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세계는 편견과 인종차별 그리고 여성차별로 인해서 공동체의 비인간화 문제에 당면하고 있다. 비인간화 된 사회를 인간화된 사회에로의 변형을 연습하는 것이 세레받은 주의 제자들이 해야될 사명이라 하겠다. 성화(聖化, SANCTIFICATION)는 의롭다 칭함을 받은(稱義化, JUSTIFICATION) 사람이 완전(完全, PERFECTION)을 향해 나가는 과정(過程, PROCESS)을 말한다. 그리스도인의 성화를 향한 변형연습이란 바로 사회속의 교회가 새로운 공동체로 늘 생성하여 변화되는 과정가운데 늘 남아있임을 뜻한다. 따라서 거룩하게 됨의 핵심인 경건(敬虔, PIETY)은 종교훈련이 아니고 만다. 이것은 교회내에서의 ‘모인 교회’의 ‘더불어 사는 모습’ 뿐만 아니라, 사회내에서의 교회의 ‘흩어진 교회’의 ‘더불어 사는 모습’을 갖고 계속 변형에 임한 모습이며, 그속에 확대된 천국 가정을 볼 수 있다 하겠다.
인종차별은 편견(偏見)의 극대화된 형태이다. 편견이란 인종차별의 또 다른 형태로서 문자그대로 해석한다면, ‘미리 판단을 내린 것(속단, 速斷),’을 말한다. 대부분의 편견은 사실에 입각하기 보다는 전통과 고정관념과 사실과 거리가 먼 신화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자만(自慢)이 한 인종의 긍정적인 발전을 가져온다 그러나 자만은 때로는 다른 사람을 향한 자신의 우월감으로 인도한다. 의견과 추측도 표면적인 것과 전해들은 것과 부정확한 정보를 통해서 편견으로 인도할 수가 있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소간 어느정도의 편견을 갖고 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소식들이 때로는 잘못되여 있고 충분치 못한 경우가 너무도 많다. 또한 정확한 정보를 받았을 때에라도 보통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모양으로 수정하여 전달하기를 좋아한다. 따라서 인종편견이 계속됨에 따라 그 정보가 사실과 상반대는 것일 지라도 그것은 인종차별주의가 되여버리고 만다.
이러한 인종차별은 교육이나 이성으로 없애 버릴 수가 없다. 편견은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일 수가 있다. 그러나 인종차별은 다른 인종들을 향하여 질적으로 열등한 취급을 함으로 자신의 인종을 우월한 인종의 정당화하는 의도적인 시도를 말한다. 인종차별주의자들은 환경적인 것보다는 그들의 우월성을 유전성을 따져서 그 우월성을 설명하다.
결국 인종차별과 여성차별은 인간을 소외 시키고 공동체를 비인간화 했다. 소외된 사회는 서로의 상관 관계로 부터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준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개인의 상관적 존재는 무엇이며, 상관적인 사회인 교회 공동체의 모습은 어떤 것이며, 또한 교회 공동체 내에서 어떻게 의식화된 개인이 교회 공동체 인간화를 위하여 즉 어떤 변형 연습해야 하는가를 보고, 이러한 교회 공동체가 사회 내에서 맺고 이는 관계속에서 책임적인 실체로서의 생성 공동체를 살펴보겠다. 끝으로 오늘의 비 인간화 원인들 가운데 심각한 문제 두개가 한인 이민사회와 그 가정 특히 이중문화가정과 깊은관계가 있다고 사려되여, 성차별과 인종차별을 선택하고, 이 둘에 대한 생성 할동을 이해하는 신학적 도움을 갖고자한다.
1. 하나님의 공동체를 향한 상관적 자아(相關的 自我)의 신학
교회생성(敎會生成)을 향한 변형연습(變形縯習)은 교회가 사회의 실체에서 공동체의 실체로 생성되기를 바라는 변형과정으로서 그 본질상 영원한 변형연습으로 남는다. 이것을 신학화하는 것은 과정신학적 관계성을 관찰할 때에 도움이 되리라고 확신한다. Marjorie Hewitt Suchocki의 God Christ Church 1 를 중심으로 관계신학을 살펴보고자 한다.
상관적인 세계속에서 사랑과 신뢰 그리고 희망을 향한 능력이 하나님이다. 공동체의 필수 요건은 대화(교통)이다. 그 대화는 한 시간의 정점에서 갖는 ‘보통 감각’을형성하는 생각의 형식을 사용함에 의존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계신 세상 속에 있는 실존을 표현하는 한 방법이 신학이라고 한다면, 그 신학은 바로 이러한 관계적인 언어속에서 표현될 것이라 본다.
우리의 내적 실체는 외적인 실체를 통해서 이해된다: 자신 밖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관계들은 스스로 만든 규약과 자기이해속에서 필요불가결하게 연결되여 있다. 외적 실체는 관계를 통해서 내적인 것이 된다. 환경이 개인을 이루어 간다면 개인도 환경을 또한 이루어 나간다. 계속되는 역사는 역사 속의 예속적인 활동들 뿐만 아니라, 택하는 자와 해석자에 의해서 그 모양을 갖추어 나간다. 이를 위한 정체성은 한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외적인 것 이상이다. 이 정체성은 그 자신을 넘어서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따라서 주고 받는 관계성이란 우리가 우리로서 존재해 있음을 향해서 종합됨을 말한다. 그러므로 관계는 실존을 존재속으로 밀어 넣는다. 한번 이루어짐을 갖으면, 그 새로운 존재는 미래를 향해 관계를 필요로 한다. 관계성들은 실존하는 객체의 처음과 끝인 것이다. 하나의 개체속으로 많은 관계를 뭉쳐들어가게 하고 또한 가까운 장래 속으로 통일되도록 밀어내는 힘 속에 관계적으로 다가오는 활동력 안에 위치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다. 이와같이 종합하는 관계들의 과정이 실체를 생성한다. 이러한 과정이 역동이요 새로운 관계들을 부여하고 새 종합들을 이루고, 새 실체들을 생성한다. 이러한 관계적 실체는 인간 실존에 의해서는 거의 피곤해지거나 고갈되지를 않는다. 과정은 단순히 인간 조건의 특권이 될 수 없다. 과정은 모든 실체를 향해서 근본적이다. 변화는 실존으로 스며들어 번져나간다. 변화는 관계함의 기능이다. 만일 관계함이 인간 실존 속의 변화의 열쇄라면 그리고 인간의 실존이 세상과 더 넓은 우주와 낯설지 않다면, 그러나 확대된 지배의 한 부분이라면, 왜 관계함이 모든 변화의 열쇄가 않될까? 우리의 몸을 봐도, 7년이면 몸의 모든 세포가 전부 바뀌는 것은 우리몸의 공간 속에서 변화의 끊임없는 과정이 자리 잡고 있다는 말이다.
과정의 형태
통일의 새 양식이 현재를 이룬다. Alfred North Whitehead는 분리된 개체가 ‘실제 경우들'(實際 境遇, ACTUAL OCCASIONS)을 갈라놓는다고 명명했다.2 여기서 ‘실제’라는 말은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것들을 가리킨다. ‘경우’란 이 실체가 일어나고 있음이나 사건임을 의미한다. 실존의 개체(個體)가 ‘실제 경우’이며, 그것이 부분으로 속해있는 전체를 위한 것 만큼 자체를 위한 어떤 것을 말한다. ‘실제 경우’가 되여가는 과정은 다음과 같은 일련의 복합 그림을 통해서 설명될 수가 있다. 다음 면의 [도표 I]의 그림은 단순한 3 개의 ‘경우’를 보여주고 있다.
‘개체의 경우’는 그 자체의 많은 영향들의 복합 통일인 것임을 그림을 통해서 알 수가 있다. 따라서 A, B, C 의 3 ‘경우’는 다음과 같은 복합 영향들로 형성됨을 알 수가 있다.
‘개체의 경우’가 이미 정체의 궁극의 통일속으로 협동된 얼마간의 영향들을 나타냄을 알 수 있다. 이 세개의 활동력의 객체가 각각 성취가되고 나면, 개체마다 영향력을 소유한다. 그 영향이 형성된 개체의 내용과 통합적으로 연결된다.
Note #3 Note #4

[도표 II]의 A는 자체의 성취를 위해서 m-n-o-p를 통일을 향한 반복을 위하여 밀어 나간다. 한번 자기형성이 할용되고 나면, 창조적 활동력은 [도표 III]의 그림에서 보듯이 타자의 형성을 향해서 밀고 나가는데 전환적인 효과를 갖는다. 활동력의 모든 단위는 방향량 효과(方向量 效果, VECTORAL EFFECT)를 가지고 있다. 이것이 실존의 주제에 초월적(SUPERJECTIVE) 성격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바로 화살표가 보여주듯이 그 자체를 넘어서 밀고 나가는 태도라 볼 수 있다. 이 화살표는 각 단위에 그저 붙어 있는 모습이라기 보다는 송달(TRANSMISSION)의 과정 속에 있는 단위인 것이다. 실제 경우는 그 자체 안에 있고, 타자를 향해 형성되여 가는 것이다. 그 주관됨이 세계를 향해 제공되여 진다. 단위가 됨의 역동성들이 무엇일까? 각각의 지나간 경우는 그 자체 과거의 통일임으로 실존의 형성되는 경우는 자체의 과거를 모두 통일 해야만 한다. 즉 A, B, C의 경우들을 통일 해야한다. [도표 IV]에서 보듯이 A, B, C의 결합은 새 주제를 생성하는 시작인 것이다. 새 경우의 시작은 전체 과거의 감정이다. 타자를 느끼는 감정이 형성의 각 순간을 제정한다. Whitehead는 타자를 느끼는 감정을 타자의 터득(PREHENSION)이라고 부고 이를 또한 육체적인 기둥(PHYSICAL POLE)이라고 불렀다. 다른 사람의 계산에 넣는 것이다. 새 경우는 이와 같은 육체적인 기둥과 A, B, C의 터득들의 시작이다. 결국은 통일이란 많은 것이 하나로 화합한 것을 말한다. 조화는 그 양립성(호환성)에서 떨어져 나올 때 가능할 수가 없다. 양립성은 아마도 각 경우가 소유한 공통되는 요소를 통해서 느껴 질 수가 있다. 과거 조화스러움을 양도하는 새로운 요소들을 소개함을 통해서도 양립성은 느껴질 수가 있다. 어떤 경우에라도 선택함은 일어난다. 이 선택함은 단위의 형성을 향한 창조성의 근본적인 내면의 과정이다.
선택의 관심은 먼저 과거의 유동이라 할 수있는 단순한 형식 속에 있다. [도표 III]의 그림을 보면, 질적인 p가 과거로 부터 유동해서 양립성의 더 높은 차원으로 나간다. 이러한 모양으로, p는 거의 과거의 요구의 유화(宥和)이며, 3 단위들이 반복을 시작하면, p는 3 단위들의 요소가 되어서 새로운 경우 속의 재현(再現)을 위해서 선택되는 것이다. 이 때 p는 A, B, C의 요구를 조화 시키는 한 방법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관계적 실존의 역동성은 언제나 새로움이나 단순한 과거를 넘어서는 운동을 포함하게 될 것이다. 과거는 결코 단순히 반복될 수가 없다. 이러한 경우가 과거의 반복된 요소들을 한정하는 상황의 경우 뿐 만 아니라, 과거의 부분들을 제거하는 화합화의 대단한 과정의 사실 속에서도 보인다. A는 질적인 p가 반복되는 것처럼 새로운 경우 속에 반복되는 것이나 또 다른 질들은 무엇일까? 양립에 관하여는 과거를 움직여 나가는 대단한 과정 속에 반복된 A가 부인되가는 것이다. 이러한 Whitehead가 말하는 ‘부정적인 터득들'(NEGATIVE PREHENSIONS)은 효력이 없는 것이 아니다. [도표 IV]에서 보듯이 효과(效果)들의 일부가 바로 먼저의 주위 환경의 상실과 먼저의 단위의 죽음 속에 즉 m-n-o없이 일어나는 p의 재연(再演)속에 있는 것이다.
Note #5 Note #6

이와같은 부정적 터득은 인간의 경험 속에서 분명히 설명된다. 인간의 과거속의 요소는 현재의 건강한 존재와는 양립 비교될 수 없는 것으로 느껴진다. 만일 한 사람이 그것을 부정함으로 그 요소를 다루고자 한다면, 즉 그것이 실존하지 않는 것으로 가정함으로 그 요소를 다룬다면, 이 부정은 현재의 실체에 대단히 능력있는 효과를 갖게되는 것이다. Whitehead의 말을 빌려서 다시말하면, “부정적인 터득은 출생시의 상처를 견딘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억압행위에서 가장 날카롭게 보여지고 있다 하겠다.
이러한 상관적인 형태속에 터득들이라 함은 선택적인 것으로 이해되여져야 만한다. 선택함은 과거의 긍정적 부정적인 기분들이 작용하는 것이다. 긍정적인 기분들 속에는 과거의 요소의 종합물들이 반복을 위해서 선택되여진다. 또한 부정적인 기분들은 현재와 상대적인 비 존재(非存在, NONBEING)를 향해서 경우의 나머지 요소들을 추방시키고 마는 것이다. “영속적인 사라짐”이 움직임 즉 관계적 실존의 꼬리인 것이다.
만일 영속적인 사라짐이 실체를 설명할 수 있으면 또한 영원불멸도 설명할 수 있다고 본다. 만일 A, B, C 단위들의 많은 요소들이 잃어버린 과거속으로 인도되는 것이 사실이라면, 각 단위의 어느 부분은 현재 속에서 살고 있음도 사실이 된다. 이러한 실존의 방향량 효과(方向量 效果, VECTORAL EFFECT)를 Whitehead는 객관적 영원불멸(客觀的 永遠不滅, OBJECTIVE IMMORALITY)이라고 불렀다. 이전에는 A, B, C의 단위의 부분으로 느껴졌던 것이 이제는 질적 새 경우 속에서의 실질적인 삶은 영원불멸인 것이다. A의 주관됨이 m-n-o와 함께하는 p의 특이한 공동의 현존(公同現存) 속에 놓여 있는 까닭에 그것은 객과적인 것이 된다. 결정체가 부서질 때가 A의 거룩한 실체가 된다. 부서지지 않은 결정체속에서는 A는 자신 만을 위한 주관인 것이다. 선택함 속에서 A는 현재의 새로운 주관됨을 향한 객관인 것이다. A가 세계를 향하여 그의 주관됨을 제공하는 동안, 선택의 필요성은 새로운 현재에 의해서 A의 주관됨은 객관화되는 것과 결국 같은 것이다. 따라서 이 유한한 세상(THE FINITE WORLD)에는 오직 객관적 영원불멸(客觀的 永遠不滅, OBJECTIVE IMMORTALITY) 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타자를 느끼는 감정인 육체적 기둥(PHYSICAL POLE)은 통일화되는 실존을 위해서는 정신적 기둥(MENTAL POLE)에 의해서 보완되여져야 한다. 정신적 기둥이라함은 하나의 사례(事例)가 되기위한 기분들이나, 가능성을 포착하느 것으로 이해될 수 있겠다. 이러한 기분들은 경험의 단위가 과거의 기분들로 면밀히 조사해서 걸러들이는 방법에 영향을 준다고 본다. 이 기분이 원하는 모양은 한 개인의 형성을 목표한다고 볼 수 있다. Whitehead는 이것을 주관적 목표(主觀的 目慓, SUBJECTIVE AIM)이라고 불렀다. 즉 어떤 하나를 향한 통일화, 창조적인 힘인 것이다. 이와같은 자기형성(自己形成, SELF-BECOMING)을 향한 목표를 통해서, 실존의 경우는 자체의 실체(ACTUALITY)를 향해서 움직여 나간다. 이러한 목표의 힘을 통해서, 과거의 통합물들은 그들 각각의 자리로 퇴거(退去)된다. 조화는 이러한 과정의 완성으로 인해서 성취된다. Whitehead는 이러한 종국의 조화를 그 과정의 만족(滿足, SATISFACTION)이라고 불렀다. 다시 말해서 자체의 창조적 순간의 완성이라는 것이다. 창조적 활동력이 이제 한가지 더 첨가되는 창조성의 추진력으로서 우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많은 것이 하나가 된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에는, 많은 것은 하나에 의해서 성장했다. 한 새로운 다양성은 존재한다. 즉 새로운 하나의 속으로 향하는 창조적 통일를 위한 부름이다. 그러므로 이와같은 우주적인 춤은 많음에서 하나로 또 많음으로의 박자를 가지고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 속에 관계적 실존은 존재함 속으로 영속적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2. 어떤 그리스도의 몸이 될까?
J. Bernad는 다음과 같이 공동체에 대하여 정의를 하고있다. “공동체란 동질성을 가진 일정한 인구가 자연적, 생태적, 지리적으로 한정되고 근접한 지역에 살고 있으며, 역사적 유산을 공유하고 있고, 일련의 기본적 봉사 기관을 가지고 있으며, 공동의 생활방식에 참여하고, 단일성의 의식을 가지고 협동생활을 할 수있는 여건을 갖춘 사회집단을 말한다.”7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공동성 즉 공동체 의식이나 공동체 감정이다. 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에서 하나됨을 느끼면서 ‘우리’라는 의식과, 구성원들 서로 간에 그리고 구성원과 공동체 사이에 상호 신뢰감이 있을 때 공동체는 조화와 안정, 협동과 연대감이 마련되는 것이다.8 이러한 공동체성이 전통 사회에서는 당연하 것으로 여겨졌고 그 성향도 강했다. 서로가 알고 서로가 돕고 서로가 협력하는 집단 공동체로서 그 사회는 유지되어 왔던 것이다.
F. Tonnis는 혈연, 지연을 토대로 종감적이고 인격적이며 비 공식적인 인간관계가 중요하게 작용하며 공통된 관습과 믿음에 근거하여 일체감이 마련되는 공동사회(GEMEINSCHAFT)에서, 합리적 의지와 계약에 기초하고 있고, 인간관계성이 비인간적이고 이차적이 되며 행동은 개인주의적으로 되면서 집단 결속이나 공통된 유산이 지속되기 힘든 이익사회(GESELLSCHAFT)로의 불가피한 사회적 변화에 대하여 말했다.9 역사가 발전하면서 사회구조가 공동사회의 성격에서 이익사회의 성격으로 변화되여가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E. Durkheim은 다음과 같은 주장은 F. Tonnis의 주장에 동조하고 있다. 즉 연대감(Mechanical Solidarity)에 기초하여 개인들이 그 사회의 가치, 이념, 믿음 그리고 정감들을 공유하며 잘 통합되어 있는 전통사회로 부터 유기적 연대감(Organic Solidarity)에 기초하여 동질성을 상실하고 단순히 공존을 위한 상호 의존관계 만이 남아 있는 근대사회로의 이행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한다. 10 또한 R. Redfield도 이에 동조하면서 민속사회에서 도시사회로의 이행이 불 가피하다고 주장하며, Howard Becker도 이러한 변화들은 전통사회에서 현대사회에로 옮겨갈 때 생기는 필연적인 결과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마디로 그들은 이러한 사회구조의 변화들을 공동체성이 약화되거나 붕괴되는 현상이 전형적인 사회적 양태롤 보고있다.
합리적인 의지와 법적인 제도 장치가 마련이 되여있지 않은 상태에서 오는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바탕으로한 사회 구조에로의 변화는 무질서(ANOMIE) 현상을 유출한다. 이는 공동체의 ‘더불어 삶’을 깨버리는 역할을 한다. 정치인과 국민이 함께 가지 아니하고, 남여가 서로 지배하려고 하고, 인종간에 차별이 심화되고, 타 종교인들을 적대하고, 가진자가 없는 자를 지배하려고 한다.
1) 대화 공동체가 하나님의 공동체이다.
우리가 인간의 공동체를 떠나서는 살 수 없고 공동체는 경험을 나눔으로서 공동체적 연대를 유지한다. 인간 공동체는 그공동체의 정체성과 인간화를 위하여 부단히 그 공동체가 창조하고 축적하는 경험과 지혜를 나누는 것인데 이것이 대화(對話,COMMUNICATION)이다. 현대에는 두 대화가 교육체제와 언론체제를 통하여 가장 중요하게 나타난다. 이 두체제는 그 사회의 권력구조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대화가 인간의 본질에 속하는 것처럼 신앙과 신앙의 경험을 소통하는 것은 모든 종교의 본질에 속한다. 특히 기독교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기독교 신앙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 즉 자기 대화 (SELF-COMMUNICATION)이다. 히브리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면서 고통에 신음하고 울부짖을 때, “야훼께서 … 말씀하셨다. 나는 내 백성이 애급에서 고생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억압을 받으며 괴로워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나는 잘 알고 있다.”(출애급기 3:7) 이 야훼 하나님이 커뮤니케이션의 사건은 히브리 백성의 애급에서의 탈출이라는 구원의 사건으로 이어진다. 실로 성서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 이루어지는 대화로 엮어져있다.
여기서 형성된 것이 소위 계약 공동체(COVENANT COMMUNITY)인데 이 공동체에서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과 하나님의 백성의 신앙이 완전히 소통되는 공동체이다. 여기서 단절이나 왜곡이 생겼을 때, 즉 대화(COMMUNICATION=KOINONIA=COMMUNION)가 파기 되었을 때, 인간은 하나님에게서 소외(疎外)되고, 이 관계의 회복을 위하여 제사적 매개 과정이 필요하게 되며, 여기서 고백과 용서가 관계를 새롭게함에 필수적 요건이 된다.
2) 하나님의 대화 공동체
창세기의 이야기에서도 하나님의 창조와 우주적, 역사적 주권은 말씀으로 이루어진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그의 피조물 아담과 이브와의 인격적 대화를 실현하였고, 그들을 그의 형상대로 창조하여 인격적 대화 공동체로 혼연일체가 되게 하였다. 이것이 에덴의 인간 사이에 아무런 격이 없는 공동체이다. 이 인간 공동체에는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는 물론 인간과 모든 다른 피조물과의 사이에 대화(COMMUNICATION), 친교(COMMUNION), 그리고 평화(SHALOM)가 충만하다.
사실 이런 에덴의 공동체는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고, 하나님에게 저항하여, 즉 하나님과의 대화, 일치가 파괴되고 왜곡된 공동체, 그리고 그 결과로 공동체 내부에 대화와 일치의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이해되어야 한다. 가인과 아벨의 갈등과 하나님을 대항하여 바벨탑을 구축한 인간 집단 속의 언어의 혼란, 공동체의 파괴는 바벨론 제국 체제의 본질을 표출시킨 것이다. 여기서 바벨탑의 이야기는 중요하다. 하나님에 대한 배반의 상징인 바벨탑은 언어의 획일에 의한 인간 지배 체제를 의미하고 그것은 언어의 혼란과 대화의 단절이라는 하나님의 심판이 결과로 따른다.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하나님을 배반하였을 때, 그의 구원의 행위로서 하나님 자신의 대화를 먼저 시작하신다. 아담과 이브에게도 하시고, 가인에게도 하시며, 그의 백성이 스스로 소외의 소 굴레를 쓸지라도, 그리고 바벨론의 종교 정치 체제가 그의 백성을 포로로 만들어 대화를 단절 시킬지라도 하나님은 대화의 통로를 연다.
계약 공동체가 파괴되니 계약으로 인하여 공동체가 대화와 일치가 붕괴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의 역사를 위한 뜻을 예언자들을 매개로한 예언운동으로 다시 대화를 시도하였다. 여기서 하님의 역사적 개입은 정의를 위한 예언, 정의를 위한 하나님의 대화로 나타났다. 진정한 공동체는 정의없이 대화와 일치가 실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예언자 운동은 정의를 위한 대화 임과 동시에 정의는 진정한 대화를 위한 기본 필수조건 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 대화가 깨지고, 인간이 이 대화를 자기의 이익과 권력을 위하여 왜곡하여 인간 공동체가 밀림으로 되었을 때에도 하나님은 희생의 제물과 제사를 통하여 화해를 이루고, 새롭게 대화를 시작하시고, 진정한 대화와 일치를 실체(實體)로 하는 공동체를 회복한다. 이것은 정의의 심판과 화해와 용서의 말씀을 통하여 실현한다. 여기서 하나님괴 그의 백성, 백성의 공동체 안에 진정한 평화가 가득찬다.
3) 성자(聖子)의 대화 공동체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 즉 성육신(聖肉身, INCARNATION)은 가장 중요한 하나님 자신의 계시요 대화이다. 그의 인류를 향한 사랑의 표현이다. 이것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 한다”(요한 1:14)는 말의 뜻이다. 기독교의 복음은 곧 기쁜 소식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의 선교이다. 이 복음이 예수를 통하여 “가난한 이들에게 전하여지고,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가 선포되었다.”(누가 4:18-19)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는 십자가와 부활의 이야기로서 고난을 나누고 고난에 동참하며 죽음을 이기고 죽음의 세력에 승리하는 하나님의 정의의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초대 기독교 공동체의 실체로 나타났는데, 이것이 곧 친교(KOINONIA)이며 모든 것을 나누어 주는 사랑의 공동체이다. 여기에는 모든 갈등과 분열과 소외가 사라져서 완전한 대화(PERFECT COMMUNICATION)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이 사회가 공동체로 변한 모습이다. 심지어 사람들이 서로 다른 지역에서 왔을지라도 언어가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대화가 가능하게 되었다. 이것은 소수민족 이민공동체가 인종차별을 언어로 인해서 비롯되는 것을 근본에서 해결해줄 수 있는 희망적인 기초를 마련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바벨탑을 건축한 획일적인 언어를 가진, 그러나 대화의 혼동이 있었던 사회와는 대조되는 생성 공동체인 것이다. 초대 교회는 로마 제국하에서 모든 억압과 불의를 극복하고 다가올 미래의 소망인 메시야 왕국을 전하고 있었다. 그 것은 절망 중에서 소망을 전달하는 것이다. 그 내용은 “하나님은 사람들과 함께 계시고,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셔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다. 이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요한계시록 21:3-4)
우리는 위에서 기독교는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에 전통적 대화의 종교임을 증명하려 하였다. 완전한 대화가 이루어질 때 비인간화된 인간 사회가 진정으로 인간이 회복된 생성 공동체로 변형이 이루어진다. 인간이 갈등과 소외로 말미암아 그 공동체의 본질인 대화가 붕괴 또는 왜곡됐을 때 하나님은 그 구원의 역사를 대화로 이룩하신다.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 그리고 평화는 대화 즉 공동체의 실체를 목적하고 있다. 그러므로 대화는 단순한 수단적인 과정일 수 없다.
4) 성령(聖靈)의 대화 공동체
성령을 경험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뜻을 인간이 깨닫는 것이다. 성령의 일은 교통하는 역사이다. 인간의 내면과 인간 공동체에 성령은 하나님의 대화의 사건을 일으킨다. 그리하여 초대 교회에서 성령을 체험하게 되었을 때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베드로의 설교를 각기 자기의 말로 알아 들을 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도행전 2장) 하나님의 영과 그리스도의 영은 항상 예언자들과 사도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실체였고 오늘에 와서는 모든 믿는 이들이 전달 실체인 것이다.
5) 삼위일체 하나님의 대화 공동체
이리하여 기독교의 삼위일체 하나님은 대화의 존재이며, 삼위일체는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의 삼위인격 사이에 대화적 실체라고 규정지을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기의 뜻과 마음을 인간에게 소통하는 계시의 하나님이다. 이 계시의 하나님은 계시를 받아 전하는 공동체 즉 교회를 형성하고 이 교회는 대화의 공동체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는 복음을 인류에게 선포하는 것이다. 이 선포는 역사와 인간을 구원을 구원하고 해방하는 진정한 대화를 말한다. 이에는 역사를 변혁하여 하나님의 사랑, 정의와 평화를 이루는 대화이다.
초대교회는 예배와 말씀 나누기, 성례전과 친교를 통하여 대화를 실현했다. 초대교회는 인간 공동체를 완전히 새롭게하여 부자도 가난한 자도 없으며, 주인도 종도 없고, 남자도 여자도 차별받지 않으며, 유대인도 이방인도 구분되지 않는 공동체의 실체를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에서 체험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완전한 실현, 즉 하나님의 자기 계시적 대화의 실현에서 가능하게 된다.
6) 대화 상실은 죄
하나님과의 대화 상실을 관심할 때, 우리는 흔히 이로 인한 인간의 악한 행동유발에 촛점을 두기 때문에 희생자의 고통에 대하여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때가 많다. 이 고통은 아프고 또한 어디서도 도움을 받을 수 없음을 희생자들의 경험을 통해서 표현되고 있다. 이와같은 경험을 박승호 교수는 한(恨, HAN)이라고 부른다.11 그는 한을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억압과 동시에 불의한 심신의 우울증에 의한 심령의 심각한 상처로 정의 하고 있다. 죄와 폭력으로 인한 희생자들의 상한 심령 속에 참호를 파고 숨어 있는 것이 한이며, 슬픔과 도움이 없는 무력함, 소망이 없음, 분개, 미움, 그리고 복수의 의지등 여러 모양으로 그 반응이 표현된다. 또한 유대인 학살과 팔레스타인 점령지구와 인종차별의 희생자들과, 학대받는 부인들과, 이혼가정의 어린자녀들, 어린이 치한에 의한 희생자들, 일자리를 잃은 공장의 노동자들, 실직자들, 그리고 인력수출 노동자들 등의 상태에서 생존하는 이들의 영혼 속에 한은 굴절 반사됨으로 나타난다.
대화 상실에 대한 희랍의 관점은 라틴의 교리적인 관점보다는 개방되여 있다. 어거스틴 이전의 동방교회 교부들의 위대한 점은 모든 종류의 원죄를 부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죽음을 초래하는 인간의 널리 선전된 부패를 동방교회 교부들을 인정했으나, 그것이 죄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즉 그것은 죄의식 속으로 인간성을 끌어들이지 않는다고 보았다. 아담과 육신적으로 연결된 인간의 인종(人種)의 연대성을 갖고 있는 한, 그들은 인간의 의지는 자유롭고, 그 행동에 있어서도 자발적인 것이라고 믿었다.12 그러나 사방 교회에서는 다른 그림을 내어 놓았다. 인간의 타락과 죄의식은 계속해서 Tertulian까지 전승해서 내려왔고, 끝내 Augustine의 원죄 사상이 형성될 때까지 전해 내려왔다.13 Augustine은 교만과 세상에 대한 욕망을 원죄로 보았다. 스토익 학파(Scholasticism)는 인간의 자치권(자율성)과 개혁주의자들 특히 Luther와 Calvin을 대단히 강조하면서 개방을 향해서 굳고 폐쇠적인 Augustine의 비행적인 교리에 균형을 좀 이루었다. 스토익학파는 인간성에 대하여 비관적인 자세를 택하였다.
죄는 소외이다.
현대적인 관점으로 보면, Hegel의 절대관념주의는 죄를 소외(疎外, ALIENATION)로 보았다. 이러한 소외는 하나님의 영광의 연합을 위한 필요한 단계로 보면서, 죄와 구원, 소외 그리고 연합과 순한 연결을 하는 낙관적인 관점으로, 종교개혁의 비관적인 분위기를 대치시키려 도전했다. 또한 Schleiermacher의 하나님과 죄에 대한 직관적인 의견은 죄에 대한 Hegel의 이성적 개념과 대조적이다. 세계의식(WORLD-CONSCIOUSNESS) 라는 죄에 대한 Schleriermacher의 낭만적인 이해는 이상주의(관념론)의 이성적 엇갈림을 뛰어 넘으려는 힘든 일을 감당하려 했었다. 완전을 향한 도상에서의 부족함이라는 것으로 죄의 개념을 약화시켰다. 그래서 Kierkegaard는 Hegal적 소외개념이 갖고 있는 순화된 변증법적인 과정을 하나님과 죄 사이에 변증법적 불일치(모순)로 단절되여 있다고 맹렬히 비난하고 나섰다. Kierkegaard에 의하면 죄는 우리의 실존적, 비이성적, 비논리적 불합리(어리석음) 속으로 뛰어 들어감이라고 보았다. 한편 사회복음주의 운동의 대변자인 Rauschenbusch는 죄의 개인적 해석을 초월해서 집단적 수준에서 보아 이기주의(SELFISHNESS)에 기초한 사회무질서로 보았다.
요근래의 신학적 동향을 보면, 죄에 대한 일방적인 이해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보게된다. 여성 신학자들과 해방신학자들은 남성지배 그리고 개인주의적인 전통적 죄 이해를 거절하고 있다.
Valerie Saiving은 Reinhold Niebuhr의 죄의 개념 14 이 남성 중심의 해석 이라고 반대하고 나섰다.15 Saiving에 의하면, 교만은 남성의 죄이지 여성의 것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여성은 다른 문제로 고난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즉 하찮은 일, 미혹 당함, 산만(장황), 조직중심(촛점)의 부족, 자신의 정체를 정의하는 문제를 남에게 의존함등 이라고 보고 있다. Saiving은 여성이 다른 방법으로 얼마든지 죄를 범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은 일반적으로 교만이 부족함으로 고통을 받고 있으며, 낮은 자존심으로 고난받고 있고 더우기 자기 독단성이 부족함으로 고난을 받고 있다고 보았다.
남미의 해방신학의 대표적인 인물인 Gustavo Gutierrez는 서양 신학자들이 보편적으로 갖고있는 죄에 대한 배타적 개인주의적 해석을 반대한다.16 그에 의하면 죄는 세가지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1) 죄는 억압받는 자 특히 가난한 자를 미끼삼아 이용하는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억압이라고 보았다. (2) 죄는 역사 속에 억압받는 사람들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지을 수 없도록 하는 역사적 결정주의이다. (3) 죄는 하나님과 이웃과의 친교를 파괴시키는 행위이다. 특히 이 죄를 Gustavo Gutierrez는 영적인 죄라고 불렀다. 그는 주장하기를 이 세가지의 죄가 서로 연관 되어 있기 때문에 죄의 해석을 단순히 하나님 앞에서의 개인 행동으로 보는 잘못의 가면을 가차없이 벗겨버리고 만다고 보았다.
Saiving이 죄라고 일컫는 하찮은 일, 미혹 당한, 그리고 낮은 자존심 등을 죄로 보았으나, 박승호는 이를 부인하고 있다. 박승호에 의하면 죄는 의지작용(VOLITION)이 된다고 보아, Saiving이 말하는 여성의 죄들은 여성의 한(恨) 17 이지 죄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따라서 죄는 억압하는 죄인들의 결단 행위이며, 한(恨)은 죄로 인한 희생자들의 고통인 것이다. 그러므로 여성들의 산만, 하찮은 일등을 여성의 죄로 보는 것은 잘못 명명한 것이다. 또한 여성의 조직중심이 부족한 것은 죄가 아니라 바로 여성의 한(恨)인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죄와 한(恨)에 대한 합당한 분석이 세계 치유를 당길 수있는 지름길 임을 증명한다고 보겠다.
같은 맥락에서, G. Gutierrez가 말하는 죄의 사회적 역사적 차원이 잘못 선정되였다고 박승호 교수는 말하고 있다.18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억압과 역사적 운명론들이 억압받는 자들의 인간적 가능성을 성취에 대한 방해물로 보았지만, 박승호는 이를 죄로 보지 아니하고 한(恨)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좀더 정확하게 표현할 용어가 부족했던 G. Gutierrez가 피억압자의 한(恨,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억압과 역사적 결정주의)과 억압자의 죄(하나님과 다른이들과의 친교를 파괴함)를 섞어버리는 결과로 죄의 내용이 분명해질 수없는 결과를 만들고 말았다. 죄와 한(恨)의 분명한 구분이 없이는 개인의 의식화와 비인간화된 사회의 인간화인 생성공동체화는 불가능하게 된다. 한(恨)은 풀어 주어야할 조건이 되어야할 것이나 잘못 선정된 죄로는 눌린자의 회개의 제목이 되기 때문이다.
그동안 죄에 대한 교리와 신학적 개념을 교회가 발전 시켜왔으나, 죄로 인한 희생자들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박승호는 이러한 교회의 모습을 비 그리스도 적이라고 지적하고 있다.29 가난한자와 유린된 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려면 우리는 죄인과 희생자의 양면에 선 관점으로 부터 세계의 문제들을 조명해 볼 수 있는 알맞은 분석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한(恨)의 개념이 희생자의 쪽을 보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를 가질 때, 회개와 인간화와 구원에 대해서도 신학적인 개혁이 있어야할 것이다. 억압자에게만 촛점을 둔 회개는 눌린자/희생자를 위한 용서의 교리로 완성을 이룰 것이고, 박해자를 위한 칭의(稱義)의 교리는 피억압자를 위한 정의(正義)의 교리로 다시 기술되어야 한다. 따라서 죄인을 위한 구원의 교리는 죄로 인한 희생자들을 위한 ‘한(恨)의 해결’의 교리로 완성이 되어야 할 것이다.
죄와 한(恨)은 함께 섞여 있는 복합적인 실체인 것을 잊어서는 않된다. 죄와 죄의식이 압제자에게 속해있는 동안에 한(恨)과 수치는 핍박을 받는자에게 속해 있다는 실체가 사실은 서로 중복되여 있다. 다시말해서 이는 한 개인 속에서 함께 나란히 존재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누린자가 누르는 자가 될 수 있고, 누르는 자가 눌린 자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때로 우리는 죄를 짓지마는 또 때로는 우리는 한(恨)을 체험하게 된다. 예를 들자면, 인종차별주의에 희생자가 성차별주의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죄와 한(恨) 그리고 억압자와 눌린자가 간의 구별을 약화 시키는 것이 결코 될 수 없다.
7)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새 대화 형식이요 대화 자체
대화가 인간의 지식에 선행한다고 Paul Knitter는 No Other Name 에서 말했다.30 이에 기초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지식에 선행한다고 말할 수가 있다고 본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과 하나님간의 대화의 실체이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과 인간사이의 대화의 진실한 형식과 내용이 되기 때문이다. 이로서 생성 공동체는 그리스도 내에서 가능한 것이다. 모든 비인간화된 사회는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향하여 생성하는 변형을 연습하는 것이 바로 신앙인의 참 모습이 되여야하는 것이라 본다.
우리가 공동체라할 때에는 다음 4 가지 요인이 구비되여야한다고 본다. 첫째는 가치관이다. 둘째는 그 가치관이 지시하는대로 그 사회에 지향하는 한 방향이 있어야한다. 즉 성취해야 할 공동의 목표를 말한다. 셋째 그 사회에 사는 이들에게 공통된 생활의 모습이 있어야 한다. 넷째는 공통언어이다. 즉 공동체의 신앙고백이다.
기독교는 이 공동체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가진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류 전체의 구원에 관심을 갖고 있으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인류의 구원이 될 저들을 담고 있는 인류 공동체의 구원이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 뿐이 아니다. 하나님은 전 인류 공동체의 구원을 이룩하시기 위해서는 그가 선택한 작은 공동체들을 통해서 이룩하신다. 그리고 교회는 스스로를 이와같은 선택된 소수로 이룩된 공동체라고 믿고 있다.
문제는 오늘의 인류 공동체는 와해 직전에 있다는 여러 징후를 보여 주고 있다는 것이다. Charles Reich는 Greening of America (의식혁명) 의 서두에서 다음과 같이 미국사회를 일곱가지로 특징을 지었다. (1) 혼란, 부패, 외식, 전쟁, (2) 가난, 그릇된 중요성 차례, 일부 특권자들에 의해 자행되는 입법, (3) 견제할 수 없게 된 기술 문명과 환경 오염, (4) 민주주의와 자연의 소멸, 대중의 무력화, (5) 일과 문화의 무의미성, (6) 공동체의 부재, 그리고 (7) 자아상실등으로 규정 지었다. 이것은 미국 뿐 만 아니라 지구 어디든지 이런 위기감이 존재한다. 가치관의 충돌, 방향감각의 혼란, 언어의 불통, 생활 모습의 혁명등이 오늘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식민지의 혁명, 대중의 혁명, 문화 혁명, 성의 혁명, 여성 혁명, 학생 혁명, 교육혁명, 종교 혁명 등등 인류 공동체는 일대의 혼란에 빠져 있다. C. Reich가 공동체의 부재라고 본 것은 바로 분석한 것이라 본다. 이와 같이 인류 사회안에 위치하고 있는 교회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 공동체성을 잃어버리고 만 것 같다.
3.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살까?
1) 새 공동체는 생성 동동체
인류는 새 공동체를 모색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가치관도, 지향하는 방법도, 생활 모습도 그리고 언어도 완전히 다른 공동체가 모색되어야 한다. 물질이 아니라 사람이 가치의 중심이 되고,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바르게 사는 것이 목표가 되고,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창조하는 것이 생활 모습이 되는 그런 새 공동체가 탄생되어, 옛것을 파고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이는 옛 것 속에서 새 것의 소망이 싹터 오르는 것은 없을까?
요즈음 모든 종교와 사상들이 다 인본주의적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기독교가 절대타자에게서 해방받는가 하면 맑스주의도 교조적인 국가공산주의에서 탈출했다. 여성들은 그 무서운 전통에 도전하면서 자신의 인간화를 위하여 사투하고 있다. 그 밖에도 새 공동체 실험운동이 전 세계적인 운동으로 번져나가고 있다. 이스라엘의 기브츠를 위시해서 가지각색의 공동체 생활이 시도되고 있다. 어떤 것은 종교적인 색채가 짙다. 다른 것은 순 인본주의적인 것이다. 그 공동체들의 구체적인 성격이나 생활양식은 각양각색이다. 그러나 거기에 공통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막다른 골목에 이른 산업사회를 향한 부정(否定)이라는 것이다. 이점에 있어서는 자본주의 사회 뿐 만 아니라 사회주의 사회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주의 사회도 산업을 위해서 열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 공동체의 모습을 살펴 볼 때 구체적인 모습에는 다른 것이 있으나 근본 정신적인 면에는 공통된 것이 있다. 그도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그들은 다같이 현 제도와 문화에 반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본 논문에서 시도하는 생성 공동체는 현재의 기존 사회와 교회 내에서의 새 공동체를 모색하는 것임으로 탈 사회나 탈 교회가 아닌 것이다.
이제 그 중요한 특징들을 문동환은 다음과 같이 비교했다: (1) 과거 공동체는 전통을 사랑하고 과거 지향적이다. 그러나 새 공동체는 미래 지향적이요 소망적이다. (2) 과거 공동체의 관심은 상품을 소유하는 것이데 반해 새 공동체는 사람, 생명, 삶을 소중히 여기는 영적인 가치에 관심을 기울인다. (3) 과거의 공동체는 관료주의적이어서 다스림을 받은 자 사이에 넘을 수 없는 구렁이 있은 것에 반해 새 공동체는 평등과 자유를 신조로 한다. (4) 과거의 공동체는 모든 일에 있어서 나를 문제 삼는 생의 자세를 가졌었으나 새 공동체에서는 우리라는 공동주의를 소중히 여기는 자세를 갖는다. (5) 과거의 공동체의 생활 원칙은 경쟁이라는 것이었으나 새 공동체의 생활 원칙은 협동이라는 것이다. (6) 과거 공동체에 있어선 인종 국가가 그 단위였지만 새 공동체에 있어서는 전 세계 인류가 관심의 단위가 된다. (7) 과거 공동체에 있어선 이윤동기가 그 동력이 됐지만 새 공동체에 있어선 창조동기가 그 원동력이 된다. (8) 과거 공동체에 있어선 안락이 생의 목적이었으나 새 공동체에 있어선 창조의 기쁨이 그 목적이 된다. (9) 과거에 있어선 추종과 수용이 그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이었지만 새 공동체에 있어선 자극적인 노력과 생의 축제가 요구되는 것이다.31
이상과같은 8 가지의 새 공동체의 요소를 생성공동체가 소유해야할 것이라고 본다. 이를 위한 변형연습을 진행해 나가는데에는 다음의 4가지 형성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문동환은 주장한다. (1) 자기가 속한 기성 공동체 속에서 틀린 것을 발견하고 저항하기 시작한다. 이 과정은 필자가 보기에 개인의 의식화의 과정으로 사려 된다. (2) 이 과정에서 눈이 더 밝아져 사회의 더 큰 부조리를 보게 된다. 그리고 맞서는 용기가 생긴다. 필자가 볼때 이 단계에서는 작은 생성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는 단계로 개인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의식화된 개인들이 모인 생명 공동체가 세계내의 다른 과거의 공동체 형태를 지니고 있는 공동체를 상대로 인간화 작업에 들어 간다는 말이라고 본다. (3) 맞서는 중에 뜻이 맞는 사람들을 만나 한 새 공동체의 맛을 보게 된다. 이 단계에서는 실행되는 생명 공동체를 향한 변형 연습을 통해서 자체 변형 공동체내에서 생명형성의 역동성을 체험하게 되고, 또한 작은 생명 공동체가 새 사람들을 생성해 내는 것을 보게되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다른 옛 공동체의 변형의 씨를 뿌리는 단계라고 본다. (4) 저들과 더불어 기성제도의 거대한 구조에 대항 하려다가 그것이 실제에 있어서 불가능한 것을 알게되면서 근본적으로 또 다른 가치관과 형태의 공동체를 모색하게 된다. 이 단계에서는 생명 공동체가 시도한 변형 연습의 구체적인 내용들을 수집 분석 평가 재방향 설정으로 공동체의 생명 생성을 향한 연습을 변형하는 구체적인 훈련의 단계인 것이다. 제 4 단계는 좌절이 아닌 변형연습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되는 것이라 하겠다. 다시 말해서 과거의 것 중 부정할 것은 부정하고 새 것을 요청하고 이것을 실제 실험과 적절한 평가를 통해서 새 것을 창조해 나가는 과정이 생성 공동체를 향한 변형연습인 것이다. 이 모든 것의 근본에는 대화라는 주제가 언제나 놓여 있음을 잊어서는 않될 것이다. 이 진정한 대화는 평등한 대화를 말한다.
2) 생명 동동체는 대화와 화해 공동체
대화나 새로운 인간 공동체의 구현은 누르는 자나 눌리는 자 사이의 수직적인 횡포를 무너뜨려야 가능한 것이다. 여성과 남성, 부자와 가난한 자, 우월감과 열등감, 목사와 평시도, 성차별주의, 계급주의, 인종차별주의, 교권주의에서 생기는 조직은 악하고 죄된 것으로 그 본질에 있어서 아주 횡포적이다. 눌리는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정체성(의식화)과 수평적인 횡포(신뢰에 관한 문제)를 극복할 세력을 발전시키기 시작할 때, 결국 그들은 수직적인 횡포가 있는 사회와 교회의 구조도 변하게 될 것(지도력에 대한 문제)이라고 생각된다.32 이와같은 인간 삶의 새로운 형태는 누르는 자와 눌리는 자들을 편견되고 비인간화된 무리들의 구조로 부터 해방 시킬 때, 탄생될 수 있다.
생명공동체를 향한 신학은 따라서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인 장벽의 문제를 관심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긍극적인 목적, 즉 모든 사람이 서로 동등한 입장이 되여 화해하는 현실에 관심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목표는 첫째 여성 자신이 여권론자가 되는 것이며, 둘째 남성들이 여성들이 여권론자가 되도록 돕는 것이고, 셋째로 그런 후에 남성과 여성이 진실한 대화의 장으로 나와 평등한 대화로 새로운 공동체를 생성하는 변형연습을 계속해야할 것이다. 그래서 세계는 여권론자(남성이나 여성)가 필요 없는 세상으로 변형될 것이다. 교회는 사회 속에 있는 최후의 단체 중에 하나로서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며 … 포로된 자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 눌린 자들을 놓아주는”(누가 4:18) 새 시대에 대한 생명있는 복음의 명령을 듣고 이 명령에 신실하게 응답하는 생성공동체이다. 그러나 아직도 세계를 위한 교회의 변형을 위해서는 새로 의식화된 개인으로 변형된 새 공동체로서 만이 이루어지게 됨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4. 생성 활동
우리가 관심하는 것은 한인 역사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성차별을 극복함으로 생성 공동체로서의 평등한 사회를 이루어 참인간화를 추구하면서 또한 한인 사회의 비 인간화의 요소인 이중문화 가정을 향한 한인사회의 잘못된 인식, 그리고 이중문화 가정 여성들의 자의식 개발에 촛점을 두어 인간화 작업을 통해서 생성 공동체를 이루고자 하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하겠다. 이것이 오늘의 한인 이민 역사를 향하신 하나님의 창조 활동이라고 사려된다. 진정한 교회의 선교활동은 비인간화된 사회를 하나님의 사람들이 평등하게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나라로 확장하기 위한 즉 하나님의 생명이 영혼과 사회 구조 마다 솟아나는 생성 공동체로의 개인의 의식화와 공동체의 인간화에 그리스도인의 창조연습이 바로 오늘의 교회의 선교적 사명이 되어야할 것이다.
1) 성 차별
모든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으며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지음 받았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 – 남성과 여성 그리고 어린이 – 에게 인간으로서의 가치와 품위를 부여하였으며, 이에 우리 인간이 서로의 관계 안에서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상호 존경하며 보살피기를 원하신다. 우리의 신체와 성은 하나님께로 부터 받은 귀한 선물이다. 따라서 성 행위는 – 책임적이고 신실하게 이루어 질 때에 – 상호 동의와 합의에 의해 자연스런 관계를 가질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성 비행과 희롱이나 남용은 인간의 가치를 짓밟을 뿐 아니라 우리의 안녕과 질서, 그리고 인간 관계 및 그리스도의 몸의 순수함을 파괴하게 된다.
교회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의 목적과 현존의 중요성을 지닌, 모든 교인들 사이에 하나의 몸을 형성하도록 창조되었다. 몸의 한 부분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상처를 당할 때, 전체의 몸에 안녕이 모독을 당하고, 가치의 수모로 인하여 지위가 더러워지는 아픔을 겪게된다. 모든 사람들과 특히 남용을 행한 사람과 당한 사람은 더 말할 필요가 없겠다. 성 비행으로 고통중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일한다는 것은 곧 기독교 공동체의 치유능력 가능성을 증언하는 것이다.
성 남용을 당한 사람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삶의 전인성(全人性)을 선포하셨고, 교회가 정의를 실현코자할 때, 치유의 능력을 허락하셨고 힘없고 눌린 자들에게 능력을 주어 압제자들을 고발케하셨다.
성을 남용한 사람들을 위해서는 – 이들 중에 많은 이들은 이미 성의 남용을 당한 사람들이다 –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저들이 저들의 상처와 남용의 행위를 회개하고 통회할 때 용서를 주셨으며, 회개를 통해 하나님과의 계약을 새로운 화목을 통해 이루심으로 진정한 변형(變形)을 가능케 하셨다.
한번 버려진 신뢰를 다시 회복하고 용서를 얻는 길은 심리적으로 재빨리 그리고 가볍게 주어질 수가 없다. 동시에 용서와 화해가 공직에 복귀되는데 까지는 확장될 수가 없을 지라도, 우리는 가장 심각한 죄인일지라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가지며, 교회와 연합하는데 까지 회복되어야 한다는 목표를 항상 견지해야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하나님의 은총을 통하여 상처를 줌과 받음 그리고 남용들을 고발하도록 위임받았고, 박해 당한 사람들을 변호하고, 교회 공동체를 화해 시키도록 위임 받았다. (마태 18:15-18, 고후 5:18-20)
성서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 공동체에 대한 하나님의 중요한 계획은 힘의 균등과 상호 의존적인 관계 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갈라디아서 3장 28절이 의하면,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고 고백하고 있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어떤 인간도 다른 사람을 압제하는 힘을 가질 수가 없다. 그러나 인간의 위대한 가치가 깨진 속에서는 종종 여성보다는 남성에게, 아이들 보다는 어른들에게 큰 힘이 부여되어져 왔다. 과거를 더듬어 보면, 남성의 비행은 종종 무시되어지거나 부인되어 왔다. 교회가 담당해야할 거룩한 사역이 모독 당했던 것이다. 생성 공동체가 위협당하고 심지어는 파손되어 왔다. 이러한 생명 공동체에 죽음을 가져오는 세력을 눈감아 줄 수가 없다. 여성에 대한 인권침해와 차별은 하나님이 현 시대를 향하신 인간의 죄악을 회개하시라는 회개로의 부르심이다. 모든 인간은 사회적 지위나 힘에 상관없이 정의와 자비를 경험하여야 한다. 이것이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며, 정의롭고 자비로우신 하나님과의 삶을 계약하는 교회에게 주어지는 축복된 소망인 것이다.
그러므로 남성과 여성의 생물학적인 외형적인 형태로 남성을 우위로 해석되거나 취급되어서는 아니될 것이다. 이는 창조의 질서를 보면은 이를 분명히 밝혀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의 본질과 의미:
(1) 성은 하나님께서 좋게(선하게) 창조하신 것이다.
(2) 성은 남과 여의 연합을 가능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3) 성은 그 관계를 통하여 서로를 존중하고 완성을 향하여 협력을 구하는 인간 공동체를 이루어 나간다.
(4) 성은 공평할 때에 조화를 이룰 수가 있다.
(5) 성이 일반적인 쾌락의 도구나 표현으로 쓰여져서는 않된다.
(6) 성은 지배자와 피지배자를 양산하는 수직적 공동체의 지배를 위한 힘의 도구로 사용되여서는 않된다.
(7) 성은 하나님의 생성 공동체를 이루기 위한 일체 화목에 반영되여야
한다.33
성서는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생물학적인 차이나 사회적 위치의 차이에 기반을 둔 인간존엄성 무시와 동등성의 무시로 인한 차별을 준엄히 심판하고 있다.
2) 이중 문화 가정을 통한 인종 화해의 단계들
오늘의 교회를 다음 5 가지의 단계를 통해서 인종화합을 향해서 그 과정을 효과있게 밟아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누가 가장 먼저 이 책임을 질 것인가? 편견(偏見)이라는 것은 오직 예외적으로 백인교회에게만 속한 전유물이 아니다. 오늘의 모든 교회 즉 모든 인종과 문화 배경이 다른 모든 교회들이 인종차별과 편협의 죄의식을 가져야 한다.
(1) 회개(悔改)
인종차별이 죄인 이상 널리 깊게 퍼져있는 자기방어적 변호 위에 회개가 먼저 있어야 할 것이다. 백인은 과거의 지은 죄를 회개해야 할 것이다. 1619년 영국령에 있던 버지니아에서 시작된 노예제도를 회개 해야 할 것이다. 네델란드 상선들이 음식과 여러가지 지하자원들을 교역하면서 아프리카에서 20명의 흑인들을 잡아다가 팔기 시작한 것이 흑인 노예제도를 탄생케 한 시초부터 회개해야한다. 이것이 마사추세추의 the Mayflower호가 도착하기 1년전의 일이다. 그러나 그후 17세기가 지기전에 유럽의 100개 이상의 상선들이 아프리카로 뱃머리를 돌려서 약 50,000명 이상 넘는 흑인들을 잡아서 짐승같이 팔아넘기면서 흑인노예제도화는 미국땅에 구체화 되였다. 이러한 과거를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 무감동과 교만의 죄가 고정관념이나 부정의(不正義) 만큼이나 심각한 죄인 것이다. 그 회개의 대상도 또한 중요하다. 마태복음 27:3-4에 보면 가롯 유다는 회개의 대상을 잘못 정한 좋은 예가 된다. 우리는 지혜와 분명한 설명으로 하나님께 회개하되, 이 땅에서는 억압하고 차별하고 박해한 대상들에게 직접 보상하는 행위가 진정한 하나님을 향한 회개가 되리라.
(2) 화합(和合)
교회는 회개를 어떻게 또한 누구에게 할 것인지를 결정할 수가 있다. 화해가 효과적으로 자리를 잡아가면 회개는 개체교회와 교단의 선을 넘어서 모든 수준에서 시작이 될 것이다. 그러나 가장 효과있는 화해가 시작이 되고 진행이 될 수 있는 자리는 개체교회이다.
화해의 목표들은 선언문 채택이나 광고나 연설 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그것은 오직 대화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지도자 뿐 만 아니라 교회내의 모든 수준과 기관의 평신도들이 참여해야 한다. 양쪽의 무리가 하나가 될 수 있도록 오해와 잘못을 회개 및 용납의 정신과 문화와 관습 이해의 좋은 길을 위한 기도회가 필요하다. 서로가 익힐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주의 지상 명령이라 할 것이다.
Christianity Today의 조사에 의하면, “인종간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먼저 무엇을 해야합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가장 많은 대답은 “서로가 서로를 알자!”였다.34 화해는 지역에 따라서 다른 지역에 비해 쉬울 수가 있으나, 죄를 용납하고 용서를 구하며, 화해를 위한 순서 절차를 밟아 나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일이 아니다.
(3) 인정(認定)
회개와 화해에는 행동이 따라야 만 한다. Atlanta의 Urban Crisis Center를 세운 Charles H. King은 말하기를,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가족에 대한 사랑을 말할 때는 사랑을 행동으로 옮겨야한다고 주장하지만, 인종차별에 대한 관심에 이르러서는 사랑이 철학적인 사랑과 입으로하는 기도의 일로 끝을 맺고 만다.”35
복합문화와 인종간의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사역에는 두가지 단계가 있다고 본다. 첫째 단계는 서로 간의 정통적 합법성을 인정해야 한다. 그들의 시설과 지도력 훈련과 혹은 예배의 다른 형식 때문에 그들을 열등하다고 취급하며는 인종화합의 근본을 파괴하는 것이 된다. 다른 인종과 소수민족을 인정하는 둘째 단계는 다른점들을 배우고 그들의 문화적 기여를 함께 축하하고 잔치하는 것이다.
타 인종과 그 문화를 인정하고 난 후의 인종간의 화목을 위해서는 보답이 따라야 한다.
(4) 보답(報答)
인종 화목이 실제화될 때에는 반드시 보답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들어간다. 효과적인 관계성장은 주고 받는데 있다. 연합의 과정이 실질적으로 진행될 때에 대단히 중요한 일은 지배문화나 인종이 소수의 관념과 그들의 기분을 잘 듣고 수용하는데 있다. 예를 들자면, 백인이 백인 되기위한 지도력은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한인도 다른 소수민족들 위에 서기 위한 지도력을 갖기 위해서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인종간의 화목은 어느 인종이 위에서고 다른 인종이 아래서는 지도력 쟁취로는 이루어 질 수가 없다.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의 특징을 인정하고 상호 보답적인 자세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집회를 함께하거나 바꾸어가면서 하는 것도 한 방법이고, 마을 음식창고나, 의복창고, 강연회나, 청소년 프로그램을 서로 나누거나 함께 할 수도 있을 것이다.
(5) 자원(資源)
서로의 합동 프로그램을 이루기 전에 지적해야할 중요한 점 한가지는 교회가 처한 사회 공동체내에 인종차별과 부정의를 대항해서 어떠한 일들을 그동안 해왔는지를 확인하는 일이다. 그리고 마을의 교회와 기관을 묶는 연합단체를 형성하여 확장해나가는 일이 매우 중요한 일이다.
소수민족 교회들의 가장 큰 문제중에 하나가 바로 자원 부족이라는 것이다. 인적자원과 재정적 자원에 제한이 있다는 것이다.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수련회에 참석할 장학금들이 부족한 것이다. 교사훈련을 위한 자금과 신학 교육을 위한 재정적 뒷바침이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일로 인종차별이 끝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상호의존적인 노력으로 만이 가능하리라 본다. 따라서 우리는 대화의 공동체로 평등공동체를 이룰 수가 있는 것이다. 소수민족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문화적인 유산은 특이한 유익이다. 따라서 이것을 가지고 창조활동을 서로 교환하면, 서로의 교회가 진정한 친교(COMMUNION)을 갖을 수가 있을 것이다. 더욱 풍요롭고 더욱 새로운 창조활동은 진정 변형연습의 마당이 된다. 즉 연국 문화 음악 미술 등등의 예술 활동을 교회 내에서 교류하면서 교육과 발표의 장소가 된다면, 생성 공동체의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과의 대화는 이웃과의 대화를 평등한 인간 관계속에서 새로운 공동체가 생성되여 나오는 것이다. 이러한 훈련이 신앙생활이 되여야 하는 것이 참 주의 제자의 모습이라 하겠다. 이것이 역사속의 진정한 하나님의 창조활동인 것이다.
[주]
1. Suchocki, Marjorie Hewitt, God Christ Church – A Practical Guide to Process Theology (New York: Crossroad, 1982).
2. Whitehead, Alfred North, Process and Reality, (New York: Free Press, 1978).
3. Ibid., p. 13
4. Ibid., p. 14.
15. Ibid., p. 15.
16. Ibid., p. 17.
17. Bernard, J., The Sociology of Community (Glenview: Scott, Foresman and Co., 1973)
18. MaCiver, R.M., Community (London: Rontledge and Kegan Paul, 1951), p. 5.
19. Tonnis, Ferdinand, Community and Society, Tr. by C.P. Loomis (New York: Harper & Row, 1957)
20. Durkheim, Emile, The Division of Labor in Society, Tr. by G. Simpson (Chicago Free Press, 1933).
21. Park, Andrew Sung, The Wounded Heart of God: The Asian Concept of Han and the Christian Doctrine of Sin, (Nashville: Abingdon Press, 1993), p. 10.
22. Moxon, Reginald S., The Doctrine of Sin (New York: George H. Doran Co., 1922) p. 40.
23. Ibid., pp. 41-46.
24. Reinhold Niebuhr에 의하면, 인간은 두려움의 상태에서는 두 가지의 반응을 보이는데, 첫째는 인간의 유한성을 부인하거나, 둘째는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를 사용할 기회를 포기함으로 불확실의 두려운 상태를 벗어나려고 시도한다고 보았다. 우리의 한계를 넘어 우리 자신을 밀고 나가는 것은 바로 인간의 유한한 한계를 부정하는 것으로 둘째 것 보다 인간에게 더욱 근본적인 죄로서, 이것을 교만의 죄로 보았고, 육체적 쾌락 속에 자신을 마음대로 빠지게함으로 주어진 자유 사용을 기권하는 것이 관능적(Sensuality) 죄라고 보았다. 이 죄는 바로 교만(Pride)으로 부터 비롯된다. Reinhold Niebuhr가 볼 때, 인간은 교만의 죄이던 관능의 죄이던 인간이 범행하려고 작정할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이 죄들은 인간에게 있어서는 피할 수 없는 것들이라는 것이다. 이와같은 기독교 역사속의 다른 관점들 속에서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죄와 구원에 대한 교리의 촛점이 죄인의 도덕적 기능과 하나님 앞에 섬이라는 것에 맞추어 진다. 여기서 죄로 인해 희생된 사람들의 구원 역사 속에서의 역할은 거의 취급되여지지 않았다.
25. Saiving, Valerie, “The Human Situation,” in Womanspirit Rising, ed. Carol Christ and Judith Plaskow (New York: Harper & Row, 1979), p. 37.
26. Gutierrez, Gustavo, A Theology of Liberation, Tr. and Ed. Sister Caridad Inda and John Eaagleson (New York: Orbis, 1973), pp. 25-37.
27. 한(恨)에 대하여 말할 때 한가지, 우리의 관심을 특히 끄는 것은 한(恨)은 수개 전문분야의 집결적 성격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심리학 사회학 철학 경제학 환경학 물리학등으로 부터 단순히 수집된 자료를 기초로 한(恨)을 전부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인간성과 창조물의 고난은 신학적 심리학적 사회학적 정치적 혹은 경제적인 것 만도 아니다. 이러한 것 중에 하나라도 감소하면 세계 고통의 실체를 해석하는데 부분적인 조각을 얻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세계의 상처를 치료하려면 모든 분야가 모두 힘을 합하여 세계의 아픔을 진단해야하고, 그 병을 고치려면 세계의 온전성(Wholeness)를 함께 다루어 나가야 만 하는 것이다.
28. Park, Andrew, Ibid., p. 13.
29. Park, Andrew, Ibid., p. 13.
30. Knitter, Paul F., No Other Name? – A Critical Survey of Christian Attitudes Toward the World Religious (New York: Orbis Books, 1986), p. 205.
31. 문동환, ‘한국의 미래 공동체와 교회’, 기독교사상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84년 1월호), pp. 74-75.
32. Cone, James, “Black Theology and Reconciliation,” Christianity and Crisis, Jan. 22, 1973, p.307; cf. also William Jones, “Toward an Interim Assessment of Black Theology,” Reflection (Yale Divinity School), Jan. 1972.
33. 김이봉, 여성신학, (서울: 도서출판 양서각, 1985), p. 72.
34. Frame, “Race and the Church: A Preogress Report,” pp. 16-17.
35. “White People Must Change – An Interview with Charles King,” Sojourners (May 1981) :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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