두주 전이였다. 무숙자인 한국 여인이 경찰서 주변을 떠나지 않고 빙빙 돌고 있다가 밤이면 경찰서 안의 의자에 앉아 밤을 잔지가 삼일이 되었다는 통보였다.
남편은 그녀를 면접한 후, 그녀가 건강진단과 함께 정신치료가 필요함을 알게되어 여인을 시립병원에 보내게 되었다. 그후 시립병원에서는 정신병원으로 보내졌고, 병원 측에서는 그녀의 연고자를 찾는데 협조해 줄 것을 부탁 받기에 이르렀다.
정신병동의 복도엔 옷차림과 머리가 산만하고 눈동자에 초점이 없는 흑인 백인 여인들이 바쁘게 왔다갔다하거나, 혼잣말을 열심히 하면서 의자에 앉아있기도 하였다. 또한 병이 심한 여인들은 열쇠로 차단된 방에 갇히어 지나가는 사람들을 향해 문을 열어달라고 애걸을 하였다.
이 필수. 그녀는 45세 정도로 보였고 맑고 깨끗한 피부를 가졌으며, 쌍꺼풀진 눈에 긴 머리에 파마까지 곱게 들여져 있었다. 면회실에서 약 15분간의 첫 대면을 하는 동안 여인은 몸의 자세가 흐트러짐 없이 꼿꼿한 자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때로는 지나칠 정도의 정중한 태도를 취하다가, 불현듯 주변을 둘러 본 후, 병동에 있는 못된 사람들이 자신을 해치려 하여 방금 경찰에 신고하였노라며 긴 한숨을 몰아 쉬곤 하였다. 그리고, 그녀는 모 한국식당에 자신의 짐 가방이 두 개가 있으니 꼭 찾아서 대신 맡아 달라는 부탁 이였다.
그녀의 말은 의외로 사실 이였다. 정신병 환자의 말이 설마 믿을 수 있을 까 하는 의구심을 갖고, 모 한국 식당에 전화를 하니, 그녀가 일러준 대로 ‘김 아주머니’의 가방이 있는 것이 였다.
큰 여행 가방은 제법 무거웠다. 이 필수라는 여인의 배경을 알려 줄만한 서류가 행여 있으리라는 기대감을 안고 후러싱을 빠져 나오며, 도로가 여느 때보다도 더 털털거리며 파헤쳐진 곳이 많다고 생각했다. 언젠가 뉴욕시의 재정이 나아지면 순탄한 차도가 훤하게 깔리겠지! …아니, 언젠가 우리 이민 자들의 가슴에 한이 사라지고 아픔이 치료되고 꿈이 이루어지면, 그 때는 모두가 웃으며 말 할거야. 과거의 상하고 터진 가슴들과 그리움으로 꿰매지고 눈물로 얼룩지고 한으로 패인 구멍난 이민의 차도를 달리던 시절이 있었음을!
여인의 가방을 풀면서 나의 가슴은 떨리기 시작하였다. 마치도 신성한 물건들을 만지듯 그녀의 삶의 체취가 묻어있는 물건 하나 하나 속에 무수한 상념들을 갖게 하였다. 그녀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가방 안은 깨끗하고 질서 있게 물건들이 놓여있음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속옷은 속옷대로 가지런하고 깨끗하게 세탁이 되었고, 겨울옷과 여름옷이 분류가 된 채, 반뜻하게 접히어 흰 비닐에 쌓여져 있었다.
서류인 듯한 종이 뭉치가 옷 사이에 끼어있었다. 영한사전, 연필, GRE를 위한 시험 문제집, 여러 장의 모 미국대학의 편지봉투와 학교 입학에 관한 서류, 그 서류 위에는 1985년 2월 5일이라는 스탬프가 선명하게 찍혀있었다. 그리고, 유효 만기된 여권이 발견되었는데, 여권 속에는 꿈과 희망에 부푼 아름다운 모습의 그녀가 환하게 웃고있었다. 또한 몇 개의 빈 항공엽서, 잘 간직된 어느 미남인 남자의 흑백사진… 그리고, 깨끗이 보관되어있으나 몇 년은 묵어 보이는 어머니날 축하 카드와 함께 그 사이에 흰 종이로 정성스럽게 쌓여있는 사진 한 장- 그 사진은 내게 깊은 충격을 주었다.
한국의 시골 저수지를 뒤 배경으로 미색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머리는 뒤로 빗어 쪽을 진 할머니 한 분이 다리 위에서 미소를 지으며 찍은 사진 이였다. 어머니! 그녀의 어머니임에 틀림없었다. 나도 모르게 순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파도처럼 몰려왔다.
젊은 딸자식을 이국 땅에 보내놓고 그녀의 어머니는 얼마나 많은 시간의 흐름 속에 애통해 했을까? 또한 딸은 타국에서의 외로움과 번뇌의 노도 속에서 어머니의 미소 진 사진을 들여다보며, 얼마나 많은 순간들을 용기와 힘을 얻고 꿈을 키워왔을까? 그리고 어머니라는 그 눈부신 이름 앞에 부서진 꿈을 안고 뜨거운 통곡의 밤을 얼마나 지냈을까? 어머니의 이름이 하나이듯이 세상의 어머니의 가슴 또한 하나이지 않는가!
내 삶의 모든 연소와 봉헌들은 내 어머니와 나와의 두 사람의 몫인 것을 나의 하나님만은 알고 계신다라고 고백한 김남조 시인의 글을 떠올리며, 부서진 조각들을 주워 올리듯 그녀의 흐트러진 짐들을 다시 싸 모았다. 그리고 나는 지금도 살아 계실지 모르는 그녀의 어머니를 향해 긴 편지를 쓰기 시작하였다.
“어머니! 비로소 펜을 듭니다. 당신을 사랑하면서 ‘사랑합니다. 어머니!’라고 제대로 고백치 못했음을 용서하소서. 내 인생에 새 삶이 시작되면, 보라는 듯이 당신 곁에 달려가리라고 생각한지 어언 십여년이 지났습니다. 어머니! 당신께 배달되지 못한 서신들, 이 봄에 훨훨 날려보냅니다. 완결되지 못한 나의 꿈일랑은 허허로이 이 땅에 묻겠습니다. 그리고 이 시장기 나는 욕망들 이랑은 겸허하게 벗어버리겠습니다. 어머니! 그리고 내 삶의 망울들이 피기 시작하던 그 흙 내음 서린 당신의 품으로 나는 돌아가렵니다. 어머니! 네가 도착한 종착역이 겨우 여기냐고 결국 어머니만은 탓하지 않으실 줄 믿습니다. 나의 꼿꼿한 대변자가 되시고 비빌 언덕이 되시고, 귀향 길에 영접자되시어 버선발로 맞이해 줄 어머니! 나의 부서진 꿈들을 다시 가방에 꾸립니다. 나를 받아주시고 용서하옵소서… 불효 여식 드립니다.”
— 윤완희, 6/16/199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