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버 지

아버지! 부르기만 하여도 금방 문을 열고 들어오시며 “내가 여기 있다”라고 응답하실 것 만 같은 아버지! 세월이 갈수록, 생전에 가지셨던 아버지의 꿈이 내 마음속에 소리 없이 익어가며 되살아나고 있다. 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 시절에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가난하였으며, 남으로부터 늘 속임과 이용만을 당하시던 순전한 분이었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를 상실하거나 휘청거림 없이, 평생을 남의 멍에를 대신 메어 주는 자, 베푸는 자로 최선을 다하셨던 모습으로 내 마음에 잔잔히 남아계시다. 올해로 아버지가 떠나신 지 35년이 되어간다. 그러나 왠지, 아버지의 향취와 온기를 더 가까이 느낄 수 있는 것은 연륜 탓일까?

1900년대 초, 아버지가 자라시던 시절엔 시국이 뒤숭숭하고, 대부분의 백성들이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시절이었다. 아버지는 빈농의 자식으로 소학교를 나오셨으며, 일정치하에서 17세의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가 유리공장엘 10여년 이상 다니며 살고 있었다 한다. 그러나, 객지에서 영 돌아오지 않는 동생을 형님이,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전보를 보내어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고 말았다. 고향에 돌아온 아버지는 29세의 나이에 17살 된 어린 아내를 맞이하셨다. 어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아버지는 중매쟁이를 통해 나이를 25세로 속이셨다고 한다. 결혼한지 몇 달 후에 동회에서 호적조사가 나와 호적을 대조해 보니, 어머니가 상상도 할 수 없는 늙은(?) 남편이었음이 그만 드러난 것이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속은 것이 분하여서 일주일 간 식음을 전폐하고 울면서 두문불출하셨다고 한다. 그 때문이었는지, 아버지는 어머니를 금이야 옥이야 돌보시며 무척이나 아끼셨다. 어머니와 결혼 후, 아버지는 다시 일본으로 가셨으나, 일본생활은 그리 오래 갈 수 가 없었다. 고향에 돌아가자는 어머니의 성화로, 결국 한국으로 다시 돌아와 전라도 황등면이라는 곳에 자리 잡으셨다.

아버지는 천성이 남의 일이라면, 밤을 새워가면서도 몸을 돌보지 않고 애쓰셨기 때문에, 동네에서는 ‘법 없이도 사는 최서방’으로 불렸지만, 가난에서는 도저히 헤어날 재간이 없던 분이셨던 것 같았다. 그러나, 아버지가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고부터 그 봉사와 희생은 더욱 더 빛을 발하여, 장로로서의 중직으로 많은 일을 감당하셨고, 방앗간을 운영하시는 축복도 누리셨다. 6.25가 터졌을 때, 아버지는 빈 교회를 지키며 피난을 끝내 사양하셨고, 새벽마다 주의 제단을 성실하게 지키셨다. 공산당원들이 천하를 삼키기라도 하듯이 헤집고 다닐 때에도, 아버지는 오히려 미처 피난가지 못한 이들을 찾아 돌보았다. 결국 아버지는 ‘지독한 악질분자, 예수쟁이’로 색출되어 처형 날짜를 기다리던 중, 종전이 되었다. 아버지는 폐허된 서울을 향하여 새로운 삶의 정착지로 정하셨다. 낯선 서울의 지리와 사정을 잘 안다는 분을 따라 서울역에 도착했으나,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사기와 속임수, 절망뿐이었다. 아버지의 꿈과 희망이 거센 회오리바람이 되어 어디론가 흩어져 버리고 말았다.

당시 서울거리에는 전쟁의 북새통에 부모를 잃은 아이들, 북에서 탈출한 피난민들, 가족을 잃은 사람들로 법석이고 있었다. 아침이면 “밥좀주소!”하고 외치는 깡통을 든 거지들은 끊임없이 대문 있는 부잣집들을 두드렸다. 우리 집은 비록 피난민들이 모여 사는 판잣집이었으나, 늘 거지 떼들이 시도 때도 없이 들끓었다. 아버지는 밤이고 낮이고 깡통 들고 헤매는 아이들만 보면, 데려다가 씻기고 입히고 먹이며, 그의 연고자를 찾을 때까지 수개월, 수년을 돌보셨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손과 발, 귀가 동상에 걸리어 붓고 터져있었고, 수개월 이상을 목욕도 못하고 옷도 바꿔 입지를 못하여, 온 몸이 부스럼과 이로 들끓어, 그 형상은 말할 수 없이 참혹하였다. 우리는 한 밤 중에 자다가도 불현듯, 아이들을 목욕시키고 있는 부모님의 모습을 늘 발견하곤 하였다. 아침이면, 생면부지의 남자아이가 나의 아끼는 옷을 입고 있거나, 언니, 오빠의 옷을 걸치고 있을 때는 질겁을 하던 우리의 모습이 기억으로 살아난다. 낯선 아이들이 몇 명씩 집에 들어오면, 우리 육남매 자녀들의 불평은 대단하였다. 더군다나 동네에 나가면, 아이들이 놀려대었다. “완희네 는 거지하고 산다!”

처음에 올 때는 더럽고 험상궂게 망가지고 상처난 아이들은, 일주일이 지나면, 혈색이 돌아오고, 거친 피부가 뽀얗게 변하고, 동상이 가라앉는 현상은 어린 내게 몹시 신기하게 보였다. 개중에는 몇 주씩을 묵다가, 집안의 쓸만한 책이나 옷, 그릇 등을 챙겨 가지고 도망가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한번도 그 애들을 탓하거나, 화를 내시는 모습을 볼 수 가 없었다. 오히려, 우리 자녀들과 이웃들이 화를 내면 “그 애가 필요하니까 가져 간 거야” 하시며 호탕하게 웃으셨다. 아버지의 웃음소리는 여름날의 소낙비처럼 나를 흠씬 적셔주곤 하였다.

그러나, 서울 생활은 아버지에게 견디기 힘든 고난의 나날이었다. 믿었던 이들의 속임수와 각박한 인심, 전라도 사람이라는 사회적 차별과 무시함. 자연을 떠난 거친 도시환경과 공해, 사랑하는 친척들과의 단절… 아버지는 심장병과 폐결핵에 결국 쓰러져, 병상에서 회개의 기도로 하루를 보내시곤 하셨다. 그 때 아버지가 즐겨 부르시던 찬송가가 몇 곡 있었다. 그 중에 “나 주를 멀리 떠났다 이제 옵니다”를 부르실 때면, 나는 왠지 불안해지기만 했다. 행여나 아버지가 우리를 내버려두고 멀리가시지 않을까? 그러나 아버지는 당신의 마지막 시간을 지고한 모습으로 단장하고 계셨으며, 어머니께 진심으로 용서를 구한 것이 하나있었다. 그것은 나이를 속여 결혼했던 일이었다. “내가 당신에게 몹쓸 일을 했던 거야!” 육남매 자녀들을 떠맡은 어머니의 생활고를 지켜보는 것이 아버지 마음을 견딜 수 없게 하셨으리라! 또한 아버지는 목사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섬기시던 황등리 교회를 훌쩍 떠나, 그로 인해 직분감당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에 대해 늘 애통해 하셨다.

아버지가 52세의 연세로, 하나님 품에 안기시기 며칠 전에, 천국을 오르시는 꿈을 꾸셨다. “… 어느 병원엘 갔는데, 모든 사람들이 흰옷을 입고 빛이 환하게 쏟아지는 2층으로 사다리를 통해 오르고 있었다. 나도 얼떨결에 사람들을 따라 올라 가려고 하는데 어느 인자한 얼굴을 한 분이 환하게 미소지으면서 삼일 후에 오라고 하더라…” 숨을 헉헉 몰아대시며 생명의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계시던 아버지의 얼굴에, 순간 넘치던 희열! “…! 아버지가 곧 돌아가시려나 보다!” 당시에 겨우 40세가 된 어머니의 당혹스러움과 눈물 속에서, 나는 외로움과 소외의 벼랑 속으로 한없이 추락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안 계시면, 난 어떻게 살지?”

아버지의 장례가 끝난 후, 학교에 갔던 첫날,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길가의 포플러 나무의 노란 잎새가 몇 가닥 붙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고, 집집마다 마당에는 코스모스가 씨앗을 잔뜩 가슴에 품고는 눈부신 아침 햇살과 장난질을 하고 있었다. 여느 때와 같이 개천 옆을 지나 학교 운동장을 들어서는데, 다리가 자꾸 만 헛디뎌지며 끝도 알 수 없는 허허로운 공간 속으로 한없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며칠전의 나 자신과 오늘의 나는 전혀 다른 아이인 것만 같았다. 6학년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참새처럼 재잘거리던 수십 명의 아이들이, 갑자기 찬물을 끼얹듯이 조용해지며 나를 일시에 주시하였다. 선생님도 갑자기 조용해진 아이들을 바라보다가 얼른 시선을 나에게 보냈다. 그리고 나의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주시며 “가까이 오라” 하시고는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나는 선생님 앞에 서서 그저 억울한 심정으로 엉엉 울었다. “우리 아버지는 10여 년간을 병을 앓다가 돌아가셨어요!” 나는 누구에게 라고 할 것 없이, 외쳐대었다. 불쌍한 나의 아버지. 내가 커서 아버지의 병도 치료해 드리고, 큰 효도를 하려고 했었는데… 아버지는 내가 자라기를 기다려 주지 않고, 너무나 빨리 내 손목을 놓으신 것이 못내 안타깝고 아프기만 하였다.

나의 아버지! 그분은 나라와 민족의 격동기에 한 포기의 민초로 사시다가, 아무런 흔적 없이 사라져 가셨다. 그 분은 이 땅에서 사시던 동안, 실패와 좌절의 강에서 무척이나 허우적거려야 만 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가물거리는 생명의 심지 안에서 빛을 향한 서툰 걸음을 포기치 않으셨다. 철없는 자녀들과 수십 명의 낯선 거지아이들, 전쟁의 아픔 속에 절망을 안고 살아가던 거친 이웃들에게 “하나님 아버지”의 손이 되시어, 그들을 알게 모르게 일으키시기를 즐겨하셨다. 자신은 비록 병든 몸으로 고향엔 돌아 갈 수 없었으나,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던 어린것들을 밤이고 낮이고 찾아내어 고향을 찾게 하고, 부모 형제자매들을 되찾게 해주시던 나의 아버지! 인생의 거친 광야에서 생수의 샘을 파시고, 그 자리에서 단순한 행복을 즐기시던 분. 나는 나이가 들어가도 아버지는 그 모습 그대로, 내 손을 놓지 않으셨음을 이제사 알고 감사케 된다. 아버지가 마지막 순간까지 놓지 않고 바라보시던 그 높고 먼 지평선은 어느 매쯤이었을까?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이 진해질수록, 시간의 책장 넘기는 소리가 조급하게 들려온다.

— 윤 완희, 6/7/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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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turned Birdsong

Pollution—
the roar of cars, the gas—
had driven away
the forest’s hush
and the whispers of insects
from the campground by the highway.

But after a night of rain,
morning light spilled softly,
and through the misty woods
God sent a flock of birds.

The rain washed the forest clean,
and suddenly it breathed again.
Their clear, chattering calls,
flying in tight formation,
cut through my chest,
echoing across the trees,
shaking the woods awake.

Those cries,
the murmurs of a returning morning,
long vanished from me,
filled my heart.

I am grateful
for the music of life restored.

—Yoon Tae-Hun, August 18,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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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새 소리

공해

자동차 소음과 개스가

고속도로 옆 캠프장 시설

숲속의 고요와

풀벌레들을 도망 가게했다

밤새 비가 내린 아침

햇살이 번지면서

안개가 자욱한

숲속에

하나님은 새 때를

보내셔셨다

비로서

숲은 숲이되고

시끄럽게 오가며

떼를 지어 대는 분명함이

내 속에

하늘을 가르며

숲을 울리는 새소리

떼짓는 소리

내 속에

멀리 사라져갔던

아침의 소리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 윤 태헌, 8/18/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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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ift II”

The autumn scenery at Drew University in New Jersey was a quiet watercolor— a deep, vivid painting set in the calm beauty of the countryside. When the bright red and yellow leaves fell in flurries with each passing breeze, the young children of seminary students—children of every skin color— rolled around in the piles of leaves like little squirrels. Their young mothers, too, would often gaze up at the sun‑soaked autumn sky with dreamy eyes, as if trying to grasp a new heaven running toward them from far beyond the horizon.

One day, as autumn deepened, we celebrated my eldest daughter Sena’s sixth birthday. I had invited the neighboring seminary children to our student apartment and was busily preparing for the party. There was still nearly an hour left, when I heard a rustling sound outside. Curious, I looked through the glass door— and there was Sem, who adored Sena, already waiting at the door.

The child held something carefully in both hands, murmuring excitedly to himself with a flushed face. As I watched him with interest, I saw that he was holding a small glass fishbowl shaped like a swan. Inside the clear, rippling water was a single strand of seaweed and a bright red goldfish darting energetically between it. It was surely meant as a birthday present for Sena. Sem kept imitating the fish’s little mouth and could not take his big eyes off it— his whole expression pleading to place it into Sena’s hands as soon as possible.

I hesitated—should I let him in early, or ask him to wait a little longer? Just then, with a loud clatter, a group of children came thundering up the stairs. All the seminary kids from the student apartments had arrived. The moment they saw the bowl in Sem’s hands, their eyes widened, and they jostled one another, each insisting on being the first to see it. Sem, not wanting anyone else to look at it, turned away and wrapped both arms protectively around the bowl.

After finishing the last of the preparations, I placed Sena—dressed up like a little princess— in the center of the doorway. When I opened the door wide to welcome the children, they all pushed forward at once, trying to be the first inside.

At that instant, a sharp crash rang out, followed by Sem’s piercing scream echoing through the hallway. The children had pushed too hard, and Sem had dropped the bowl. In the blink of an eye, the glass swan shattered into pieces, and the red goldfish—just moments ago swimming freely and joyfully— flipped once into the air and fell helplessly onto the cold cement floor. Broken glass, spilled water, a strand of seaweed, and the gasping red fish lay motionless before us in stunned silence.

“That was for Sena!” Sem’s choked cry broke the stillness. Sena’s face crumpled in confusion, and the children around us fell speechless. The joy and excitement that had filled Sem moments earlier had vanished—replaced by sorrow and anger. He wiped tears from his eyes for nearly the entire party.

This year, Sena turned twenty‑three. Even if we were to meet Sem—now a young man—on the street, we would not recognize him. But the memory of his broken gift returned to me one day, untarnished by time.

It was during one of the hardest, most bewildering seasons of my life— when people turned their backs, truth seemed nowhere to be found, false love shouted loudly, and exaggerated pride tried to cover the small, fragile valley of my soul. For weeks, for months, I lived with a suffocating, hungry heart, wiping away tears.

Then, through the faded forest path of memory, the red goldfish from the glass swan bowl came back to me. And it whispered that a true gift of love— even if broken, even if never delivered— remains forever in the heart of the one it was meant for. To love is a pain reserved only for the living, a flame‑like sorrow, a wildflower’s fragrant beauty.

God sent Jesus Christ as a gift to humanity. Yet at the doorway of history, He was wounded, trampled, and shattered. He thirsted, hungered, was betrayed, and was killed. And yet— a strange and wondrous thing happened. Jesus Christ, God’s broken gift, rose again on the third day, opening the door of death itself. For over two thousand years, He has brought green life to the frozen hearts of humankind, opened a door of light in the darkness, declared peace in the midst of war, and touched the sick with healing hands. And so, even today, we rise again. His gift has never once folded its wings of grace in the hearts of humanity. How deeply He must have hurt, how lonely, how sorrowful— because He loved us.

Ah— even now, beneath the autumn sky I once gazed at on Drew University’s campus, the red‑maple ache of love keeps falling and gathering on my heart. In autumn, His breath is heard deeper, closer.

Yoon Wan‑Hee, 10/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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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물 II

뉴져지 드루대학교 가을풍경은, 고즈넉한 전원의 아름다움 속에, 한 폭의 진한 수채화였다. 선명한 색깔의 빨강, 노랑 잎들의 낙엽들이 오가는 갈바람에 우수수 떨어질 때면, 각가지 피부색깔을 한 신학생들의 어린 자녀들이, 쌓여진 낙엽 위에서 다람쥐처럼 굴러대었다. 또한 그네들의 젊은 아내들은 꿈꾸는 듯한 눈매로, 하늘 저 멀리 달려오고 있는 신천지를 잡으려는 듯이, 햇살이 내려 쪼이는 가을 하늘을 곧잘 올려다보곤 하였다.

가을이 깊어져 가고 있는 어느날, 큰 딸 세나의 여섯 번째 생일을 맞이하게 되었다. 나는 이웃의 신학생들의 어린 자녀들을 우리 학생 아파트에 초청해 놓은 채, 부지런히 생일파티 준비를 하였다. 그런데, 아직 한시간이나 남짓하게 남아있는데, 밖에서 인기척이 부스럭거렸다. 나는 이상하여서 유리문으로 밖을 내다보니, 세나를 그토록 좋아하는 [셈]이 벌써 문밖에 와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는 두 손에 무엇인가를 정성스럽게 든 채, 상기된 표정으로 연방 벙긋 벙긋거리며 중얼 거리고 있었다. 나는 아이의 그런 모습을 흥미롭게 훔쳐보노라니, 아이의 손에는 유리로 만든 백조 모양의 조그만 어항이 들려있었다. 거기엔, 찰랑거리는 맑은 물 속에 한 가닥의 해초와, 그 사이를 빨강 색의 붕어 한 마리가 열심히 헤집고 다니었다. 아마도 세나의 생일선물로 들고 왔음에 틀림없었다. [셈]은 그 조그만 어항 속의 붕어가 입질하는 모양을 시늉 하면서, 그 큰 눈을 떼질 못하고, 어서 속히 세나의 손에 들려주고픈 듯이, 안달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그런 아이를 먼저 집으로 들어오게 할까, 아니면 더 기다리게 할까, 하고 망설이고 있는데, ‘우당탕탕’ 하는 소리와 함께 한 떼의 아이들이 계단 위로 올라 오고 있었다. 학생 아파트에 살고 있는 신학생들의 자녀들이, 다 몰려 온 것이었다. 아이들은 [셈]이 들고 있는 어항을 보자마자 눈을 휘둥거리며, 서로 먼저 보겠다면서 어깨싸움을 하고 [셈]은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태도로 어항을 두팔로 감싸안으며, 돌아서 버렸다.

나는 서둘러 생일파티 준비를 마친 후에, 공주 모양으로 한껏 멋을 낸, 세나를 문 가운데 세웠다. 그리고, 문을 활짝 열면서 아이들을 환영하자, 아이들은 서로먼저 들어오느라고 한꺼번에 좁은 문을 밀치고 들어섰다.

그 순간 갑자기 “쨍”하는 소리와 함께 [셈]의 비명이 날카롭게 아파트의 낭하를 울리었다. 아이들이 서로 밀치는 바람에, [셈]이 들고 있던 어항을 그만 놓친 것이었다. 눈 깜빡 할 사이에, 유리백조 어항은 산산조각이 나고, 금방 까지도 자유롭게 헤엄을 즐기던 빨강 색의 붕어는 공중으로 잠시 튀어 오르더니만,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힘없이 나가떨어졌다. 문 앞엔 깨어진 유리조각, 엎질러진 물과 한 오라기의 해초, 할딱거리는 빨강색 붕어가 우리 모두의 정적 속에 한동안 멈춰 버렸다. “그것은 세나 것이야!” [셈]의 목매인 울음소리가 그 정적을 깨었다. 세나도 금방 울상이 된채 당황하였고, 둘러 서있던 아이들도 말을 잊게되었다. 그토록 홀로 행복해 하며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하던 조금 전의 [셈]의 표정은, 슬픔과 분노 가득하였다. 아이는 생일파티가 다 끝나 가도록, 연신 눈물을 훔쳐대었다.

올해 세나는 23살의 처녀가 되었다. 청년이 된 [셈]을 길에서 만난다 하여도 우린 그 애를 결국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셈]의 깨어졌던 선물은 어느 날, 문득 내 삶의 현장에서 퇴색 함 없이 되살아났다.

그 날은 삶에 있어서 가장 힘들고 당혹스럽던 날이었다. 사람들은 등을 돌리고, 진실은 없다 하고, 거짓 사랑이 목소리를 높이고, 과장된 허세가 초라한 내 영혼의 골짜기를 덮어 올 때였다. 나는 몇 주씩, 몇 달씩, 참으로 답답하고 허기진 영혼으로 가슴앓이를 하며 눈물을 닦아내고 있을 때, 그 백조 어항 속의 빨강색 붕어는 세월의 퇴색된 숲길을 헤치고 찾아와 주었다. 그리고, 진정한 사랑의 선물이란, 비록 깨어졌을지라도, 아니 비록 전달되지 못하였어도, 영원히 상대방의 가슴에 살아 남아 있음을 속삭여 주었다. 사랑한다는 것- 살아있는 자들만이 누리는 아픔이며, 타오르는 불꽃같은 슬픔이며, 향내나는 들꽃의 아름다움이라며.

하나님께서는 인류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선물로 보내시었다. 그러나, 주님은 역사의 문전에서 그렇게 상하시고 짓밟히고 산산히 깨어져 버리셨다. 그 분은 늘 목이 마르셨고, 허기지셨으며, 배반 당하셨으며, 죽임까지 당하셨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었다. 하나님의 깨어진 선물이셨던 예수 그리스도는 삼일 후에, 사망의 문을 여시고 일어나시었다. 그 예수님은 지나간 2,000여년 동안 얼어 붙은 인류의 가슴에 초록의 생명을 돋아나게 하시고, 어둠 속에 빛의 문을 여시었고, 전쟁 중에 평안을 선포하시고, 병든 이들의 치유의 손길로 우리에게 함께 계시어, 오늘도 이렇듯이 우리는 다시 살아 오르고 있지 않는가! 아니, 그 선물은 영원히 인류의 가슴 속에서 한번도 은총의 날개를 결국 접으시질 않으셨다. 우리를 사랑하기에, 주님은 얼마나 아프셨고, 고독하셨고, 슬퍼하셨을까.

아, 오늘도 드루대학교 교정에서 올려다보던 그 가을 하늘 아래서, 왠지 붉은 단풍 같은 사랑의 아픔이 내 심장 위로 자꾸만 떨어져 쌓인다. 가을 속에선 그 분의 숨결이 더욱 더 깊고 가까이 들려온다.

– 윤완희 <목사관 서신-10/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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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ue Weapon”

Justice.
Courtesy.
The trained stillness of the hand.

The highest art of combat
is not the flourish of steel
but the discipline that tempers it—
a grace learned slowly,
without announcement.

For the sword is only an object,
and technique a language
too often spoken in anger.
Mastery begins elsewhere:
after the long schooling of restraint,
after the heat has cooled,
when the heart has been instructed.

Then—
not the counterblow,
but the offering.
A spoon held out
to the one who grips the blade.

Not weakness.
Not surrender.
But resonance:
the quiet force that reaches
where violence cannot.

Information, understood.
Meaning, transferred.

This—
and nothing louder—
is the true weapon.

—Yoon Tae-Hun, August 17,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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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무기

정의.
예의.
훈련된 손과 발의 고요.

가장 높은 무도의 경지는
강철의 현란한 움직임이 아니라
그것을 절제하는 수양에 있다—
천천히 배운 품위,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는 은총.

검은 단지 사물일 뿐,
기법은
분노로 너무 쉽게 말해지는 언어.
숙련은 다른 곳에서 시작된다:
오랜 절제의 도장을 지나,
열기가 식은 뒤,
마음이 길들여졌을 때.

그때—
되받아치는 일 대신,
내미는 손.
날을 움켜쥔 자에게
건네지는 숟가락 하나.

약함도 아니고,
항복도 아니다.
그것은 공명—
폭력이 닿지 못하는 곳에
도달하는 조용한 힘.

이해된 정보.
전달된 의미.

이것—
그 어떤 소란보다도—
진정한 무기이리라

— 윤 태헌, 8/17/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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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itation on a Little Toe”

At the women’s missionary rummage sale, I bought a pair of used shoes. They were navy pumps—low heels, stylish, and almost like new—so I gladly invested three dollars.

As I was choosing them, a deaconess who had been watching me smiled and said, “Pastor’s wife! You picked a good one. Actually, those were mine. I only wore them once. A relative gave them to me during my trip to Korea last year, but my toes hurt so much I couldn’t wear them.” She encouraged me as if I had made a very wise choice.

After many years in the parsonage, I’ve grown used to wearing whatever clothes or shoes come my way rather than buying things that fit perfectly. If shoes were too big, I stuffed cotton in the toes; if they were too small, I squeezed my feet in anyway. If clothes were too big, I altered them; if too small, I stretched them. And people still complimented me as a “pastor’s wife with good fashion sense,” which I suppose was something to be grateful for.

But these shoes defied all my usual tricks. Day by day, they pressed harder on my left little toe, showing no sign of mercy. At church, whenever someone noticed the navy shoes and said, “They look great on you!” the pain would disappear for a moment. But as soon as no one was watching, I limped, unable to walk straight. Eventually, I decided to give up on them—because even when I wore other shoes, my toe still hurt.

So, for the first time in my life, I went to a foot specialist. The Jewish doctor, who looked to be nearly seventy, welcomed me, saying, “Foot problems are rare among Asians. Even Asian doctors don’t specialize in this field. You’re a rare patient!”

I poured out all my suffering—how painful it had been, how long I had endured it. The doctor smacked his lips as if unimpressed. Then, without a word, he took out a small knife and sliced off the corn on my little toe as casually as cutting a radish. I was so shocked by his abruptness that I nearly screamed. But amazingly, the toe that had been excruciating to touch just moments before suddenly felt no pain at all.

For one quick cut and a single bandage, I received a hundred‑dollar bill—but when I walked out of the office, my steps were light, and I even found myself whistling again.

In life, I often carry the same kind of “corn” in my soul—small pains that grow because I stubbornly force my life into shoes that don’t fit, relying on my own experience and common sense. Eventually, I lose my spiritual balance and stumble.

But how grateful I am that I can always go to the Lord, the Healer of all diseases. With one sharp ray of righteous healing, He cuts away the unnecessary burdens in my soul and makes me whole again. If He had not healed me, what would have become of my wounded heart? Yet He has tended my many hurts again and again—and never once handed me a bill.

I used to think I was strong, but the pain in that tiny toe showed me how fragile I really was—unable even to walk properly. Now, no matter how hard I press or pinch it, my little toe doesn’t flinch. Only now do I realize how much quiet peace that tiny part of my body had been giving me all along, hidden inside my shoe. And I am deeply grateful.

— Yoon Wan‑Hee, 10/22/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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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가락 단상

여선교회 중고품 바자회에서 헌 신발 하나를 샀다. 곤색의 구두였는데, 굽도 그리 높지 않고 모양도 근사하고, 거의 새 것처럼 생겼기에 $3.00을 선뜻 투자하였다.

그런데, 나의 곁에서 신발을 고르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여집사님이 빙긋이 웃으면서 “사모님! 그것 참 잘 사셨어요. 사실은 제가 내놓은 것인데 딱 한번밖에 안 신은 것이랍니다. 지난해 한국방문 때, 친척 되시는 분이 선물로 사주기에 얼떨결에 갖고 왔는데, 저는 발가락이 아파서 도저히 신을 수가 없었어요.”하면서 나의 선택이 현명했음을 부축였다.

오랜 목사관 생활 속에 나는, 평소에 옷이나 신발을 몸에 맞는 것을 사서 입기보다는, 아무 것이나 생기는 대로 몸과 발을 맞춰 입고 신게 되었다. 신발이 좀 크면, 앞부리 쪽에 솜을 넣어 신는다던가, 작은 신발은 발을 신발에 약간 구겨 넣고 다닌다거나, 옷이 크면 줄여서 입고, 작으면 늘려서 입고 다녀도 ‘패션 감각이 꽤 괜찮은 사모’로 알아주니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그 신발은 나의 통념을 조롱이나 하듯이, 날이 갈수록 점점 왼쪽 새끼발가락을 압박하며 양보할 기세를 전혀 보이질 않았다. 교회에서 가끔 곤색 신발이 눈에 띌 때마다 “사모님, 참 잘 어울려요!”하며, 인사하는 집사님의 미소 진 얼굴을 마주치게 되면 순간, 아픔이 사라졌다가도 아무도 보지 않으면, 발을 절뚝거리며 걸음조차도 똑바로 걸을 수 없는 형편이 되어 버렸다. 나는 결국 그 신발을 포기하기로 작정하게 되었다. 왜냐면, 이제는 다른 신발을 신어도 발가락이 아파 걷는데 지장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할 수 없이 난생처음으로 발 전문 의사를 찾게 되었다. 연세가 70이 가까이 되어 보이는 유대인 의사는 “동양인에겐 발병이 거의 없어, 이 방면엔 동양인 의사들도 거의 없다”며 보기 드문 동양인 환자를 환영했다. 나는 의사 앞에서 그 동안의 통증과 괴로움이 얼마나 컸는지를 일일이 호소하였다. 의사는 나의 장황한 설명에 입맛을 ‘쩍’ 다시었다. 그리고 아무 말없이 조그마한 칼을 꺼내어 새끼발가락에 생긴 콘을, 무우 베어 내듯이 ‘싹둑’ 잘라내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의 무례한(?) 행동에 깜짝 놀라서 하마터면 ‘악’ 하고 비명이 터질뻔하였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조금 전까지 만 해도 건드리면, 그토록 아팠던 새끼발가락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전혀 통증을 느낄 수 없었다. 새끼 발가락에 칼 한번대고 반창고 하나 붙여준 덕으로 이 백불 짜리 청구서를 받았지만, 의사 사무실을 나올 때는, 가벼운 걸음걸이 속에 휘파람까지 되찾을 수 있었다.

나는 삶의 현장에서, 새끼발가락에 생겼던 콘의 아픔을 내 영혼 곳곳에 갖고 살 때가 종종 있다. 평소의 내 경험과 상식을 가지고 억지로 신발에 발을 맞춰 신고 다니는 고집을 부리다가, 끝내는 영혼의 중심을 잃고 뒤뚱거린다. 그러나, 얼마나 다행인지! 언제든지 만병의 치유 자이신 주님께 가서 고하기만 하면, 칼날 같은 의로운 치유의 광선이 내 영혼의 군더더기들을 순간에 수술해 버리고 아물게 하지 않던가? 만약 그 분이 치료해 주지 않았더라면 나의 상처난 가슴은 곪아터져서 지금은 어찌 되었을까? 그러나 그 분은 그 많은 상처를 시시때때로 치유하시고, 한번도 치료비를 내라고 청구서를 내 앞에 내밀지도 않으셨다.

내가 잘나서 사는 줄 착각하고 있던 나는, 그 조그만 발가락의 아픔 때문에 걸음조차도 제대로 걷지 못하던 연약한 자가 아니였던가? 그러나 이제는 아무리 눌러보고 꼬집어 보아도 꺼떡이 없는 나의 새끼발가락. 한 몸안에 있어도 그토록 그윽한 평안함을 신발 속에서, 평생 누리고 있었음을 이제사 깨닫게되니 참으로 감사치 않을 수 없다.

— 윤 완희, 10/22/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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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cono

Through an open window
it slips in softly,
comes in
and sits down.

A small campsite
fills an empty space.

Our footsteps,
our voices,
raise a house of canvas.
We light a fire.

The sound of a car engine
fades into sand.

I think of my younger sister,
wrapping native ginkgo seeds,*
her thin hands
past the forty-five threshold.

Life
is becoming familiar with soil.
The more we forget, the more we rise,
and an unnameable sickness
barks its color.

Even in the Pocono mountains,
why are there no insect sounds—
is it because carrion bait
and pesticides have soaked in?

Morning, too,
comes relentlessly
through the window.
And the rain
was still falling.

* In Korea, native ginkgo seeds are simply the seeds of the ginkgo tree (은행나무, eunhaeng-namu), which is extremely common throughout the country. You’ll see these trees lining streets, parks, and temple grounds.They are the seeds from the female ginkgo tree, called 은행 (eunhaeng). Inside the foul‑smelling fruit is the edible ginkgo nut, called 은행알. These nuts have been used in Korean cooking for centuries.구운 은행 (roasted ginkgo) — a popular snack in fall and winter (rice porridge) — sometimes includes ginkgo (rice cakes) — added for flavor and color 전골, 탕 (hot pots and soups) — used as garnish or added for nutrition Ginkgo nuts are nutritious, but eating too many can be harmful, especially for children. Koreans usually limit the amount.

—Yoon Tae-Hun, August 16,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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