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케네디 공항의 대합실에서 조금은 흥분되고 벅찬기분으로 친정언니를 기다리고 있었다. 약 15년 만의 만남인 언니와의 해후에 첫마디를 어떻게 시작할까? 무엇을 먼저 물어볼까? 혹시 날 알아보지 못하면 어떻게 하지(?) 등의 부산한 마음으로 비행기에서 쏟아져 나오는 승객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그 사이에서 언니의 얼굴을 빨리 찾고자 안달을 했다. 한참을 기다린 후, 언니의 모습이 보이면서 우리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 우리는 금방 서로를 너무나 잘 알아볼수 있었으며 만남의 기쁨은 풍선처럼 두둥실 떠올랐다.
대합실에서 언니와 나는 참으로 오랜 만에 만난 자매의 그리웠던 포옹은 한동안 서로를 놓을 줄 몰랐다. 허나 껴안은 나의 팔 속에 와닫는 언니의 여윈 몸은, 15년동안의 언니의 삶이 쉽지는 않았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언니는 피곤해보였고 지쳐있었으며 몸은 쇠약할대로 쇠약해져있었고 정신건강은 극도의 한계 속에 다달아있었다. 예전에 유난히도 맑고 총명한 눈을 갖았던 언니의 눈빛은 왠지 연약해보이고 초조해 보였다. 그러나, 영혼 저 밑 구석에 숨어있는 그녀의 시어(詩語)들은 사춘기 때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함없을 것이라고 믿고 자꾸만 찾아다니는 내 자신을 발견하고 놀라곤했다.
어릴 적, 3살 위인 언니와 나는 키가 동시에 자람으로 사람들은 언니와 나를 누가 언니인지 구별치 못하는 것은 다반사였다. 당시 교복을 학교마다 입고 다니던 때라, 일요일이면 언니와 옷다툼을 하느라 밀고 당기며 맘에 맞는 옷을 서로 입으려다가 누군가는 꼭 울고불고하여 주일 아침에 집안을 시끄럽게 만들곤 했다. 허나 평소엔 우리는 늘 다정하게 찬송가와 한국 가곡들과 뜻도 모르는 “까타리”라는 곡을 꽤나 멋들어지게 부르곤 했다.
어느날, 여름 성경학교에 지원나온 신학생과 언니는 연애를 시작하여 곧 결혼을 하였고, 몇년 후 그 신학생의 친구와 나는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후, 우리는 미국에 건너오게 되었고 언니네는 한국서 목회를 하다가 어느 계기에 말레시아에 선교사로 자원하여 떠나게 되었다.
말레시아- 다인종(多人種), 다문화(多文化)속의 무슬림이 재정일치(祭政一致) 정책을 쓰는 동남 아시아 중의 하나이다. 언니가족은 말레시아로 떠나는 날, 한창 자라고 있는 아이들을 떼어놓는 이산가족의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말레시아는 민족주의 정책의 일환으로 외국선교사를 받아들이는 일을 제한을 하고 있으며, 그 비자 기간도 삼 개월에 한번씩 인접국가나 본국에 나갔다와야 재 발급이 되는 실정이었다. 할수없이 아이들의 교육문제로 감리교재단에서
운영하던 인우학사라는 기숙사에 청소년기의 남자아이 둘(16, 13세)을 남기고 막내(10세)만 데리고 갔다가 막내마저 추방당하여 기숙사로 형들과 함께 한국에 머물게 하였다. 허나 그것도 여의치 않아 후에는 아이들 셋이 보호자도 없이 자취를 하게 되었다.
“아이들이 다 자란 후에 선교사로 자원을 하지… 아이들을 하루 아침에 고아처럼 떼어놓고 떠나다니…?” 우리를 포함한 주변사람들의 힐책과 비난, 아이들을 떼어 놓은 죄책감과 그리움, 염려, 환경과 문화의 변화, 더위, 비자 연장등은 언니의 가슴을 날이면 날마다 재처럼 태워내고 말았다. 아이들이 보고파 한국을 가면, 부모의 사랑이 그리워 눈이 휭하게 커진 세 아이들과 잠시의 상면 후엔, 또 다시 선교지로 달려가야 만 되었다.
언니와 나는 지난 9월초 샌프란시스코에서 있었던 제일차 한인감리교 세계 선교대회에 함께 참석하였다. 세계 곳곳에 흩어져 복음전파를 감당하는 선교사들의 사역보고를 들으며, 선교지역의 상황이 어떠한지 비로소 눈을 뜨는 경험을 얻게 되었다. 각자의 상황은 약간씩은 달라도 위험과 보장없는 내일로 인해 주머니 속에는 가족들에게 보내는 마지막 유서(遺書)를 간직한 채, 선교지를 다님으로 인해 오히려 담대해지더라는 어느 선교사의 보고를 들으며 나의 기도의 부족 함을 회개 할 수 밖에 없었다.
가족을 떼어놓는 아픔을 겪으며 목숨을 내어놓고라도 흑암 속에 거하는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밖에 없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달려나간 그들의 뜨거운 가슴! “우리는 복음에 빚진자라”고 고백한 사도바울의 신앙을 본받아 그 사랑의 빚을 갚기 위해 이방의 불을 밝히는 하나님의 일꾼들과 가족, 그들의 사역을 위해 후방에 있는 나의 기도가 한시도 쉬지 않으리라는 결심을 주님 앞에 서원하였다.
100여년전, 가난하고 미개하며 온갖 잡귀신에 영이 사로잡혀 있던 한민족에게 복음의 길을 여신 하나님의 경륜이 지금도 도처에서 쉬지않고 일어나고 있으며, 하나님은 그의 종들을 불러 그 사역을 감당케하고 계신다.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 되라”고 명하신 주님의 명령에 순종한 언더우드 목사님, 아펜셀라 목사님과 사모님의 불같은 사랑의 가슴은 지금도 활활 타오르매 새삼 감사케 된다.
“언니! 세 아들을 하나님께서 오늘까지 지켜주신 것 같이, 앞날도 하나님께서 변함없이 지켜주실꺼야! 그렇지?”
“그래! 그렇고 말고…!” 선교대회 마지막 날, 각자의 사역지로 돌아가는 선교사들과 대회에 참석했던 평신도들과 목사님들의 부산한 발걸음 속에 우리 자매는 다시금 뜨거운 포옹을 하며 기약없는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이제는 음률조차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 “까타리”라는 곡이 자꾸만 머리 속에 떠올랐다.
- – 尹 完 姬, <1994년 9월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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