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tober’s Shaman Dance”

The shaman threads the moon on high,
A silver knot in midnight sky.
She spins beneath its haunted glow,
Where truth and shadow come and go.

The willow drinks from steel’s sharp tongue,
Its roots still hum the songs unsung.
A borrowed light, a fleeting breath,
A vow to rise beyond all death.

At crossroads thick with ash and flame,
The people call the lost one’s name.
The incense curls, the pig’s head bleeds,
The tyrant sows his bitter seeds.

A birch breaks stone with quiet grace,
Its roots reclaim the buried place.
They stretch beyond the sunset’s red,
Through sleepless nights where hope has bled.

The serpent slides through smoky glass,
A whisper drifts as shadows pass.
Time bends to hear the voiceless plea—
Denied by chains, yet set soul free.

In yards where birch stakes pierce the ground,
Tall towers rise, the roads are bound.
Yet stones still hold their breath in pain,
While silence sings its cold refrain.

The roots dream dust, tomorrow’s sand,
A future shaped by trembling hand.
The bear eats garlic, weeps alone,
Its grief adrift, by none yet known.

The station hums, the dance is done,
The crowd dispersed, the tale begun.
The bear gives birth to bitter truth,
A cry of dust, the cry of youth.

Cheoyong* once sang, then turned away,
His voice a stone lost in decay.
“Don’t break the wall,” the elders pled,
“Stack stones until they crown your head.”

I fear today, yet still I stand,
And pray to walk tomorrow’s land.
Through cracks in walls my steps abide,
Where dance and sky no more divide.

Hair veils the grave, a sacred line,
Where earth and heaven intertwine.
The cars that circle, lost in trance,
Are shamans too, in broken dance.

The spearhead shakes, the incense bleeds,
The birch still breathes, the bear still feeds.
One step, one word, the silence stirred,
A wind that leans, an unheard word.

The cosmos shivers, cold and wide,
No shelter left, no place to hide.
Its mouth agape, it spills the night—
Ten thousand cries for what is right.

[Beginning Series – Part 4]

© TaeHun Yoon, 1972 (Rewrite in 2025)

* Cheoyong was a mythical figure from the Silla Kingdom (57 BCE–935 CE), said to be the son of the Dragon King of the Eastern Sea. During the reign of King Heongang (875–886), Cheoyong came ashore at Gaeunpo (modern-day Ulsan) and joined the royal court. The king gave him a wife, and Cheoyong settled in the capital, Sorabeol (now Gyeongju).

One night, Cheoyong returned home to find his wife in bed with a stranger. Instead of reacting with anger, he sang and danced:

“Under the bright moon in the capital I reveled the night away. Back home, I found four legs in my bed. Two are mine—but whose are the other two? She was mine, but has been taken. What can be done?”
The stranger, revealed to be a plague spirit, was so moved by Cheoyong’s grace and restraint that he vowed:

“From now on, if I see even your image, I will never enter that house.”
This tale gave rise to the tradition of hanging Cheoyong’s mask or image on doors to ward off evil spirits—especially during year-end exorcism rites.

🎭 Cheoyongmu: The Dance of Cheoyong
The story inspired Cheoyongmu, Korea’s oldest surviving court dance. Originally performed solo to drive away disease and misfortune, it evolved into a five-person masked dance representing the five cardinal directions (East, West, South, North, Center), each dancer wearing a robe of symbolic color.
Cheoyongmu is now recognized as:

A UNESCO Intangible Cultural Heritage (since 2009)
A Korean Important Intangible Cultural Property (since 1971)

Posted in Poetry | Tagged , , , , | Leave a comment

“내림 굿”

무당은 달을 꿰어 올리네,
한밤하늘 은빛 매듭으로.
그녀는 그 으스스한 빛 아래 돌며,
진실과 그림자 흐르듯 오가네.

버들은 강철의 날카로운 혀를 마시고,
그 뿌리는 불린 노래를 여전히 속삭이네.
빌려온 빛, 사라지는 숨결,
죽음을 넘어 일어서리라 맹세하네.

재와 불꽃으로 가득한 갈림길에서,
사람들은 잃어버린 이름을 부르네.
향은 피어오르고, 돼지머리 피 흘리며,
폭군은 쓴 씨앗을 뿌리네.

자작나무는 고요히 돌을 깨뜨리고,
그 뿌리는 묻힌 자리를 되찾네.
저녁노을 붉음을 넘어 뻗어,
희망이 스러진 밤을 지나네.

뱀은 연기 낀 유리 속을 미끄러지고,
속삭임은 그림자 따라 흘러가네.
시간은 말 없는 탄원을 들으려 굽히고—
쇠사슬에 부정당했으나, 영혼은 풀리네.

자작나무 말뚝이 땅을 찌른 마당 위,
높은 탑은 솟고 길은 묶이네.
그러나 돌들은 여전히 고통의 숨을 참고,
침묵은 차가운 후렴을 노래하네.

뿌리는 먼지와 내일의 모래를 꿈꾸고,
떨리는 손이 미래를 빚네.
곰은 마늘을 씹으며 홀로 울고,
알 수 없는 슬픔 떠돌아가네.

역은 웅웅 울고, 춤은 끝나며,
군중은 흩어지고, 이야기는 시작되네.
곰은 쓰라린 진실을 낳고,
먼지의 외침, 청춘의 울음이 터지네.

처용*은 한때 노래하다 돌아섰고,
그 목소리는 길 잃은 돌이 되었네.
“벽을 깨뜨리지 말라.” 장로들은 간청하며,
“돌을 쌓아 머리 위에 올려라.”

나는 오늘이 두렵지만 여전히 서서,
내일의 땅을 걷게 되길 기도하네.
벽의 틈새로 걸음을 옮기니,
춤과 하늘 더는 나뉘지 않네.

머리칼은 무덤을 가리며, 성스러운 선이 되어,
땅과 하늘을 엮어 이어주네.
빙빙 도는 차들도 황홀 속에 길을 잃고,
부서진 춤의 또 다른 무당이네.

창끝은 떨리고, 향은 피 흘리며,
자작은 숨 쉬고, 곰은 여전히 먹네.
한 걸음, 한 마디, 침묵은 흔들리고,
기운 바람 속 들리지 않는 말이 있네.

우주는 떨며 차갑고 넓어,
은신처 없고 숨을 곳 없네.
그 입은 벌어져 밤을 쏟아내며—
만 갈래 울음, 정의를 향한 외침이네.

[Beginning Series – Part 4]

© 윤 태헌, 1972 (2025년 추고)

* [위키백과] 처용무(處容舞, 영어: Cheoyongmu)는 대한민국의 가면극으로, 1971년 1월에 대한민국의 국가무형문화재 제39호로 지정되었으며, 2009년 9월에는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선정되었다. 궁중나례로 처용 가면을 쓰고 추는 춤을 말하며, 궁중무용 중에서 유일하게 사람 형상의 가면을 쓰고 추는 춤으로 ‘오방처용무’라고도 한다. 통일신라 헌강왕(재위 875∼886) 때 살던 처용이 아내를 범하려던 역신(疫神 : 전염병을 옮기는 신) 앞에서 자신이 지은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춰서 귀신을 물리쳤다는 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처용무는 5명이 동서남북과 중앙의 5방향을 상징하는 옷을 입고 추는데 동은 파란색, 서는 흰색, 남은 붉은색, 북은 검은색, 중앙은 노란색이다.[1]

춤추는 사람 다섯 명이 처용 가면을 쓰고 오방(五方)을 상징한 오색의상을 입은 5인의 무원이 추는 전형적인 의식무용이다. 처용무의 기원은 신라에 있으나 고려와 조선조를 통하여 궁중나례(宮中儺禮)와 연례(宴禮)에서 처용면(處容面)을 쓰고 추는 괴이호방(怪異豪放)한 일종의 무극으로 연행(演行)되어 왔다. 본디 나례(儺禮)와 같은 벽사진경(辟邪進慶)의 구나가무(驅儺歌舞)로 연행되던 것이 앞에 있다응 관아의 향연에서 추어졌으며, 남자가 추는 춤으로 장엄하고 신비스러운 춤이다.

처용가무의 기원에 대해선 많은 논문이 발표되었으나 그 중 처용설화(處容說話)는[주해 1] 원초에 인류가 가졌던 벽사가면의 인격신화와 그에 따른 해석·설명에서 형성되었으리라는 의견은 처용설화의 해명을 위한 유력한 시사의 하나가 된다. 벽사가면의 민속은 신라 도깨비기와(鬼瓦)의 예는 물론이고 최근까지 문루(門樓)나 방패에 새겨진 귀면(鬼面)에 의해서도 볼 수 있으며, 민가(民家)에서도 귀면형의 탈을 문에 걸어놓고 잡귀의 침범을 방지하려 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신라 향가인 ‘처용가‘가 이루어지고 다시 고려조에는 일종의 극시적(劇詩的) 무가(巫歌)인 ‘처용가’로 발전되면서 처용무도 초기의 단순한 주술무에서 다양한 절차를 갖춘 의식무(儀式舞)로 발전, 조선조의 《악학궤범》에 실려있는 바 그대로 일종의 무극(舞劇)으로까지 계승·발전되어 조선조에는 세말(歲末)의 궁중나례에서 중심가무가 되기에 이르렀다. 처용무는 고려와 조선조를 통해 의식무로서뿐만 아니라 궁중과 궁가 및 양반 민가의 연악무(宴樂舞)로서도 많이 추어졌다.[2]


<역사>
처용무의 ‘처용’이라는 명칭이 기록되어 있는 문헌은 《삼국유사》를 필두로 해서, 《동경잡기》 《익재난고(益齋亂藁)》 《소악부(小樂府)》 《용재총화》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동국세시기》 《경도잡지(京都雜志)》 등에서 볼 수 있고, 또한 시작된 연대에 있어서도 신라시대(875-886)에 발생된 춤으로 되어 있다.

삼국유사》에는 헌강왕이 개운포(開雲浦)에서 만난 용왕의 아들이 처용이며, 처용은 자기의 아내를 범한 역신(疫神) 앞에서 처용가를 지어 불러 벽사의 기적을 가졌다고 한 것으로 보아, 처용무는 신라 때부터 추어졌다고 할 수 있다. 《고려사》 충혜왕조와 신우조에는 《처용희》(處容戱)의 기록이 있다. 성현의 《용재총화》에는 처용무는 고려시절 원래 한 사람이 검은 옷을 입고, 흑사모(黑沙帽)에 흑대(黑帶)를 두르고 붉은 가면을 쓰고 가무백희 중에 연희하였다. 그것이 세종 때에는 다섯 사람이 추는 오방처용무(五方處容舞)로 발전, 일대 무용극화하여 합설·학춤(鶴舞)·처용무·연화대무(蓮花臺舞)로 크게 변천되었으며 궁중나례와 향연에서는 의례 연희되었다.

성종 때 나온 《악학궤범》에는 처용무가 학무(鶴舞)와 연화대무(蓮花臺舞)를 합설해서 학연화대처용무(鶴蓮花臺處容舞)합설로 나례에서 연행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연산군 때에는 환관 김처선이 연산군에게 충언을 하다가 처형된 뒤, 연산군이 그의 이름인 “처(處)”와 “선(善)”에 대해 금자령을 내림으로써 한때 처용무가 풍두무(豊頭舞)로 이름이 바뀌기도 하였다.
처용무는 궁중 나례를 비롯하여 관아의 연향에서 연행되었으나 조선말기에 전승이 끊어졌던 것을 1928년에 《구황궁아악부》(舊皇宮雅樂部) 김영제(金甯濟), 함화진이수경(李壽卿)이 《악학궤범》과 장악원에서 쓰던 정재홀기(呈才笏記)를 참작하여 새로 안무한 것이다.


<특색>
이 춤의 발생과 아울러 용(龍)의 설화, 시가(詩歌)의 발생, 불사(佛寺)의 창건, 음악의 발생, 제액(除厄), 역신(疫身)을 막는 습속 등이 파생했다. 5행설(五行說)에 의거하여 방위(方位)에 다른 5색(靑·紅·黃·白·黑)의 의상을 입는 것이 이 춤의 특색이다.

<구성>
처용탈은 모시 또는 옻칠한 삼베로 껍질을 만들고 채색은 적면유광(赤面油光)으로 후덕한 모습으로 한다. 사모는 대[竹]로 망을 얽어 종이를 바르며, 두 귀에는 주석고리와 납주(鑞珠)를 걸고 복숭아 열매와 가지를 단다.

춤은 다섯 무원(舞員)이 각각 청(동), 홍(남), 황(중앙), 흑(북), 백(서)의 단의(緞衣)를 오방에 맞추어 입고 서서 처용가면과 사모를 쓰고 홍록흉배(紅綠胸背), 초록천의(草綠天衣), 남오군(藍襖裙), 홍방슬(紅方膝), 황초상(黃綃裳), 금동혁대(金銅革帶)를 띠고 백한삼(白汗衫)을 끼고 백피혜(白皮鞋)를 신고 춤을 춘다. 수제천(壽齊天, 빗가락 정읍)에 맞추어 두팔을 허리에 붙이고 청·홍·황·흑·백의 차례로 들어와 일렬로 북향하여 서서

신라성대소성대(新羅盛代昭盛代) 천하태평나후덕(天下太平羅候德)…

하고 처용가를 가곡(歌曲) 언락(言樂)가락에 맞추어 부르고 나서 향당(鄕唐) 교주(交奏)하면 처용 5인이 모두 허리를 굽힌 다음 5방으로 마주 서서 춤추다가 소매를 들어 안으로 끼는 홍정(紅程) 도돔춤을 추고나서 발을 올려 걸으며 무릎을 굽히는 발바딧춤을 추며 북향하여 섰다가 가운데 황(黃)과 사방은 반대로 향하여 춤을 춘다. 오방무원은 각기 무진무퇴(舞進舞退)하여 다른 방향으로 들어서는 발바딧작대무[作隊舞]를 추고 황은 북을 향하여 방향을 바꾸어 무릎디피춤을 추고 청, 홍, 흑, 백은 중앙을 향하여 춤을 추되 처음에 흑과 황이 대무(對舞)하고 청·홍·백이 차례로 대무한 다음 중앙을 등지고 추다가 제자리를 향하여 춘다. 회선(回旋)·우선(右旋)으로 흑(黑)이 먼저 나오고 황은 백과 홍 사이에 들어가 모두 제자리로 돌아왔을 때, 흑은 뒤로 물러서고 홍은 앞으로 나가 처용 5인이 가지런히 서면 일제히 북향하고 선 다음 노래를 한다.

“산하천리국(山河千里國)에 가기울총총(佳氣鬱葱葱) 하샷다 / 금전구중(金殿九重)에 명일월(明日月)하시니 / 군신천재(君臣千載)에 회운룡(會雲龍)이 샷다 / 희희서속(熙熙庶俗)은 춘대상(春臺上)이어늘…”

하고 창사(唱詞)를 가곡 우편(羽編)에 맞추어 부른다. 윗도드리가 시작되면 한삼을 좌우 어깨에 차례로 매었다가 뿌리는 동작으로 낙화유수(落花流水)를 추다가 청·홍·황·흑·백·처용의 순서로 퇴장한다.

<세계 유산>
2009년 처용무는 9월에는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선정되었다. 보유자로는 김용, 김중섭, 전수조교로는 이진호, 인남순이 활동하고 있다.[3]

Posted in Poetry | Leave a comment

In Search of Our Friend

(From the Parsonage Letters, “Those Who Remained in the City,” Story Eleven, 1994)

© WanHee Yoon

One of the tasks of a parsonage in Queens Village, NY, near Jamaica, is to welcome visitors who may arrive at any time, day or night. Sometimes it means giving shelter to a traveler lost on a snowy midnight, preparing a warm meal for the hungry, providing clothes for those who have none, or helping someone stranded without fare reach their destination. Such moments are a special blessing given only to those who live in the parsonage.

Guests might come in broad daylight or at two or three in the morning. Some arrive with unavoidable circumstances, truly in need of help. Others come seeking aid to satisfy destructive habits—drugs, alcohol, gambling. At first, such visits left us surprised, annoyed, and even upset. But after nearly twenty years in the parsonage, we grew used to it. Instead, we began to give thanks that they came to us and not to be rejected or misused elsewhere.

In this distrustful age, when the world grows harsher and trustworthy people seem fewer, the parsonage is still seen as a place of refuge. Through those who come, we hear their stories and rediscover God’s unending love.

It is joyous to receive an unexpected gift, but there is a deeper, incomparable joy in sharing—even from our own lack—with a stranger. That joy does not fade with time; it rises again and again, remaining as treasure in the soul.

One autumn afternoon, as the season was fading, a weary Korean man in his fifties knocked on the door. Exhausted, nearly collapsing, he introduced himself:

“This morning, after thirty-four months, I was released from prison. I came walking since nine o’clock, hoping to find a friend who lived here. But I was told he moved two years ago. I don’t know where. My heart sank as I turned away… then I saw Korean children playing and found my way here.”

Sweat streamed down his scarred face. I quickly sat him down and ran to the kitchen. By grace, there was still warm rice in the pot. I set before him rice piled high, with green chili peppers, soybean paste, red pepper paste, kimchi, and a bowl of cold water.

It didn’t matter who he was—what could compare to a steaming bowl of rice with kimchi for someone who had longed for it through prison walls? His story could wait. Even his name didn’t matter. What mattered was that he had come to the parsonage. Sharing that meal brought tears to my eyes.

He prayed with eyes closed, then began to eat eagerly. Within moments, two bowls were gone. A smile broke across his face:

“Ah! How I longed for kimchi and pepper paste in prison…”

He then told his story. Thirty-eight years old. Immigrated to California in 1980, opened a vegetable store, married, then separated within three months. Came to New York for a new start. One night, walking out of a restaurant with a friend, he saw a woman being attacked by two men. He rushed to defend her, beating them badly. When police arrived, his friend urged him to flee, “I have a family!” but he was caught and imprisoned for violence.

His only friend visited once in nearly three years, holding the ten thousand dollars that had been his entire fortune.

As he spoke, tears brimmed. He sighed deeply. He had walked almost seven hours in search of that friend, carrying hope.

“He promised: ‘Don’t worry about money. When you’re released, I’ll help you start again.’”

But the friend had vanished. Still, he clung to that one word of friendship, believing it could heal the pain of thirty-four months behind bars.

He recalled his sister in California, who once kept a shop in Koreatown. But the riots of April 30—Rodney King, flames, looted stores, gunfire, wailing—had destroyed much of that community. He nodded, convincing himself her shop had survived.

The pastor asked his plan. He wished to go to Boston, to a friend working as a chef. “He will care for me until I can stand on my own,” he said. Given some fare and meal money, he left with relief, vanishing into the evening light.

As I washed his empty bowl, tears welled in my eyes. The sunset glowed red. Leaves fell in showers where he had sat.

Time and again we wound each other, yet still seek, long for, and trust in one another. Perhaps wandering is in our nature. Yet through these strangers, God whispers His love again.

Where can we meet our true friend? Remembering the eternal friendship of Jonathan and David, we are moved to tears by the mercy of God, who calls us “friend.”

Posted in Essay by WanHee Yoon, Ministry, The People Who Remained in the City | Tagged , , , , , | Leave a comment

“우리의 친구를 찾아” (목사관 서신, 도시에 남은 사람들, 열한째 이야기) 1994, 윤 완희

언제든지 아무 때나 찾아오는 손님들을 맞는 일이 목사관의 임무 중의 하나입니다. 폭설이 내리는 한밤중에 길 잃은 나그네를 대접하여 잠자리를 마련해 준다든가, 배고픈 사람에게 따뜻한 음식을 챙겨 먹이는 일, 입을 것이 없는 이들에게 옷을 챙겨주는 일, 여비가 떨어져 목적지에 가는 데 문제가 생긴 이들의 여비를 마련해 주는 일 등은 목사관에 살고 있는 사람들만이 누리는 특별한 은총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들은 대낮에도 올 수 있고, 새벽 두세 시에 올 수도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하여 꼭 도움을 받아야만 되는 사람도 있으나, 자신의 나쁜 습관 (마약, 알코올 중독, 도박 등)의 만족을 위하 여 목사관을 찾아와 도움을 청하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당황하고, 짜증나고, 놀라기도 하였으나, 근 20여 년 동안의 목사관 생활은 언제 어느 때든지 손님 맞는 일에 이력이 나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다른 곳을 헤매다가 박대받거나 나쁜 일에 이용당하지 않고 목사관을 찾은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다행스럽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이 험악해져 가고 믿을 사람들이 없다고 하는 이 불신의 세대에 그래도 목사관에 찾아가면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찾아오는 사람들을 통하여, 우리는 많은 그들의 경험담을 듣게 되고, 하나님의 끊임없는 사랑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갑자기 생각지도 않은 귀한 선물을 남으로부터 받았을 때도 기쁘지만, 그러나 나도 부족한 가운데 있는 것 중의 하나를 전혀 낯선 사람에게 나누어주었을 때의 기쁨이란, 받는 기쁨과는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깊고 큰 것입니다. 그 기쁨은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고 문득문 득 가슴속에 되살아나 내 영혼에 보화로 남게 됩니다.

가을이 스러져 가던 어느 날 오후, 낯선 50대의 한국 남자분이 문을 두드렸습니다. 첫눈에 그는 지쳐 있으며 거의 탈진 상태에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 네! 오늘 아침 34개월 만에 감옥에서 나왔습니다. 이곳에 사는 친구가 있어서 아침 9시부터 이 시간까지 걸어서 찾아왔더니만, 2년 전에 이사갔다고 하는데,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군요. 세상이 무너지는 심정으로 돌아서고 있는데 한국 애들이 놀고 있는 것을 보고……”

그의 검게 타고 눈자위로 흉터가 지나간 얼굴에는 진땀이 비오듯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습니다. 그를 의자에 우선 앉게 하고 부엌에 달려가 보니 다행히도 따뜻한 밥이 솥에 남아 있었습니다. 풋고추와 된장, 고추장, 김치 등을 차리어 수북이 밥을 담아, 찬물 한 그릇과 함께 그를 대접하였습니다. 그가 누구라도 좋았습니다. 버터 섞인 빵과 기름진 음식이 제 아무리 좋아도 한 조각의 벌건 김치엔들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감옥에서 시시때때로 그리며 먹고 싶어했을 밥과 김치, 고추장!

과거 이야기는 나중에 들어도 좋았습니다. 그의 이름을 구태여 알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저 그가 목사관에 찾아온 것이 고맙고 감격스러울 뿐이었습니다. 밥 한 그릇을 차려준 그와의 만남이 눈물겨웠습니다.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과 스쳐가기도 하고 만나기도 하며, 대화를 나누지만 절박한 처지에 있던 그와의 만남은 참으로 귀한 것이 었습니다. 그의 과거가 어찌되었든지, 환경이 어찌되었든지, 그는 분 명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누가 그의 발길을 이곳으로 인도하셨을까? 험상궂은 낯선 나그네 앞에서 만남의 기쁨을 누리는 나에게, 이런 기 쁨을 주시는 이는 누구인가?

그는 두 눈을 감고 식사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겸연쩍은 얼굴 로 과거엔 가끔 교회에도 갔었노라고 말꼬리를 흐렸습니다. ‘실컷 잡 수세요! 그의 밥숟갈이 정신없이 움직였습니다. 눈깜짝할 사이에 두 사발의 수북한 밥을 비우고는 비로소 그는 허리를 펴고 만족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아휴! 감옥에서 김치하고 고추장이 얼마나 먹고 싶었던지 … ….” 그리고 그는 자신의 이름과 나이를 말했습니다. 서른여덟 살, 찬찬히 그의 모습을 들여다보니, 허약한 젊음이 숨쉬고 있었습니다.

“34개월 전 뉴욕의 우드 사이드의 한 식당에서 친구와 나오는데, 두 명의 남자들이 어느 여인에게 강도질을 하는 모습을 보고 달려가서 실컷 갈비뼈가 부러지도록 때려눕혔지요. 나중에 경찰이 오기에, 친구는 가족이 있으니 도망가라고 했지요! 저는 폭력죄로 붙들려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친구는 제가 감옥에 가 있는 동안 단 한번 찾아왔었지요. 저의 전재산인 약 만 달러의 돈도 그 친구가 맡고 있었는데……”

긴 한숨과 함께 그의 눈에서 금방이라도 산화된 눈물이 쏟아져 내릴 것 같았습니다.

그는 1980년 5월, 캘리포니아에 누나의 초청으로 이민을 왔습니다. 그곳에서 착실하게 일하여 야채가게도 차리고 결혼도 했으나, 결혼 3개월 만에 부인과 헤어지며 가게도 남에게 넘겼습니다. 뉴욕에 와 새로운 삶을 시작하여 남부럽지 않게 살리라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여 느 때와 같이 친구와 회포를 풀기 위해 식당에 갔다가 엉뚱한 사건에 연루되어 그는 34개월이란 세월을 철장에서 머물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 한탄과 서러운 세월을 때로는 대항하여 수인들과 싸우기도 하고 맞기도 하고, 벌칙으로 밤새 일을 하기도 하며 정지된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친구를 찾아, 거의 일곱 시간을 이곳까지 걸어왔다는 것 입니다.

“네 돈은 염려 마! 감옥에서 나오는 날엔 뭐라도 시작할 수 있도록 할 터이니……”

그는 친구의 이 말 한마디가 그래도 고맙고 고마웠습니다.

“암! 사나이끼리의 우정인데… … .”

아무런 연락없이 자취를 감춰버린 친구가 원망스러우면서도, 어디선가 그의 이름을 부르며 나타나 줄 것만 같았습니다. 또 그의 어깨를 감싸주며, “고마워! 내 사랑하는 친구여!” 하는 음성이 들릴 것만 같았 습니다. 34개월의 응고된 아픔도 그 한마디에 치료될 것만 같았습니다. 아픔이 거절되었을 때, 인간은 마치도 형극을 당한 것같은 또 하나의 모진 경험을 얻게 됩니다.

“그때 싸우다가 누님 전화번호와 주소가 있는 수첩을 잃어버렸어 요. 누님이 캘리포니아 코리안 타운의 중심지에서 장사를 했어요. 찾아가면 알 수 있을 거예요!”

그는 오히려 나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듯, 염려하지 말라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코리안 타운? 4월 30일에 있었던 Rodney King 사건이 떠올랐습니다. 미음과 원망, 인종 차별의 욕설, 불타는 상점과 집, 대답 없는 911, 장총을 들고 서 있는 한국 청년들, 여인들의 통곡소리, 잿더미 앞에 실성하여 쓰러지는 부부, 초토화된 올림픽 상점가, 총성, 성난 흑인들의 광란, 도둑질 등등.

“혹시 코리안 타운의 화재에 대하여 들으셨나요? … … 거긴 이미 잿 더미가 되어……”

가슴속에 가라앉은 앙금이 갑자기 뿌옇게 일어나며, 그의 얼굴을 차마 마주 대할 수가 없었습니다. 멀찌감치 아이들이 낙엽 위에서 소리지르며 뒹구는 모습이 뿌옇게 안개가 되었다가 사라졌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소식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누님 가게만은 괜찮을 것이라고 다짐하듯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목사님은 그를 면담하고, 어떤 길이 그를 위한 최선의 방법인지 본인의 의사를 물었습니다. 그는 보스턴 어느 유명 음식점에 요리사로 있는 친구를 찾아가기를 원하였습니다. 그 친구라면, 자신이 두 발로 사회에 설 때까지 부담 없이 돌봐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빠듯한 여비와 식사비를 손에 넣은 그는 안도의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떨구었습니다. 그리고 해저무는 길을 총총히 떠나갔습니다.

그가 비워낸 빈 접시를 닦으며, 자꾸만 눈물이 치솟았습니다. 오늘 따라 유난히 붉은 빛을 드러내고 있는 노을 때문인가? 한여름의 폭풍우 비바람 속에서도 끈질기게 생명력을 자랑하던 나뭇잎들이 그가 떠난 자리 위로 우수수 떨어져 내렸습니다.

우리는 번번이 상처를 주고받으면서도 인간을 믿고 찾으며 그리워 합니다. 얼마나 많은 날들과 순간들을 낭패함 속에서 당황하였던가요?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음성은 은폐시키고 방랑의 길을 마다 않고 떠나는 것이 우리의 상정인가 봅니다.

우리의 진정한 친구를 어디서 만나며 찾을 수 있을지? 조나단과 다윗의 영원한 우정을 기억하며, 우리를 불러 ‘친구’라 부르신 하나님의 감히 당해낼 수 없는 그 자비와 사랑에 감격으로 목이 메입니다.

Posted in Essay by WanHee Yoon, Ministry, The People Who Remained in the City | Leave a comment

“My Elderly Friend”

This year, Mrs. Louise Wegi, now 92 years old, decided to sell her car.

Though two years younger in appearance than her actual age, she was still working part-time as a secretary in a law office. Petite in stature and always neatly dressed, she presented herself as well as any young person. She favored pink and blue outfits, never forgetting to accessorize. Her necklaces and earrings, all handed down through generations, were sources of endless stories. Whenever anyone admired them, she would recount their history—when and where they had been purchased, who had given them to her, and what occasion marked their passing down. The missing stones or out-of-fashion colors didn’t matter to her; what mattered was the lineage of the pieces. Her cheerful face, humor, wisdom, and kindness won her deep respect and affection from everyone.

But the signs of aging, slowly appearing year after year, were inevitable. She finally acknowledged she could no longer drive the gray car she had purchased back in 1965. She advertised it in the newspaper and sold it at a good price. Considering most Americans change cars every four years, her car had been blessed with a careful owner. Though 26 years old, its odometer read only 25,000 miles—what most people would drive in two years. This showed her life was stable and without great upheaval; living in the city, she often used buses and trains instead.

“How do you feel about selling the car?”

“Well, first, I’ll save money on insurance. Second, I won’t have to worry about losing it!”

Her thinking was always positive.

“Let’s pop some champagne when the car is driven away!”

“Good idea! After all, we must admit to ourselves when the time has come… Things we could do ten years ago, we cannot always do today.”

Born in 1900, she often emphasized that what she had learned after nearly a century of life was summed up in one word: gratitude. Married at 19, she obeyed her husband’s wish that she not work outside the home. But when he died of cancer in 1950, she supported herself for more than forty years as a secretary.

With a 55-year-old daughter living in a hospital due to cerebral palsy, she even counted as blessings the simplest abilities—being able to dress oneself, to eat by oneself. She spoke with pride that her greatest blessing in life was having a daughter with cerebral palsy, for that daughter opened her eyes to God, gave her a grateful heart for even the smallest things, and became, in her words, “the greatest gift of God.”

“The saddest thing about growing old,” she said, “is having to endure the frailty of the body. When you are young, the body follows the will and spirit. But in old age it is different. Even when the mind urges one step forward, the legs no longer move.”

Her steps grew slower than the year before, and she often spat when she spoke. Yet she faithfully attended church and community programs for seniors, taking responsibility and serving as much as her strength allowed.

I remembered another elderly friend who once told me: “In old age, just knowing you are still among the living is enough satisfaction.” She had served over forty years as a high school English teacher, and after retirement lived alone in a large house. Quiet and reserved, Francis did not like socializing much. Soon after retiring, her health declined rapidly. Finally, she entered a private senior apartment, and within a year, passed away.

“For the first three months, I checked the mailbox every day, hoping someone might send me a letter. But after three months, I gave up even that hope.”

That lonely echo was shared by someone who had visited her for the last time. When news spread that she was moving into the senior apartment, her friends felt both sadness and relief. The facility was renowned for having excellent doctors, nurses, and care 24 hours a day, yet no one could stop her from going.

It was only after spending half my life that I learned to see myself clearly. I regret that for a long time I valued only material “comfort,” making my family suffer and tormenting myself with coldhearted ambition. I now repent of those barren years, and recognize I too am growing old.

“Everything is meaningless, utterly futile; nothing has real value.

What do people gain from all their labor?
Generations come and go, but the earth remains forever.
The sun rises and sets, hurrying back to where it rises.
The wind blows south and north, swirling round and round.
Rivers flow into the sea, yet the sea is never full;
the waters return to the rivers and flow again.

All things are wearisome, more than one can say.
The eye never has enough of seeing, nor the ear its fill of hearing.
What has been will be again; what has been done will be done again;
there is nothing new under the sun.

Is there anything of which one can say, ‘Look! This is new’?
It was here already, long ago.
No one remembers the former generations,
and even those yet to come will not be remembered
by those who follow them.”
(Ecclesiastes 1)

Just as King Solomon lamented the vanity of life, so I also glimpse the fleeting nature of time in my elderly friends.

“At this age, marriage, raising children, wealth, and fame no longer mean anything to me. What I hold onto now is simply gratitude—the joy of living one more day in health, without being a burden to anyone.”

As her car disappeared into the distance with its new owner, Mrs. Louise Wegi slowly waved her hand. At some point in life, she had grown accustomed to letting go of what she once possessed.

Standing in the cold winter wind, her small figure looked like a statue covered with the dust of time, bearing the sign “Past,” unmoving from its place.

(Letter from the Parsonage – Those Who Remained in the City, Story Ten, 1992)

© WanHee Yoon

9,200+ Old Woman Snow Stock Photos, Pictures & Royalty-Free Images - iStock
Posted in Essay by WanHee Yoon, The People Who Remained in the City | Tagged , , , , , , , | Leave a comment

“나의 노인 친구” (목사관 서신, 도시에 남은 사람들, 열번째 이야기) 1992, 윤 완희

올해 92세인 미세스 루이스 웨기가 자동차를 팔게 되었습니다.

연세에 비하여, 2년은 젊어 보이는 그녀는 현재까지도 변호사 사 무실에서, 파트 타임으로 서기 일을 하고 있습니다. 작은 키에 곱게 차린 모습은 어느 젊은이 못지않게 언제나 깔끔한 성품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분홍색 옷과 청색 옷을 즐겨 입는 그녀는 한번도 액세서 리를 빠뜨리지 않고 곁들였습니다. 그녀가 걸고 다니는 목걸이와 귀 걸이 등은 대대로 물려받은 것들이어서, 누구든지 그녀의 보석들이 아름답다고 말만 꺼내면, 그 보석들에 관한 내력을 들어주어야만 했 습니다. 보석의 알이 한둘씩 빠져나갔거나, 색깔이 유행이 맞지 않은 것과는 상관없었습니다. 그녀에게는 할머니로부터, 또는 어머니로부 터, 몇 년 전 어디서, 무슨 일로 구입하게 되었고, 물려받았다는 사실 이 더욱 값지고 귀한 것으로 여겨질 뿐이었습니다. 명랑한 얼굴에 그녀 특유의 유머와 사고방식, 지혜로움과 친절함은 모든 이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게 했습니다.

그러나 해마다 조금씩 찾아오는 노쇠 현상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 습니다. 그녀는 1965년도에 사서 쓰던, 회색빛 자동차를 더 이상 운전 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신문에 광고를 내어 좋은 값으로 팔게 된 것이 었습니다. 보통 4년에 한번씩 자동차를 바꾸는 미국인들의 경향을 따 져 볼 때 그녀의 자동차는 주인을 잘 만난 것입니다. 자동차의 나이가 26년이나 되었으나, 그녀가 타고 다닌 마일 게지는 25,000마일로, 보 통 사람들이 약 2년간 타고 다닌 거리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도시에 살면서 주로 버스나 기차를 타고 다니기도 하였겠지만, 그녀의 생활 권이 안정되고 큰 변화없는 삶을 살았음을 보여줍니다.

“자동차를 팔게 되니 기분이 어때요?”

“첫째, 자동차 보험을 절약해서 좋고, 둘째는 잃어버릴 염려를 하지 않아서 좋지요?”

그녀의 생각은 언제나 긍정적이었습니다.

“자동차를 끌어가는 날, 샴페인이라도 뿌립시다!”

“좋지! 역시 사람은 자신을 빨리 인정해야 된다고… …. 10년 전에 할 수 있었던 일이라도 오늘은 할 수 없는 일들이 있거든… …. “

1900년도에 태어나 거의 1세기를 살아온 그녀가 깨닫고 느낀 것은 감사’라는 단어임을 언제나 강조하였습니다. 19세에 결혼을 하여 직 장생활을 반대하는 남편의 뜻대로 가정을 지켜오던 그녀는 1950년에 암으로 남편을 잃은 후, 40여 년 이상을 비서직으로 살아왔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뇌성마비인 55세 된 딸을 병원에 두고 있는 그녀에게 는, 옷을 혼자 입을 수 있고, 밥을 혼자 먹을 수 있는 것조차도 감사의 조건이 되었습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지금까지 받은 복 중에서 가장 큰 복도 뇌성마비의 딸을 갖게 된 것임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였습니 다. 그 딸은 자신의 삶에 가장 긍정적인, 신을 향한 눈을 뜨게 해주었 으며, 생활에 감사의 넘치는 조건들을 일일이 깨우쳐준 가장 큰 하나
님의 선물임을 눈물겹도록 감사하였습니다.

‘나이가 들어 가장 안타까운 일은, 육신의 연약한 한계에 더물러야 된다는 것이지요 젊었을 때 육신은 혼과 정신에 따라서 움직여 주지 만, 늙으면 상황이 전혀 다르지요. 한 발자국을 옮기려 하여도 마음은
급한데, 다리가 전혀 움직이지를 않아요!”

작년보다도 걸음결이가 느려지고, 말씀을 나누실 때마다 침을 튀는 횟수가 늘어난 그녀였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교회나 동네의 노인 들을 위한 모든 프로그램에 열심히 참석하면서, 자신이 감당할 수 있 는 능력껏 책임과 봉사를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늙어지면 하루하루의 산사람 틈에 끼어 있음만을 확인하는 것으로 그저 만족한다는 어느 노인 친구의 말이 생각납니다. 그녀는 40여 년 을 고등학교 영어 선생님으로 봉직한 후 혼자서 큰 집을 지키며 살아 가고 있었습니다. 성품이 조용하고 남과 어울리기를 별로 즐겨하지 않던 프랜시스는 은퇴를 한 뒤 너무도 빨리 쇠약해져 갔습니다. 결국 엔 거동조차 힘겹게 되어 사립 노인 아파트에 들어간 후, 1년 만에 세 상을 떠나시고 말았습니다.

“처음 3개월 동안은 행여나 누구인가 편지를 보내줄 것이라는 기대 감으로 매일 우체통을 열어 보았답니다. 그러나 그 희망조차도 3개월 후에는 포기하고 말았지요.”

프랜시스를 마지막으로 방문하고 온 사람에게서 전달된 그녀의 쓸 쓸한 여운이었습니다. 그녀가 사럽 노인 아파트로 이사간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를 알고 있는 주변 사람들은 서운해하면서도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들 했습니다. 24시간을 상주하고 있는 의사, 간호사들과 미 국에서는 제일의 시설과 환경을 갖춘 소문난 곳이었지만, 아무도 그 녀의 갈 길을 붙잡지 못하였습니다.

인생의 절반의 세월을 소비한 후에야 내가 나를 바라보는 여유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여유라는 것을 한동안 물질적인 것에만 가치를 두고 살았던 것에 대하여 막심한 후회를 하게 됩니다. 그 당시 나의 잘 못된 여유에 대한 이해로 인하여 가족들을 고생시키고, 나 자신을 들 볶던, 삭막하고 인정머리 없던 시절에 대하여 참회를 하게 됨을 볼 때 나도 늙어가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모든 것이 헛되고 무가치하여, 의미가 없으니 아무것도 소중한 것이 없구나.


사람이 평생 동안 수고하여 얻은 것이 무엇인가?
세대는 왔다가 가지만 세상은 변함이 없구나.
해는 떴다가 져서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되돌아가며, 바람은 남으로 불고 북으로 불다가 돌고 돌아 다시 돌아가고, 모든 강물이 바다로 흘러도 바다를 다 채우지 못하며, 그 물은 강으로 되돌아가 다시 바다로 흐른다.

만물의 피곤함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으니, 사람이 아무리 많은 것을 보고 들어도 만족함을 모르는구나.
전에 있던 것도 다시 있을 것이며, 이미 한 일도 다시 하게 될 것이니, 세상에는 아무것도 새로운 것이 없다.

‘보라. 이것은 새 것이다.’ 하고 말할 수 있는 게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오래 전에 오래 전부터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과거에 일어난 일을 기억하지 않으니, 앞으로 울 세대들도 우리 시대에 일어난 일을 기억하지 않으리라. (전도 서 1장)

부귀와 영화를 누렸던 솔로몬 왕이 인생에 대한 허무함을 탄식했던 것같이 나의 노인 친구에게서 제한된 기한의 허무함을 보게 됩니다.

“이 나이엔 결혼생활, 자녀양육,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도 내게 아무 런 의미를 주지 못하게 되지요. 즉, 바로 이것만이 절대적이라는 생각 들이 모두 사라진답니다. 그저, 오늘 하루 건강한 몸으로 남에게 신세 지지 않고 산 것에 대한 감사와 감격뿐이라오.”

미세스 루이스 웨기는 새 주인에 의하여 멀리 사라져 가는 자동차 를 바라보며 천천히 손을 흔들었습니다. 그녀는 언제부터였는지는 몰 라도, 갖고 있는 것들에 대한 포기에 익숙해진 듯하였습니다.

찬 겨울 바람결에 서 있는 그녀의 자그마한 체구가 마치도 ‘과거’ 라는 푯말을 붙인 먼지 쌓인 동상처럼 오래도록 그 자리에서 떠날 줄 을 몰랐습니다.

9,200+ Old Woman Snow Stock Photos, Pictures & Royalty-Free Images - iStock
Posted in Essay by WanHee Yoon, The People Who Remained in the City | Leave a comment

A Lone Path

A lone path slips into the wind—
a road of the heart with no return.

Even the wind halts,
leaving only footprints
on that one and only way.

It becomes my mother’s voice,
calling me from far away.

What rises like a boat
rides the curve of a fishing line—
a sleep that cannot be caught.

The fisherman wandered
for five thousand years
just like that.

What rises without sound
is always alone,
in the grave that is mine,
where sound becomes wind.

[Wind Series – Last Part]

© TaeHun Yoon, in Autumn, 1970

Create a picture of a fishing man on a boat, surrounded by calm water and soft morning light. The scene should evoke solitude, patience, and quiet reflection, with gentle ripples and misty atmosphere. No text or words should be included.
Posted in Poetry | Leave a comment

외길

바람 속으로 숨어 들어온 외길은

돌아갈 수 없는 마음의 길

바람도 멈추고,

발자국만 남는

그 하나뿐인 길은

어머니의 소리가 되여 나를 부른다.

아주 멀리서

배처럼 떠오르는 건

낚시줄의 곡선을 타고

못 이루는 잠

낚시꾼은 반 만년을

그렇게 돌아 다녀 다녔다.

소리없이 떠오른

늘 홀로인

내 무덤 속에

소리가 바람이 되여.

{Wind Series – last part]

© TaeHun Yoon, 1970 한 가을에

Create a picture of a fishing man on a boat, surrounded by calm water and soft morning light. The scene should evoke solitude, patience, and quiet reflection, with gentle ripples and misty atmosphere. No text or words should be included.
Posted in Poetry | Leave a comment

최종 진단서

아우슈비츠에서,
도망칠 때,
남겨 두어야만 했던 것은
바로 오늘이었다.

“과거에 살라.
그리고 빛보다 더 빨리
미래로 달아나라.
나는 다시 나를 만난다—
더 젊은 나,
적어도 그에게
나는 오르리라.”

이것이 바로
이상*이 「선에 대한 각서」에서
보여준 방향—
불타며 전진하는
맹렬한 심장이었다.

봇짐은
다른 불 속에서
눈을 감았다.

도망치는 척도는—
우주의 모독을 지나며—
제도 자체의
죽음과 생명을
갈망한다.

그래서,
낚시꾼은 오직
슬피 우는 어머니의 음성만
끌어올린다:

“절망하라,
그러나 나는 태어난다,
나는 다시 태어난다!”

떨리던 낚싯줄은
퉁겨 나아가며,
아, 저울질한다,
갇힌 자들의
비스듬한 어깨를.

  • [위키백과] * 이상(李箱, Yi Sang)은 1910년 김해경(金海卿)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나, 한국 현대문학에서 가장 혁신적이고 수수께끼 같은 인물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습니다. 그의 짧지만 강렬한 문학 활동은 일제강점기 동안 펼쳐졌으며, 오늘날에도 그의 작품은 독자들에게 도전과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 정규 문학 교육을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상은 실험적인 구조, 과학적 상징, 초현실적 이미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종종 말장난, 동음이의어, 심지어 시각적 요소까지 활용하여 작품을 구성했으며, 그로 인해 그의 글은 해석하기 어려운 것으로 악명 높습니다.
  • 「오감도」: 추상적인 스타일로 논란을 일으킨 시집. 당시 일부 평론가들은 이를 “광인의 잠꼬대”라며 폄하했지만, 현재는 한국 모더니즘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 「날개」: 소외와 실존적 절망을 탐구한 단편소설.
  • 「거리 밖의 거리」: 육체적 고통, 도시의 쇠락, 식민지 비판을 하나의 몽환적인 몽타주로 압축한 초현실적 시.
  • 이상은 결핵을 앓았으며, 사망 직전 일본 제국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습니다. 그의 병과 고립은 글쓰기에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외로움, 죄책감, 사회적 분열이라는 주제를 자주 반영했습니다.
  • 오늘날 그는 파격적인 언어와 이미지로 자신이 살았던 분열된 세계를 반영한 선구적 모더니스트로 기려지고 있습니다. 그의 작품은 식민지 트라우마, 정체성, 표현의 한계라는 주제를 강렬하게 드러냅니다.

[Wind Series – Part 9]

© 윤 태헌, 1970

Posted in Poetry | Leave a comment

“Final Diagnosis”

At Auschwitz,
when fleeing,
one had to leave behind
the present day.

“Live in the past,
and flee into the future
swifter than light.
Once again,
I will meet myself—
a younger self,
to whom at least
I ascend.”

This was the direction
Yi-Sang* revealed
in his Notes on the Line:
a fierce heart
burning forward.

The bundle closed its eyes
in the other fire.

The fleeing measure
through the desecration of the universe—
desires nothing less
than the death and life
of the system itself.

And so,
the fisherman lifts only
a sorrowing mother’s voice:

“Despair,
yet I am born,
I am born!”

The trembling line
snaps forward,
gauging, oh! gauging,
the slanted shoulders
of the imprisoned.

  • [Wikipedia] * Yi Sang (이상, 李箱), born Kim Haegyŏng (김해경, 金海卿) in 1910, is one of the most revolutionary and enigmatic figures in modern Korean literature. His brief but blazing career unfolded during Korea’s Japanese occupation, and his work continues to challenge and inspire readers today. Despite his lack of formal literary training, Yi Sang’s writing is known for its experimental structure, scientific symbolism, and surreal imagery. He often used wordplay, homonyms, and even visual elements in his texts, making his work notoriously difficult to interpret. “Crow’s Eye View” (오감도): A series of poems that stirred controversy for their abstract style. Some contemporaries dismissed it as “the sleep talk of a lunatic,” yet it’s now considered a cornerstone of Korean modernism.
  • “The Wings” (날개): A short story that explores alienation and existential despair.
  • “Street Outside Street”: A surreal poem that collapses bodily pain, urban decay, and colonial critique into a single, haunting montage.
  • Yi Sang suffered from tuberculosis and was arrested by Japanese imperial police shortly before his death. His illness and isolation deeply shaped his writing, which often reflects themes of loneliness, guilt, and societal fragmentation.
  • He’s now celebrated as a visionary modernist, whose fractured language and imagery mirrored the fractured world he lived in. His work speaks powerfully to themes of colonial trauma, identity, and the limits of expression.

Wind Series, Part 9


© TaeHun Yoon, 1970

Posted in Poetry | Tagged , , , , |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