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삶의 옷장에는 많은 모자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모”라는 특이한(?) 삶을 사는 동안 얻어진 축복의 산물들입니다. 저에게는 수십 년을 애지중지 하며 쓰고 다녔던 저만의 모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저는 그 가장 즐겨하는 모자를 벗어야 만 되었을 때, 당황과 절망의 늪에서 신음해야 만 했습니다.
그러나, 만물의 창조주시며, 저의 삶의 최고의 디자이너이신 하나님께서는 저의 안과 밖을 바꾸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 분은 저의 삶을 새롭게 구상하시고, 재단하시어 새롭게 박음질을 하시어 “사모”라는 옷을 입혀 주시었습니다.
“이민교회의 사모”는 참으로 다양한 모자가 필요합니다. 운전사, 베이비 시터, 청소부, 전화 교환수, 비서, 상담자, 성경교사, 요리사, 방송 전도인… 그러나, 전 그 많은 모자를 내가 왜 써야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전 절대 저의 모자를 벗을 수 없어요! 저는 원치 않아요! 제발 제 나름대로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자유케 해주세요!” 근 15년 동안의 외침이며 절규였습니다. 허나, 최고의 디자이너이신 하나님께서는 저의 오랜 방황과 절망, 갈등의 늪을 건너오기까지 참고 기다려 주셨습니다.
– 탈출기 –
저는 모태 신앙 이였지만, 성년이 되어서도 구체적인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지 못하고 신앙이 하나의 인생의 필수 과목이 아닌 선택과목 중에 하나로 갖고 살았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당시에 신학생 이였던 한 남자를 만났는데, 그의 영혼 속에서 우러나오는 아름다움과 세계를 향한 비전, 왠지 다른 남성들에게서 쉽게 찾아 볼 수 없었던 고상함에 매료되어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가 앞으로 어떤 삶을 살 것이며, 그로 인해, 저의 삶도 어떻게 변화 할 것이라는 것조차도 아예 생각지 못한, 철부지였을 뿐입니다.
결혼하여 몇 년간은 누구에게나 환영받는 사람이 되고자 위장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가만히 보니 교인들의 사모에 대한 기대는 불가능의 고지와 같았는데, 겉으로는 다소곳해야 하고 모든 면에는 다재다능해야 하고 신앙 면으로는 목사님과 비슷해야 만 하는 것이 교인들의 사모에 대한 기대였습니다. 그런데, 철없는 새 각시가 교회 일에는 아는 것이 없지요, 주일이면 미니 스커트에 서울의 명동에서나 볼 수 있는 차림으로 교회를 가니, 연세 드신 권사 님들의 은근한 주의와 시선이 참으로 따가웠습니다. 더구나 새벽기도와 철야기도에 나와 은혜스럽게 많은 기도를 해야되고,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남이야 무엇을 입든 무엇을 하든 무슨 상관이람! 사모라고 할 것 못하고 살아야 될 것이 무엇이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점점 세월이 갈수록 삶 자체가 피곤해졌습니다. 세월이 갈수록 신앙이라는 쇠줄(?)이 내영과 육신을 꽁꽁 묶어 숨조차 못 쉴 것만 같았습니다.
갈수록 세상에 나가 마음껏 자유로운(?) 삶을 누리며 살지 못한다는 억울함과 분함 속에 자꾸 우울증에 빠지어 갔습니다. 세상을 향한 욕망과 꿈이 서서히 고개를 들면서 비웃었습니다. “세계 최고의 의상 디자이너- 윤 완희”로서의 가공된 화려한 꿈속에, 저의 영혼은 더욱 더 병들어 가고 지치며 마음의 파도를 일으켰습니다. 저는 하나님 앞에 가서 기도 할 때마다 눈물을 흘리곤 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라기 보다는 “목사의 아내”가 된 것이 너무나 억울하여 ‘하나님! 난 억울해요! 정말 억울해요!’라고 원통해서 운 것이 더 많았습니다. 저의 영적 상황은 사모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것도 능동적으로 할 수 없는 매우 연약하고 무능하여, 깨지기 잘하며, 남편의 허리만 잡으면, 천국의 일등 석에 얹혀 갈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 속에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는 어머니의 신앙에 얹혀 살았고, 결혼해서는 남편의 신앙에 얹혀 살게 되었습니다.
– 유아기 –
1980년 12월 2일, 저희 가족은 이민을 오게되었습니다. 당시에 3살 짜리 딸아이 하나와 함께, 아메리칸 드림을 안고 목사님은 신학을 더 하여서 주님의 사역을 감당하길 원하였고, 저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의상 디자이너가 되어야겠다는 꿈을 속으로 안고 첫발을 내딛었습니다.
남편이 Drew 신학 대학원에 입학하시게 되니, 저는 뒷바라지를 당연히 해야했습니다. 세탁소의 손바느질, 널싱홈의 설거지, 청소 등등…을 하면서, 둘째 아이도 낳고 키우고 일하면서도 힘든 줄 몰랐습니다. 남편의 공부가 끝나면, 제가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 속에, 언젠가 물고기가 물을 만날 것 만 같은 생각 속에 그날을 기다리는 세월은 빨리 흘렀습니다.
남편은 공부를 마치고 뉴욕 연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아, 엎스테이트 뉴욕의 Coxsackie에 있는 미국인 감리교회에 담임목사로 첫 파송을 받았습니다. 미국 온지 이제 겨우 3년이 지나, 귀와 입이 떨어지지도 않은 채, 한국인이라고는 전혀 없는 곳이 였습니다. 도시에서 성장했던 저는 그곳의 3년간의 생활은 마치도 귀양살이와 같았습니다. 주일에 영어로 드리는 예배는 본 것 같지도 않고, 사람들과 말과 정이 통하지 않은 상태에서, 사면이 모두 유리로 막힌 공간 속에 갇혀있는 것 같았습니다. 숨이 터질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환경 속에서 외로워하고 답답해하고 있는 저에게 친구 하나를 만나게 하셨는데, 그것은 글이였습니다. 글은 천방지축으로 살아가는 저에게 내면의 세계를 열어주는 벗이 되었는데, 그 때 난생처음 써본 단편소설과 동화가 모 신문사의 신춘문예로 입선케 한 것은 지금 돌아보면, 하나님께서는 이 철없는 것을 붙잡아 쓰시기 위해 베푸셨던 구실 이였음에 틀림없던 것 같습니다.
당시에 답답해하던 것은 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목사님도 영적으로 몹시 답답했던지, 새벽기도회를 시작하자고 했습니다. 우리는 새벽이면 교회당 불을 훤하게 켜놓고 마루바닥에 꿇어 엎드려 기도하는 훈련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게 한지 6개월만에 하나님은 어느 새벽에, 기독교로 개종한, 건축회사를 운영한다는 유대인 프랭크 호프만이라는 사람을 보내어 함께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그는 새벽마다 교회 앞을 지나가면서 ‘가서 함께 기도하라!’는 성령의 음성 속에 찾아왔노라 하였습니다.
그 다음 주일엔, 본 교회의 30대 초반 이였던 닐 어윈이, 도대체 새벽기도회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의구심 속에 찾아왔다가 매일 아침 함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들의 ‘거룩한 씨(이사야 6:1)’를 통해 이 땅의 그루터기로 삼으신다는 말씀대로, 기도의 싹은 매일 자라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새벽 기도회의 소문이 마을에 있는 7개 교회인 천주교, 개혁 장로교, 순복음 교회, 회중교회, 순 장로교, 아프리칸 감리교회 등에 일기 시작하여, 매일 새벽 40여명 이상의 미국인들이 함께 모여 찬송과 기도로 하루를 시작케 되었습니다. 교파를 초월한 벽이 무너지면서, 저희를 누르고 있던 보이지 않던 언어와 문화의 벽들도 서서히 무너져 내렸습니다.
새벽기도회의 능력은 대단하였습니다. 미국인들은 새벽 기도와 찬양의 힘 앞에 저들의 문란한 삶들이 질서를 잡으며 교회마다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100년전 있었던 영적 대각성이 그 작은 마을에서 다시 일어나고 있다고 그들은 자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뒤, 프랭크 호프만은 평신도 사역자 훈련원에서 훈련을 마치어, 현재 목사님이 계시지 않은 두 교회의 평신도 사역자가 되셨으며, 아들 넷을 둔 자동차 수리공인 닐. 어윈은 국민학교 4학년 중퇴자였으나, 그는 고등학교 자격증을 딴 후, 대학을 마치고, 지금은 신학교 졸업반으로서 교회를 맡아 크게 부흥시키고 있는, 주의 종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인종과 인종을 너머 일 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역사를 눈으로 보며 체험했습니다.
– 유년기 –
몇 년후, 목사님은 뉴욕 퀸즈의 미국인 교회로 다시 파송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몇 년 후, 목사님은 그 당시 한국서 막 도착한 저의 친정가족들을 위해서, 미국인 교회 안에 개척 교회를 함께 해야겠다고 하였습니다. “개척교회요? 아니? 뭐가 부족해서 개척 교회를 해요?” 저는 일언지하로 반대를 하였으나, 목사님은 막무가내였습니다. 이민교회 하느라 너무나 고생하시는 사모님들을 멀찌감치 보면서, 저 분들은 참으로 딱하게 산다고 마음속으로 비아냥거렸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도 그들처럼 주일이면, 성경책과 함께 밥솥을 들고 교회에 갈 일이 참으로 한심했습니다. 저는 열심히 사업을 벌이며, 세상 꿈을 이루기 위해 차곡차곡 계획을 하며 일궈 나가고 있는데, 미국인 교회 만 담임하면 됐지, 개척 교회라니! 내 인생이 벼랑 나래로 굴러 떨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한인교회라는 명칭은 붙였지만, 교인이라고는 친정 어머니, 언니, 우리 내외였습니다. 그런데 주일이면, 세명을 앉혀놓고 1,000명 앞에서 설교하는 것처럼 열변(?)을 토하는 그가 너무나 원망스러웠습니다. 거기다가 매일 새벽예배, 수요예배, 성경공부에다가, 주일이면 하루 종일 예배로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새벽 6시 예배, 오전 9시 영어 주일학교, 11시면 영어 어른 예배, 1시면 한국 말 예배… 하루종일 예배를 보고 집에 오면, 침대 위에 올라가 대성통곡을 하였습니다. 도대체, 내 꿈과 계획은 어떻게 하라고, 예배 만 본단 말인가! 마음속에서 별 생각이 다들었습니다. 난 지금 너무나 손해보고 억울한 삶을 살고있어! 집을 나가던가 죽어버리든가 하면, 자기 혼자서 마음 편하게 예배 실컷 보겠지! 그러나, 그것도 맘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개척교회가 생긴지 처음 몇 개월은 교인들이 아무도 오지 않는 것이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러다가 언젠가 지치면 이젠 그만 하자고 하겠지! 하는 생각 이였습니다. 그러나, 제 마음속에 변화가 오기 시작했습니다. 교회는 교회인데, 교인들이 없는 목사와 사모가 얼마나 딱한지 스스로 동정심이 들었습니다. 안면이 있는 한국 사람들에게 ‘우리 개척교회 시작했으니 와서 도와줘!’하고 말만 하면 금방 수십 명이 올 것 같은데, 6개월이 지나도 단 한 명도 와 주지 않았습니다.
가정에서는 불화가 그치지 않았습니다. 미국인 교회에서 시작한 Homeless Partnership 프로그램과 Thrift Shop에 자원봉사자는 부족하니, 거기도 가서 시간나는대로 도와야 하지, 일은 밀리고 예배는 자꾸 봐야지, 무엇 하나도 삶의 기쁨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도대체 젊은 사람이 그 아까운 세월을 남을 위해 봉사하고 희생한다는 것이 바보스러웠습니다. 한 가정에서 한 사람 만 하나님의 일을 하기로 서원 했으니, 그 한 사람이면 족하지 왜 두 사람이 다 희생(?)을 하여야 하는가? 하나님! 너무하십니다.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서원한 사람은 따로 있는데, 왜 나까지 피해를 봐야합니까? 날이면 날마다 영적 갈등 속에 점점 우울증은 심화되어갔습니다.
– 사춘기(정권교체) –
어느 날 저녁 이였습니다. 이웃에 있는 천주교 청소년 지도자가 예고도 없이 목사 관을 방문하였습니다. 왠지 가슴이 철렁하며 마음에 불안이 감쌌습니다. 그분을 목사님의 서재로 안내해 드리고, 차를 준비하면서 가만히 들어보니, 딸 아이 이야기를 하는데 심상치 않은 분위기였습니다. 큰애는 당시에 13세였는데, 이웃에 살고있으며 천주교 신자인 수잔이라는 아이와 가까이 지내고 있는 차였습니다. 홀어머니와 살고 있는 수잔이 가정 문제로 상담 받으면서 “나는 요근래 죽고 싶은데, 이웃에 살고있는 감리교 목사님 딸도 자살을 시도하고 있다”라고 한 것이 였습니다. 저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청소년들의 문제는 우리와는 전혀 상관없던 일로 여겼던 것입니다. 아이는 당시에 7학년에서 9학년으로 월반 한 후였는데, 우리는 딸아이가 공부에 흥미를 잃어가고 있는 것으로 어렴풋이 깨닫고 있던 차였습니다.
저에게 아이의 소식은 엄청난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토록 맑고 밝은 아이의 영혼 속에 어두움이 가득 들어가 있는 것이 도대체 이해가 않갔습니다. 도대체 자살이라니, 이런 일이 어찌 내 아이에게서 일어 날 수 있는가 하고, 아이를 찾아가 보니, 팔목에는 빗살무늬의 심한 상처 자국이 나있었습니다. 아이는 말하기를 “엄마 아빠가 이곳으로 이사 온 후에는 우리와 함께 시간을 보내지도 않고 싸우기 때문에 살기가 싫다”며 눈물을 펑펑 쏟았습니다.
과거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을 떠났을 때는 이방나라의 핍박을 통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도록 하였듯이, 하나님은 아이를 통해 저의 모습을 바로 볼 수 있도록 사용하신 것이였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살맛이 있어도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의 아픔인들 누가 견딜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이 모든 것이 제 탓임을 너무나 잘 알 수 있었습니다. 남편은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 그 길밖에 모르고 그 길을 함께 가기를 원하는데, 저는 계속 다른 길을 찾아 방황하였던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존재를 깨닫는 것,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인이며, 부족함을 깨닫는 것이 너무나 큰 은총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생각해보니, 난 어머니로서의 자격이 없는 여자이며, 아내로서 철부지며, 더군다나 “사모”라는 호칭은 내게는 너무나 황송한 것이 였습니다. 또한 늘 입버릇처럼 죽고 싶다고 한탄하던 일, 이 얼마나 큰 죄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 하소서!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시편 51편) 이 말씀은 저의 주야의 외침이 되었습니다.
어느 새벽에 성전에 엎드려 기도하는데, 찬송가 16장 “내주는 살아 계시고”의 음률이 영혼 속에 잔잔히 울려 퍼졌습니다. 그리고, 가사의 2절인 “날 거룩하게 하려고 주 작정하신 일 그 누가 반대하리요 곧 이뤄주시리”의 곡조가 제 영혼 깊은 곳까지 완전히 사로잡았습니다. 아! 바로 이것이였구나! 날 거룩하게 하시려! 날 거룩하게 하시려고 주께서 부르셨었구나! 전에 느끼지 못한 기쁨과 평강 속에 왜 사모로 불림을 받았는지 그 해답을 얻게 되니, 영혼을 뒤덮고 있던 단단한 망막이 확 터지면서, 영혼 안에 새 생명이 임하는 것을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물질이 있으면 삶이 다 평안하고 인생의 행복이 그로부터 다 해결 될 줄 알았던 어리석음으로부터 헤어 나오며, 이 땅엔 물질로 살 수 없고, 해결 할 수 없는 무한한 하나님의 세계를 볼 수 있고 누릴 수 있음이 얼마나 큰 행복의 조건이 되는지 깨우침이 왔습니다. 그러한 깨우침 속에 주님은 저를 찾아 오셨습니다. 그 동안 그림으로 만 보고, 이성으로 만 맞이하던 예수 님이 손수 제게 찾아와 자신의 가죽옷을 입히시며, 그 못 자국나고 갈가리 찢긴 손으로 저의 등을 자꾸 쓸어주시었습니다. 그 분의 머리엔 피 방울진 가시관을 쓰신 채, 저의 눈물과 피곤함과 투정과 외로움, 부족함을 모두 안으신 채 인자한 미소를 지으셨습니다. 저는 조용히 목멘 소리로 그분을 불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저는 그 순간, 수가성의 우물가에서 여인을 바라보시던 예수 님의 연민과 사랑의 눈빛을 보았습니다. 저는 그 사랑 앞에 그 동안 애지중지 하고 있던 저의 모자를 벗어 그 분께 드렸습니다.
그토록 원망스럽고 미웁기 만 하던 목사님이, 그 동안 홀로 씨름하며 아내를 위해 얼마나 안타깝게 하나님께 기도했을 까 생각하니, 너무나 가여워졌습니다. 비로소, 그의 구령사역이 참으로 귀하게 느껴졌습니다. 회개란 정권교체라고 합니다. 죄의 정권 아래 신음하던 영혼이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길은 회개의 길을 통해서만이 이뤄짐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비로소 주님의 보호하심 속에 지금까지 살아왔음을 감사케 되었으며, 교인들이 바라는 사모가 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하나님의 구원받은 딸로서의 사명을 다 해야 되겠구나 하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갈3장)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사실입니다. 제 영혼 안에서 이런 변혁이 일어난 그 주일 예배 시간에, 3명의 여성도 들이 개척교회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왔노라며, 교회당에 들어서는 것이 였습니다. 할렐루야! 개척교회 시작한지 6개월만에 그들의 얼굴을 보았을 때, 하나님의 얼굴을 뵈는 것 같았습니다. 아! 우리 교회도 성도 님들이 드디어 왔구나! 그 기쁨 속에 한 사람의 영혼이 천하보다도 귀하게 보였습니다. 저는 이들의 영혼을 진정으로 사랑하며 저들의 삶의 승리를 위해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 청년기(한미 여성 연합 선교회 창립) –
몇 주후에 그분들은 또 다른 여 성도들을 모시고 왔는데, 가만히 보니 생활과 정신이 무척이나 불 안정되어 보였습니다. 그 배경을 알고 보니 이중문화 가정을 가졌다가 실패한 분들이거나, 아니면 여러 가지 가정의 어려움을 겪고 계셨습니다. 어느 여인은 심한 환청과, 알코올 중독자인 남편에게 매맞음에 시달리면서도 아무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직장을 다니고, 운전을 하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성령 님께서는 저들을 도우라는 감동 속에, 저들의 지치고 곤한 영혼의 울부짖음이 갈수록 크게 저의 영혼을 들이쳤습니다. 1990년 8월, 그분들을 돕고자 하는 마음으로 10여명의 성도들이 주축이 되어 한미여성연합 선교회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선교회를 통해 하나님은 놀랍게 역사 하셨습니다. 그 동안 불우한 이중문화 가정의 아픔을 통해 서로를 도와 줄 수 있는 연결고리를 만들고, 병원에 입원해 있는 AIDS 환자며, 정신병동에 갇혀있는 여성, 나아가서는 감옥에 갇혀있는 한인 청소년들을 선교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랑의 바구니”를 전해주며 그리스도 안에서의 온전한 삶으로의 회복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함께 매달리며, 할 수 있는 것들을 도와주게 되었습니다.
그 일을 통해 잊을 수 없는 일 중에서, 헤시안인 남편을 갖은 김 집사 님을 잊을 수 없습니다. 집사 님의 남편은 부두(Voo’do)라는 아프리카 원시종교를 믿고 있었으며, 그는 무당 이였습니다. 밤이면 처녀 귀신과 함께 자야만 된다며 부부생활조차 멀리하며 이혼직전까지 같으나, 그는 결국 예수를 믿게 되었고, 우리는 그가 섬기며 모셨던 제단을 예수 이름으로 내다 버리고 깨끗이 청소했던 일입니다. 그는 완전히 귀신에 사로잡혀 있어, 온 집안과 자동차 속까지도 부적들로 가득 차 있었는데, 우리가 그것을 모두 떼어내는 일을 하였습니다. 거인 같이 체격이 큰 그녀의 남편이, 부적을 떼 낼 때 무서워서 덜던 떨던 모습을 잊을 수 없습니다.
– 성년기 –
저희는 퀸즈에서 7년을 섬기던 미국교회와, 개척한 한인교회를 떠나, 로렌스 한인교회로 다시 파송을 받게 되었습니다. 교회에 와보니, 두 가지의 큰 기도 제목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성도 님들이 신앙의 상처를 받고 낙담한 가운데 있었고, 둘째는 함께 건물을 사용하고 있는 미국교회의 부흥으로 한인교회가 당장 나가줘야 만 될 형편 이였습니다. 그러니, 주일예배와 수요예배 외에는 교회사용 하는데 많은 제약 속에, 한인 공동체를 위한 아무런 사역을 감당 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저희 부부는 두 가지의 목적을 놓고 기도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성전건축을 원하시면 건축을 위해 나아갈 것이고, 성전 건축 할 헌금으로 21세기를 향한 선교의 사역을 위해 쓰시길 원하신다면, 사용 할 수 있는 성전을 주십사라는 것이 였습니다.
그 응답을 기다리는 시간은 참으로 긴 시간 이였습니다. 마치도 독수리가 새장에 갇혀 날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감리사 님을 통해 우리 교회가 갈 만한 곳을 물색해 보았으나 마땅한 곳이 없었습니다. 새벽마다 성전을 위해 기도하며, 목사님과 함께 주변 교회건물, 유대회당, 창고 건물들을 둘러보았으나 마땅한 것이 없었습니다. 전혀 해결될 기미조차 없었습니다. 새벽기도회가 끝나면, 우리는 주변의 교회를 아침마다 돌았는데, 교회가 크든 작든 그토록 부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마음에 드는 교회에 가서는, 아무도 없는 파킹 장에 무릎 꿇어 엎드려 하나님께 호소했습니다. “하나님! 우리는 갈곳이 없어요! 이 성전을 우리에게 사용 할 수 있도록 허락하시든지, 성전을 지을 수 있는 여력을 주시든지, 제발 도와주세요!” 그렇게 기도하고, 우리 자신을 바라보면 너무나 처량했습니다. 이일로 인해 이스라엘 민족의 성전을 향한 마음과 그 귀함을 뼈저리게 알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매 달 금식기도를 3일 씩 정해 놓고, 우리의 두 가지 기도 제목을 위해 하나님이 원하시고 인도하시는 방법에 내어 맡기기로 하였습니다. 주일이면, 피로로 녹초가 된 목사님이 슬리핑 빽과 물, 짐을 싸들고 수양 관에 들어가실 때면 그토록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리고, 그가 떠난 후에 빈방에 엎드려 하나님께 눈물로 호소했습니다. “하나님! 왜 우리는 이런 과정을 겪어야 하나요?”
그러나, 2년이 지나도 성전건축을 할만한 기미도 없고, 성전이 옮겨 갈 마땅한 곳도 발견치 못했습니다. 완전한 침묵의 시간 이였습니다. 어느 수요 저녁에 목사님께서는 성전문제를 해결키 위해, 가을에 40일 금식기도에 들어가야 만 되겠다고 발표를 했습니다. “40일 금식기도?” 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무섭게 엄습했습니다. 이 교회 있다가는 명대로 살지 못하겠구나! 하는 두려움 이였습니다. 천하에 나처럼 외로운 사람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참으로 감당 할 수 가 없었습니다. 이제는 남편이 하나님 일한다고 자식도 버리고 아내도 버리는구나! 40일 금식기도 하다가 죽은 사람들도 많다는데! 목사님이 돌아가시면 난 이제 어떻게 살까?
저는 예배가 끝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한마디의 말도 나눌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목사 관에 도착하자 마자 지하실에 내려가 대성 통곡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 저는 너무 외로워요! 저는 너무 무서워요! 가슴이 아파요!” 이 외마디로 4시간을 애통하였습니다. 제 생애에 있어 그토록 처절하고 긴 울음을 운 적은 처음 이였으며, 그렇게 오랜 시간을 사람이 애통해 할 수 있구나 하는 경험을 했습니다. 남편은 처음으로 저의 이런 모습을 보자 달래러 왔다가 오랜 시간을 말없이 곁에서 간절히 기도해 주다가 자리를 피해주었습니다. 인간이 처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일대일로, 그분의 사랑과 은총만을 기다리며 애통하던 시간 이였습니다. 언제나 힘들 때면, 어머니의 기도에 의지하고, 남편의 위로가 안위가 되고, 아이들을 바라보며 용기를 얻던 위로의 시간은 완전히 단절된, 참으로 외롭고 처절했던 밤이 였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친히 그 밤에 저의 아픔과 외로움, 두려움을 모두 하나님께 올리실 때, 나의 낙망했던 영혼이 다시 나래를 조금씩 팔딱이며 위로와 평강이 임함을 체험했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요한14:1)
그 다음날 아침, 눈이 퉁퉁 부어 눈조차 뜨기에 어려운 상태로 마음의 잡쓰레기를 쓸어내듯이, 집안청소를 하고 있는데 전화 한 통이 왔습니다. Searfoss목사라고 자신을 소개하면서 성 마가 교회의 담임 목사님이라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저희 목사님을 만나고 싶다는 전화였습니다. “성 마가 교회?” 저는 귀를 의심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 마가 교회라 하면, 저희 교회가 16년전부터 공동사용을 요청했다가 두 번씩이나 거절당한 경험이 있고, 얼마 전에 목사님께서 또 다시 요청했으나 거의 일년이상을 묵묵무답하여 아예 포기하고 있던 너무나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밤새껏 폭풍우 속에 시달렸던 밤이 지나고, 동녘에 떠오르는 눈부신 태양이 솟구쳐 올랐습니다. 가슴에 소망의 빛이 그 한통화의 전화를 통해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뛰는 가슴을 억누르며, 행여나 사탄이 일을 그르치지 못하도록 그날부터, 목사님끼리 대좌하는 그날까지 금식하면서 기다렸습니다.
1996년 2일 7일, 오전 10시에 두 교회 목사님은 서로 만나, 교회 공동사용 가능성의 의사를 서로 타진한 후, 부활절을 기해 두 교회가 합동예배를 추진하기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그러나, 성 마가 교회가 지도자 회의와 교인총회, 임원회, 이사회 등의 험산준령을 무사히 마치게 될지는 의문 이였습니다. 오랜 기간을 안정 속에 지내온 상류층 백인교회가 유색인종을 받아들이는 일이란 쉬운 일이 아니 였기 때문입니다. 저희 교회는 온 교우 40일 작정기도와 목사님과 성도들의 금식기도가 계속이어 졌습니다. 성전을 위한 기도가 얼마나 간절하고 진실했던지!
결국 하나님의 선하신 능력 속에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어 저희교회는 한 명도 낙오됨 없이 새 성전에 입주하게 되었습니다. 마치도 독수리 한 마리가 열려진 문을 통과해 창공으로 두 날개를 뻗치는 그 기쁨 이였습니다.
저희 교회는 1996년 4월 7일, 성 마가 교회와 함께 합동예배를 드림으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었습니다. 우리를 과연 어떻게 받아 줄까 하고 그 동안 염려하고 걱정하던, 성 마가 교인들은 우리 한인교회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저들의 교회를 활짝 열어 주었습니다. 저는 압니다. 성 마가 교인들이 한인 교회를 맞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큰 결단이었는지를! 성 마가 교인들은 그 동안 저들의 선조가 아끼고 돌보아온, 그 아름다운 노르만 고딕건축으로 지어진 성전을, 저들의 신앙고백을 통해 유색인종인 한인교회에 추호의 아까움이나 의구심 없이, 그리스도의 온전한 사랑으로 열어 준 것입니다. 저희는 저들의 사랑에 힘입어 저희 교회는 21세기를 향해 많은 비전을 향해 나아가고 있으며, 날로 부흥하는 축복까지 더하셨습니다.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요한계시록 7:17)
이제와 뒤돌아보니 저자신도 어지간히 고집스럽고 미련한 사람이었다고 고백치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총 속에 끝까지 사모의 사명을 감당케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희 가정에 세 자녀를 허락하시어 목회의 길에 한마음이 된 채 걸어가게 하셨습니다. 큰딸은 현재 대학교 2학년으로서 15세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았습니다. 앞으로 선교사의 길을 가기를 원하고 있으며, 십대들을 위한 자살방지 쎈터에서 카운슬러로 자원 봉사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사모”가 된 것을 이젠 자랑스럽고 기쁘게 생각합니다. 부족한 죄인을 불러 사모의 직책을 주신 하나님은, 저의 방황의 길에서 끝까지 놓치거나, 버리지 않으시고 지켜주시었습니다. 저는 요즈음도 1990년도에 발족한 한미 여성연합 선교회의 총무로 일하고 있으며, 목사님의 목회를 돕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 3년간 뉴욕 KCBN 기독교 방송을 통해, “목사 관 서신”이라는 신앙수필을 썼으며, 올해부터는 일반 방송인 Radio Korea에 “창이 열린 숲속에서”라는 선교프로를 맡아 진행하고 있으며, 교회의 회보 및 사순절 묵상록등을 발간하며 성도님들과 함께 편집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능치 못할 것이 없음”을 이루신 하나님의 그 능력을 보면서, 이 모든 것들은 순전히 하나님의 작품들인 것을 분명히 말합니다. 앞으로의 저의 하나님 안에서의 비전은, 성도들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그 귀한 행적인 “속 사도행전”을 계속 기록하여 후대에 남기는 일입니다. 그 동안 저의 사역을 위해 무던히 눈물로 기도해 주신 친정 어머니와 시부모님, 저의 영적인 지도자이며, 스승인 목사님께 저의 사랑을 전합니다. 그리고, 아직도 부족한 사모를 위해 기도로 밀어주고 사랑해 주는 성도님 들께 감사드립니다.
저의 과거의 꿈은 헛된 세상 것이 였으나, 하나님은 저에게 인간의 삶을 새롭게 디자인하는 거룩한 주님의 귀한 사역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저는 오늘도 삶의 옷장에 쌓여진 많은 모자들을 보면서,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이런 선물을 주시길 원하심을 담대히 증거 합니다. 제 생애의 인류 디자이너이신 하나님께서 손수 만드신 “사모의 모자”를 저는 이젠 분명히 사랑하며 자랑하며 사도 바울의 신앙고백 속에 부족한 저의 고백도 감히 얹어봅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빌3:12. 아멘.
— 윤 완희, 3/12/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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