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살다보면 참으로 재미있는 일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아직도 글을 쓰라면 늘 겁이나고 습작으로 끝내고 있는 제 자신이 ‘좋은 글을 쓰기 위하여’라는 제목의 글을 쓰게되니, 전문인들께 대단한 실례와 송구스러움을 갖게됩니다.
그러나, 제 자신이 때로는 어느 신문의 독자 난에 실린 글이나, 교회보, 잡지 등에 쓰여진 투박하나 진솔함이 들어있는 글을 읽을 때, 얻어지는 감동이 종종있으므로, 글이란 꼭 전문가나 특별한 훈련을 받은 사람들 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마치도, 오랜 세월을 손길로 잘 다듬어진 돌과, 산이나 바다에 흔하게 널려져있는 다듬지 않은 자연석의 차이는 즐기는 이에 따라 그 가치가 다를 것입니다.
저는 지난 3년간 미주 기독교 방송의 ‘목사관 서신’을 위하여 매 주 한편의 서신과, 교회 회보나, 사순절 묵상록을 위한 신앙 엣세이 등을 쓰고있는데, 사실 글을 쓰기 위하여 컴퓨터 앞에 앉을 때마다, 글을 전문적으로 쓰며 살아가고 있는 시인, 소설가, 수필가들게 존경을 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옥같이 아름답고 감동적인 글 뒤에 숨어있는 작가의 인고의 시간들과 노력없인 좋은 글이란 결국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구나라는 것을 늘 깨닫게됩니다. 그러면서도 또한 나같은 비전문인의 서툴고 투박한 글도 하나님께서는 적절하게 사용하신다는 것을 생각 할 때 감사와 용기 속에 글을 계속 쓰게됩니다.
1. 일상의 감동을 놓치지 않습니다
제가 전문적인 훈련이나, 작가가 되어야겠다는 단 한번의 결심도 없이 처음으로 글을 쓰게된 동기는 사실 너무나 조그만 일에서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결혼을하여 첫 아기를 낳아 키우면서 아기와 함께 엄마로서 성장해 나가고 있는 어느날, 올해 21세된 큰 딸아이가 세 살 무렵에 젖니를 가는 것이였습니다. 젖니가 빠지고 영구치가 나는 일은 뻔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저는 생명의 신비 앞에 아이와 덩달아 흥분을 하게 되었습니다. 손바닥에 올려진 흰 보석과도 같은 아이의 앞니가 너무나 소중스러워 보석함에 까지 넣어 귀하게 보존하였습니다. (지금은 그 이빨이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지 관심도 없지만!) 저는 그 감동을 잃을까봐 글로 적어 어느 여성지에 보내어 실리게 되었는데, 막상 활자화된 저의 글은 신기 할 정도로 화사한 빛(?)을 내었습니다. 여성지를 통해 저의 글을 처음 읽은 남편은 극구 칭찬을 하면서 “당신은 글 재주가 있군요! 계속써요!” 하며 또한 부축이는 것이였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글을 또 계속써야겠다는 충동이나, 글 재주가 정말있을까? 등에는 전혀 관심 밖이였습니다.
그 뒤 몇 년 후, 이민와서 어느 여자 전도사님을 알게되었습니다. 그분은 참으로 영특하고 아름다우며 신앙이 돈독하신 분으로 남편과 자식을 한국에 놔두고, 이곳에 와서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습니다. 알고보니 남편되시는 분도 한국 최고의 지성으로 불려지는 분으로서, 세상의 젊은 여성들의 선망의 대상이 될 만큼 무엇하나 부족하거나 빠짐이 없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1970년대 말 독재정군 아래, 동아일보가 탄압을 받을 때, 고문을 당하여 거의 반신불수가 된 상태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전도사님의 삶과 강인한 믿음, 그러면서도 신선한 미래의 비젼을 향하여 나가는 모습 속에 또 한 번의 감동을 받게되어, 난생처음으로 단편 소설이라는 글을 각색해 보았습니다.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전개하고 고치고 버릴 것은 버려야 된다는 아무런 의식없이 감동받은대로 써내려갔습니다. 그리고, 마침 모 일간 신문의 신춘문예에 ‘사랑의 양지“라는 제목을 붙여 겁없이 보냈던 것이, 입선이라는 영광과 함께 상금까지 타게되었습니다. 그때 저는 비로소, 나같은 사람도 소설이라는 것을 감히 써도 되는구나! 라는 놀라움 속에, 몇 년전에 ’당신은 글 재주가 있어요!‘ 라고 하던 남편의 말이 되살아 올랐습니다. 그뒤부터, 저는 글에 대해 눈이 떠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다음 해에 아이들로부터 얻어진 감동을 동화로 써서 신문사에 보냈더니 그것 역시 입선이되어 또 한 번의 상금을 타게되었습니다. 저는 두 번째 상금을 받은 후 부터는 왠지, 글에 대해 좀더 깊은 고민과 다듬어짐 없이 함부로 내어서도 않되겠구나 하는 책임을 갖게되었습니다.
일상의 감동이 오면 그 순간을 놓치지 말고 글로 남겼을 때, 그 감동은 그대로 남아 있을 뿐 아니라, 남에게도 그 감동을 그대로 전할 수 있는 것이 글의 매력임을 차츰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2. 내가 나를 위해 글을 씁니다
저는 신춘문예에 단편 소설과 동화가 입선된 후,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앞으로 부족하지만, 이 작은 달란트를 통해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겠노라는 엄청난 약속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약속한대로 주님의 영광을 위한 글이라는 대제를 붙이고 글을 만들기 시작하는데, 어느 순간에 더 이상 쓸글이 없구나! 하는 한계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 동안 세월을 지내다가 또 다시 일상의 감동이 찾아오면 짧은 수필로 남기곤 했는데, 글이란 남을 위한 것이거나 하나님을 위한 목적이 아니라, 내가 나를 다듬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마치도 어린아이가 일기를 쓰는데 선생님을 보여주거나 부모를 위한 목적으로 쓸때엔, 온갖 미사여구만 나열될 뿐이지 그 속에는 진정한 자아는 가리워져 있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에서는 “기쁨의 샘”이라는 계절별로 나오는 신앙지와 “사순절 말씀 묵상록”을 순전히 성도들의 신앙고백에 의하여 쓰여지게됩니다. 성도들의 단백한 신앙체험을 경험으로 한 수필 및 간증들이 주로 실리게 되는데, 그 글들을 통해 많은 감동과 배움을 얻습니다. 평소의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얻어낸 글들은, 글을 쓴 작가 만의 독특한 상황이 신앙과 함께 전개되기 때문에, 누구 글이 잘썻고 누구는 못썻다라는 평가가 나올 수 없습니다. 모두가 훌륭한 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개중에는 글을 부탁하면 “전 절대 못써요! 글 재주가 없어요!” 라고 극구 사양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글을 내가 나를 위해 쓰기보다는 보여주기 위하여 글을 쓸려하니, 쓰기도 전에 부담스럽고 준혹이 들어 얼마든지 남을 감동시킬 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두고 두고 힘과 용기를 불어 넣어줄 기회조차도 아예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요근래 주로, 주변의 생활 가운데 흔히 일어나는 일들과 연관시키며 글을 쓸려고 노력합니다. 저의 “사모“라는 특유한 상황과 직분 속에 연관된, 기쁨과 보람, 괴로움과 아픔, 처절한 내면의 싸움과 승리, 내 속에 기생하고있는 죄악들을 좀더 적나라하게 나타내고자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글을 쓰는 동안에 나의 연약함을 들여다 보게되고, 다듬게되고, 생각을 좀더 맑고 적극적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제 스스로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는 대제를 붙이고 글을 쓰지 않아도, 내가 나를 위해 글을 쓰다보니, 나를 변화시키며 성장시키고 계신 하나님의 손길이 후광로 들어나고 있음을 깨닫게됩니다.
3. 양서를 많이 읽습니다
저희가 16년 전에 이민 올때의 짐은 거의가 다 남편의 책이였습니다. 저는 가난한 신혼살림에 매달 들어가는 책값이 너무 아까워 “제발 그만 책좀사세요!”라고 결혼 한 후에 늘 불평을 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글을 쓰면서 부터 책의 매력에 눈이 떠지니 책값으로 들어가는 돈은 결국 아까운 것이 아니며, 책을 읽는 것은 결국 시간낭비나 사치가 아니라는 것을 발견케 되었습니다. 책을 읽지 않으면 그만큼 생각의 반경이 좁아지고 한계가 있고, 손해보는 인생을 살게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좋은 양서들을 많이 읽게되면, 인생을 보는 눈과 직관력이 훈련케되며 영혼의 풍요로움을 물론이요, 언어의 표현에서도 풍성함을 얻게됩니다. 특히, 모국어를 별로 쓰지 않고 살아가는 우리 이민자들에게는 세월이 갈수록, 영어도 못하고 한국말의 어휘도 점점 잃어가고 있다는 고백을 듣게됩니다. 또한 서서히 이중문화 속에서 살다보니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희박해져 가는 것을 발견케됩니다. 저는 요근래 한국동란에 관한 소설을 읽으면서, 공산당의 정체와 전쟁의 아픔을 새삼스럽게 경험하면서 한반도에서 감돌고 있는 전운에 대해 더욱 기도와 관심을 갖게되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 대해 아이들과 함께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좋은 책은 내가 겪지 않고 보지 않았던 세계의 문을 활짝 열어주고, 이해하게 하고 사랑하게 합니다. 도전을 받게합니다. 사고력을 성장 시킵니다. 글에 대한 테크닉을 은연 중에 배우게 합니다. 그 중에 양서 중의 양서인 성경은 늘, 우리 삶의 방향을 잡아주고 의미를 깊게하고, 목적과 태도를 분명하게 합니다. 즉, 말씀에 선 좋은 믿음은 글을 쓰는데 큰 재산이 됩니다. 굅
4. 좋은 글 벗을 가까이 합니다
저는 처음에 단편 소설과 동화를 써서 신문에 낼 때, 아무에게도 원고를 한번 읽어봐 달라고 부탁 할줄도 몰라 그냥 한 번에 써서 보냈던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두고 두고 후회하게 되었습니다. 글이란, 세상에 태어나면 다시 고치기가 어렵다는 것과, 자기의 사상과 감동을 문학적으로 잘 다듬어졌을 때, 더욱 더 빛이 나고 두고 두고 읽고 음미 할 수가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처음에 내가 쓴 글을 남에게 좀 봐달라고 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써놓고 숨겨두었다가 남편이 찾아내어, 읽은 후엔 몇가지 지적해주거나 고쳐야 될 부분을 실랄하게 비평할 때는 받아들이기가 여간 쉽지 않았습니다. 나는 참 잘됐다고 생각하는 대목을 미련없이 잘라 버려야되는 부분도 있고, 표현에 있어 너무나 나태하거나 남의 흉내를 내는 등의 구태의연한 부분은 사정없이 지적해 주는 것이 영 자존심이 상하였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좋은 글 벗을 찾아, 자신의 글을 객관적으로 나눌 수 있는 기회를 늘 갖게되면 글에 대해 배우기도 하고 성장할 수 있게됩니다.
그런후에 신문이나 잡지 등의 독자의 난에 계속 투고를 해보십시오. 띄어쓰기나 받침에 대해서 염려 할 것이 없습니다. 신문사나 잡지사의 편집인들은 모두가 훈련 받은 전문가들이기 때문에, 당신의 글을 어느 정도는 손을 봐주게 되어있습니다. 문제는 당신의 사상과 주장, 경험이 필요한 것입니다. 신문이나 잡지 등에 실린 글은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읽게되고, 생각게 합니다. 때에 따라서는 위로와 격려가 될 수 있고, 기쁨과 보람, 삶의 의미까지도 전달 할 수 있습니다.
위의 네가지 열거 한 것들이 제가 발견한 “좋은 글은 삶의 글”이라고 봅니다. 세월이 지나면 또 다른 방법들이 좋은 글을 쓰기위하여 발견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요근래 공해와 오염이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저는 글을 쓸 때마다, 이것이 오히려 사상의 공해와 오염이 되지 않기를 기도하면서 쓰게됩니다. 인간은 누구나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각자에게 만 주신 독특한 삶이 있기 때문입니다. 최고의 저술가이신 하나님은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능치 못할 일이 없다” 고 분명히 성경을 통해 선언하셨습니다.
지금부터 당장 펜과 메모지를 가까이 두십시오. 감동이 올 때마다 메모를 하십시오. 이미 당신은 삭막한 삶속에 좋은 글을 제공해주는 특별하고 훌륭한 작가로 변신해 있는 것입니다.
— 윤 완희, 10/24/199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