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 속의 교회, 이중 문화 가정을 위한 교회성서적 관점 (제 2 장) 뉴욕, 1995

교회 생성을 향한 변형 연습 (제 2 장 )

1. 성서를 오용하는 이유

성서는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을 자신의 모습으로 창조했고, 영생을 어떻게 소유하며, 그리스도인의 모임에는 인종 우월성을 위한 자리가 없음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면 왜 많은 사람들이 이중문화 가정이 성서에 기초하다는 것에 대항하는 편견을 주장할까?

            많은 사람들이 반대 주장을 위해서 성서는 이중문화결혼을 반대하고 있다는 말 이외에는, 그 이유를 제공하지도 못하고 또 앞으로도 성서에서 밝혀낼 수가 없을 것이다. 한편 어떤 사람들은 느헤미야 13장 25절을 들어 주장한다. 느헤미야가 이스라엘인을 향하여, “내가 책망하고 저주하며 두어 사람을 때리고 그 머리털을 뽑아 이르되 너희는 너희 딸들로 저희 아들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 아들들이나 너희를 위하여 저희 딸을 데려오지 않겠다고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라 하고”한 말을 들고 있다.

            Lewis Arthur는 이에 대하여 언급하기를, “고대 이스라엘의 법의 분석과 이중문화 결혼의 실제 실천은 성서가 다른 인종과의 결혼을 금지하거나 비난 한 것이 아니라 다만 우상 숭배와 비신앙인의 결혼을 금하고 있다”라는 결론으로 인도한다. 개방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분명한 것은 이와 같은 성서의 인종차별적 해석은 보증되지 않은 부당한 것이라는 사실이다.1

이중문화결혼을 반대함에 성서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정당화는 아담 창조 이전에 그 관점을 두고 있다. Lord’s Covenant Church라는 교단은 창세기 1장 11절로 이중문화결혼을 반대하고 있다. 이 구절을 해석하기를, 이 땅이 백인 인종의 순결과 성경의 “그들의 다른 종류들에 의하면”이라는 구절이 바로 자신들이 다른 인종과 분리되여야함을 가르치는 구절로 보아서, 하나님이 분리하신 씨앗으로 부터 열매를 맺는 것으로 보고있다.2 또 어떤이들은 신명기 22장 9절, “네 포도원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라 그리하면 네가 뿌린 씨의 열매와 포도원의 소산이 다 빼앗김이 될까 하노라”를 들면서 이중문화결혼을 반대하고 있다.

            ‘두 종자(種子)’에 근거한, 상기의 이중문화결혼을 반대하는 두 성서의 구절들에 기초한 이론들은 사람들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 아담 이전 창조에 근거하는 것이다. 성서는 모든 인류는 한가지의 근원으로 부터 나온 것을 가르치고 있다. 창조의 다원발생 이론(多原發生, POLYGENISTIC THEORY)은 어떤 신조라도 거절해야 성서적인 해석이 된다.

창세기 9장 18-27절을 보면 이중문화 결혼을 반대하는 주된 성경구절을 발견하게 된다.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비라 노아의 이 세아들로 좇아 백성이 온 땅에 퍼지니라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안에서 벌거 벗은지라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매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뒥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안니하였더라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이 구절은 저주의 인용구로 기독교인이나 비기독교인들에 의해서 자주 쓰인다. 창세기의 인용들은 모두 노아의 홍수 이후에 일어난 일들이다. 노아는 홍수에서 살아나온 세 아들이 있었다. 근본적으로 아담의 후손이라 할지라도 모든 이 땅의 거주자는 모두 이 가정으로 부터 시작한다. 노아의 아들인 함이 아버지의 벗은 몸을 보았다. 이 사실을 노아가 알았을 때, 노아는 막내 아들인 가나안을 저주하기를 가장 비천한 노예가 그의 형제가 될것이라고 했고 다른 두 아들, 셈과 야벳은 축복을 받았다. 인종차별주의자들과 더불어 일반인들은 생각하기를 노아의 세아들들이 흑인종, 황인종, 백인종 등의 세계인종의 출발로 보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잘못된 인종차별주의자들의 성서해석 때문에 우리는 이 구절에 대한 바른 해석을 보아야한다.

첫째로 그 노아의 저주가 함에게가 아니고 막내인 가나안에게 내려졌다는 사실에 혼돈하고 있다. 그러면 가나안 사람들이 우리가 이야기하는 흑인들을 말하는 것인가? William F. Albright에 의하면 “가나안의 후손은 창세기 10장 15-19절에 기록되여 있다. 분명한 사실은 이 가나안 사람들은 틀립없이 아프리카의 후손들이 아니며, 그 당시의 고대세대가 말하는 검은 피부의 사람들로 사려되지 않는다.”5 그 저주를 일종의 예언으로 보는 견해가 가장 타당할 것이라 본다. 히브리인이 가나안은 정복했고, 그 결과로 가나안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종이 되였다. 모든 인종들 가운데에서 가나안 사람(Canaanites)들이 가장 백인(Caucasians)과 가깝게 일치가 되는 인종이 아닌가! 또한 노아는 하나님이 아닌 것은 당연한 사실을 하나님이 열등 종을 저주한 것처럼 해석하는 우를 범해서는 않될 것이다. 노아는 아들 함이 술취한 자신을 깨웠을 때 한 저주이다. 이에 따른 아무런 피부색갈에 대하여 언급된 일이 없다. 전혀 무관한 언급이 인종으로 연결된 해석이다. 그리고 이 저주로 어떠한 신체의 변화를 일으켰다는 언급이 없다.6

2. 이족 결혼에 대한 성서적 해석

그러면 성서는 이중문화결혼에 대하여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 성서는 하나님의 창조에는 하나됨과 평등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사도행전 17장 24,26절을 보면,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년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다음과 같은 수사학적 질문을 가지고 말라기 선지자는 인류의 단성(單性) 생성(生成)적 근원을 언급하고 있다. “우리는 한 아버지를 가지지 아니하였느냐?” “한 하나님의 지으신 바가 아니냐?”(말라기 2장 10절) 성서적으로 말하자면 창세기에 기록되여 있는 인간의 기원과 또 다른 인간의 기원이 전 아담 창조설 내에 인간 창조와 다를 수가 없다.

민수기 12장 1-6절에 보면,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난하는데 그 이유는 모세가 구스(Cushite) 여인을 아내로 맞았기 때문이다. 구스는 함의 첫째 아들 이였다. 이는 히브리 시람들에게는 대부분의 남쪽지역의 사람들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었다. 하나님은 모세의 이중문화결혼을 반대하는 미리암과 아론을 벌했다.

또 다른 유명한 성경의 대표적인 예는, 이스라엘 사람과 가나안 여인 라합과의 이중문화결혼이요, 이스라엘 사람(Boaz)과 모압 여인 룻과의 이중문화결혼이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 이방여인과 결혼한 것 때문에 그들의 공동협력이 축복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에 대하여 논란할 것이다. 매우 흥미있는 견해이나, 그러나 마태복음 1장 5절에 보면 이 두 여인의 이름이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의 이름으로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성서가 이들의 이름을 명예스러운 자리에 놓고 있음을 분명히 해주는 증거임을 밝혀주는 것이다.

3. 자기 중심화 성서 해석

            왜 어떤 기독교인들이 성서를 인종차별의 근거로 사용하고 있는가? 인종차별은 자신이 속한 세계관 속에서 자신의 소수민족을 상대적으로 우월하다는 감정과 생각 및 신념을 갖고 자신의 소수민족을 중심화하게 되는데, 그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교만의 죄인 것이다. 그러나 성서는 분명히 하나님의 안목 안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창조되였음을 가르치고 있다. 인종차별주의자들의 태도의 또 하나의 이유는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한 민족과 개인을 선택함을 잘못 이해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교리는 사람들의 우월성에 기초되여 있지 않고 반면에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은혜에 기초하고 있다.

성서의 잘못된 해석이 바로 인종차별주의자들이 성서를 사용하여 방어의 벽으로 썼던 가장 큰 원인이 되였다. 성서가 세계에서 가장 잘못 인용되는 책임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4. 개방적 해석의 성서적 근거

하나님의 창조속에는 ‘과정물질(過程物質)’도 포함되여 있다. 이는 어떤 생명체나 조직체가 미래를 향하여 열려 있지 않고 그 자체 속에 폐쇄되어 있다면 그것은 언젠가는 사멸할 수 밖에 없다는 말이 된다. 따라서 김균진 교수는 ‘개방성’을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7 (1) 자신의 미완결성을 전제 한다. (2) 자신의 불완전성을 전제한다. (3) 자신의 부정성(NEGATIVENESS by Hegel)을 전제한다. (4) 역사에 있어서의 질적인 새로움(NEWNESS)과 질적으로 새로운 변화를 전제한다. (5) 아직도 도달되지 아니한 미래를 전제한다. 결국 종합해 말하면 개방성은 이 세계가 역사임을 전제한다. 따라서 역사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개방성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있음을 뜻한다.

            개방성의 개념에 대한 성서적 근거는 무엇인가? 창조신앙에서 발견된다. P문서에 속하는 창세기 1장에 의하면 하나님은 인간과 그의 세계를 말씀으로 창조하신다. 따라서 인간과 그의 세계는 하나님의 말씀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존재 자체와 구별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로 부터 “유출(EMANAION)된 것도 아니요 신화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신적 본질과 그의 힘들의 재표현도 아니다.”8 인간과 그의 세계는 신성과 신적 질서를 그 안에 가지고 있는 신화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구별된 피조물이요 “하나님의 한 대상 (EIN GEGENUBER GOTTS)”9 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본질의 유출”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유로운 의지에 의하여” “무로부터 창조”되었다.(CREATIO EX NIHILO)10

다른 한편 인간과 그의 세계는 자기 자신과는 전혀 다른 하나의 대상을, 곧 하나님을 가진다. 따라서 “하나님을 향한 개방성”이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된 인간과 이 세계의 기본적 규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하나님에 대하여 개방된 상태 속에서 살도록 규정되어 있다. 이 하나님은 세계안에서 언제나 새로운 것을 불러 일으키는 존재, 살아계신 하나님이다. 그러면 여기서 ‘더불어’를 향한 ‘열림'(개방)의 활동력인 창조의 3가지 모습을 살펴보자: (1) 출애급속에 생성 (EXODUSGENESIS), (2) 십자가 속에 생성 (CROSSGENESIS), 그리고 (3) 생명속에서 하나님의 창조 역사(LIFEGENESIS)를 볼 수가 있다.

1) 출애급-창조 (EXODUSGENESIS)

성서는 ‘한 이야기를 말하고 있다.’ 어떤 역사가들은 인류가 성서에서 비로소 역사를 기록하기 시작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성서의 신앙이란 역사를 알고 역사 속에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행위를 통해 자신을 알게 한다. 그러므로 시작에서 부터 행위가 성서에 일치하는 신앙을 위해서 중요하다. 성서에서 반복해서 출현하는 개념은 “야훼는 살아계시는 하나님이시다.”라는 것이다.(이사야 8:19, 왕상 17:1, 삼상 17:26-36) 그 분은 행동하는 하나님이다. 말씀하는 하나님이다. 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다. 성서는 다른 신들을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고”(시 115:5)라고 조소한다. 이와는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다.(이사야 55:10-11) 야훼의 말씀은 말인 동시에 사건인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신앙고백은 언제나 역사적 사건들과 관련된다. 이것들이 소위 역사적 신조들이다. ” … 야훼께서 강한 손으로 애급을 내려 치시고 우리를 거기에서 이끌어 내셨다. … 이렇게 우리를 거기서 이끌어 내신 것은 우리 선조들에게 주겠다고 맹세하신 땅에 우리를 데려다가 그 땅을 차지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신 6:20-25)

주님은 유대 민족을 예속과 억압에서 자유케 한다. 그리고 그는 표징을 통해 그의 볼 수 있는 행위를 확고히 하게 한다. 착취의 상황으로부터의 이러한 돌파는 약속의 성취에서만 진정한 감사가 될 수 있다. 유대 민족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된 땅에 정착하게 되는데, 이번에는 그것이 미래에 성취되어야 할 약속이 된다. 이러한 야훼의 해방 행위는 유대 민족의 형태의 토대가 된다. 그 민족의 ‘올바른 삶’은 야훼의 계명들이 실천되는 것과 관련될 것이다. ” 제 선조는 떠돌며 사는 아람인 이었습니다. … 야훼께서는 우리의 아우성을 들으시고 우리가 억눌려 고생하며, 착취당하는 것을 굽어 살피셨습니다. … 우리를 애급에서 구출해 내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를 이곳으로 데려오시어 젖과 꿀이 흐르는 이 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신 26:5-9)

여기서 다시 우리는 기본적으로 같은 이념을 발견하게 된다. 야곱(떠돌이 아람인)에 대한 언급은 유대 민족의 역사적 기원과 온당한 출발을 표현하고 있다. 다시 한번 모든 촛점이 애급에서 고난당했던 억압으로 부터의 해방에 맞추어진다. 성서의 신앙의 하나님이 계시되는 것은 그 해방 사건 속에서다. 아모스 2장 20절, 3장 2절에서는 같은 ‘신조’가 간략한 형태로 나타나 있다. 그것들 모두는 다음과 같은 형태로 똑같이 요약될 수 있다. “야훼는 우리를 애급에서 구출하였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구출하는 하나님, 해방하는 하나님이다.

이러한 ‘역사적 신조들’의 문화적 맥락도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들은 야훼의 해방 행위에 대한 축하라는 틀 속에서의 신앙고백으로 구성되어 있다. 계약의 주제는 아직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우리가 발견하게되는 단 하나의 근거, 단 하나의 기본적인 역사적 사실은 에집트로 부터의 해방이다. 계약 자체는 그 뿌리를 이 해방의 사실에 두고 있다. 이스라엘의 신앙은 해방의 역사와 그것에 뿌리를 둔 계약 위에 있다.

(1) 개방은 출애급 생성

성서의 신앙에서 솟아나는 역사는 개방적인(OPEN-ENDED) 역사, 미래를 향해 열린 역사이다. 애급으로부터의 해방은 계속해서 다시 일어나야 할 사건, 야훼의 다른 역사적 개입에 빛을 비추는 사건이다.(시편 105, 106) 야훼가 이 민족을 인도하는 땅은 그들의 선조들에게 약속했던 땅이다. 그러나 그 땅이 이번에는 약속되며, 여전히 충족되어야 할 개방된 약속이 된다.

과거의 사건을 기억함으로서 신앙이 전파되는 것이 아니다. 오늘의 빛에서, 야훼의 새로운 약속들의 빛에서 과거의 사건을 재독함으로서 신앙은 전파된다. ‘나는 오늘의 바로 나다’라고 야훼는 말했다.(출3:14) 나는 미래에 존재할 나이다. 당신이 찾아야 할 나이다. 성서적 신앙의 하나님은 신앙을 미래에로 출항시킨다. 야훼의 인식은 종말론적 자세이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오늘에서의 사랑, 그 종말에의 온전한 사랑이다. 희망은 성서에 부합되는 신앙의 본질적 요소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자신을 계시하며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신앙은 역사적 틀에서 구현된다고 말하는 것 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간직해야 할 것은, 성서의 하나님은 단순히 역사를 지배하는 하나님에 그치지 않고 정의와 권리를 확립하는 방향으로 역사를 방향잡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섭리의 하나님 그 이상이다. 가난한 사람들의 편을 들며 그들을 예속과 억압에서 해방하는 하나님이다.

야훼가 개입한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의미한다. 그의 활동의 목적은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해방시키고 정의로운 통치를 위해서다.(시 68:5-6, 146:7-9) 따라서 하나님을 아는 것은 정의를 행하는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렘 22:13-16)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성서의 언어에 있어서 ‘안다’는 말은 순전히 지적인 어떤 것이 아니다. 안다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다. 죄란 야훼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즉 야훼를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며 이는 정의를 실천하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이로서 그 백성은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아, 야훼의 말씀을 들어라, 야훼께서 이 땅 주민들을 걸어 논고를 펴신다.”(호 4;1)     해방자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해방시키는 행동을 하는 것이요, 정의를 행하는 것이다. 성서에서 ‘옳다’고 할 수 있는 행동의 뿌리는 신앙의 골격을 이루고 있는 역사적 현실 속에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애급에서 구출하셨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다.(신 24:17-18) 야훼가 그의 백성에게 대하듯이 가난한 사람들을 대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올바르게 되어져야 할 것이다. “배고픈 사람을 멸시하면 죄를 받고 불쌍한 사람을 가엾게 여기면 복을 받는다.”(잡 14:21, 출 22:20-30)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실제적인 실천의 영역에서 시험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은 정의와 권리를 확립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애급에서 구출한 하나님에 대항하는 기득권을 움켜쥐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맺는 “계약”에서 더 구체적으로 ‘개방성’의 개념이 나타난다. 이제 하나님은 계약의 상대자로서 언제나 이스라엘 앞에 서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이 현재를 절대화하여 그 속에 폐쇄되지 않고 오히려 미래를 지향하도록 한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이스라엘은 미래에 대하여 언제나 개방적인 자세를 취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은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맺은 시내산 계약에 분명히 나타난다.(출 19장 이하) 왜냐하면 이 계약에 있어서 계명이 선포되는데, 이 계명은 “계약체결의 기초”11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계명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약속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계약 체결자인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의 계명을 지킬 것을 요구하고 “내 계약을 지키면” 이스라엘은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고 약속한다.(출 19:5f) 이리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철저히 하나의 역사적인 존재, 개방적인 존재가 된다. 그의 운명은 자연 질서와 같이 이미 결정된 것, 고정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에 대하여 순종하느냐 아니면 불순종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개방적인 것이다. 그의 미래 역시 이미 결정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명에 대한 순종여부에 따라 결정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그와 하나님 사이에 이루어지는 역사의 미래를 지향하며, 이 미래에 대하여 개방적인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교회 생성을 향한 변형연습은 참된 인간성회복을 통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가는과정을 말한다. 이것은 삶의 모든 방면에서 일어난다. 동등한 공동체는 정의로운 사회이며 자유로운 진실한 인간의 함께하는 삶이 있다. 하나님 나라 속에 새로운 인간상을 보는 것이다. 사회에 대한 새로운 정의, 평화, 그리고 공평의 비젼은 새로운 인간관계 속에 있고, 새로운 인간관계는 또한 새로운 인간성 회복에서 비롯된다.

‘나라’라는 성서적인 용어는 오늘날 우리들이 생각하는 국가적인 통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상의 모든 인간의 무리들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목적은 어느 곳에서든지, 어떠한 제도에서든지 사람들과 함께하여, 하나님과 동행하는 가운데 창조된 인간관계를 회복시킴으로서 하나님의 인간성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성을 상실한 애급의 노예적인 삶으로부터 제1의 해방된 후, 바벨론의 포로에서의 제2의 해방을 경험하게됐고 마지막이자 영원한 하나님의 해방 사건인 예수 그리스도의 해방의 역사를 우리는 보게된다. 우리와 늘 함께하시는 이 동일한 목적은 모든 세대와 모든 무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넘겨 주는 하나님의 계속적인 전통의 행위에서 보게 된다.

성서에서 하나님의 나라들은 언제나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증거해 주는 장면들로 나타난다. 그리고 종말론적인 선포에서 그들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인간화의 행위를 내포할 것이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모든 인간의 무리와 함께 어울려지는 것을 말한다. 시온을 향한 민족들의 순례 이념은 구약성서 전통에서 끊임없이 계속되였다.(미 4:1-3, 사 49:6) 이와같이 나라(공동체)에 대한 관심사를 통해서 히브리인에게 보이신 하나님의 관심은 일반적으로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것이라 본다.

인간의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은 하나님께서 출애급, 바벨론 포로와 돌아옴, 그리고 그 이후의 역사 속에서 구원과 축복의 약속을 세우시고 계약을 갱신하고 성취하신 이스라엘의 삶에서 거듭 거듭 경험되었다. 그 약속이 성위되었던 것 처럼 모든 약속은 미래의 새로운 약속이나 기념이 충분히 성취되고도 남을 것이다. 이러한 피조물을 회복시키는 약속을 희망의 지평선과 같은 이스라엘을 앞으로 전진하게 했고, 단순히 피조물을 회복시키는 것 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새 하늘과 새 땅”(사 65:17)을 창조하는 시대로 앞질러 가게 했다.

(2) 남여 평등은 출애급의 생성

            성의 구별은 인간성 본질의 문제이다. 이것은 원초적 질서로 나타나며(창 1:27, 2:18), 타락으로 인하여 인간성이 부패했음에도 불구하고(창 2:22-23, 3:16, 3:20) 성 구별은 일정하게 지속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성 구별은 인간화 차원에서의 성 구별을 의미한다. 결코 불평등 관계에서의 차별적 성 구별을 의미하지 않는다.

            모든 인간 실존의 근본적 구조, 다시 말해서 동료 인간과의 관계에서의 인간 실종, 즉 그는 너(THOU)라는 관계에서 ‘너’로서 그 존재가 정의되는 사실 때문에 성 구별의 상징적 가치가 부여되는 것이다. 결국 인간 실존적 차원에서 남성과 여성은 ‘너’라는 개념을 가지고 서로의 몸속에 소속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이 개념은 서로의 동등성을 부여받은 인간성의 개념이며 ‘너’없이 ‘나’가 있을 수 없다는 의미이다.

            아담의 갈빗대를 취하여 여자를 창조했다는 것은 남자와 여자는 서로에게 소속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한 구성적인 특성을 비유적으로 암시해 주고 있다. 동시에 이 창조행위의 이유와 목적은 동료 인간성의 존재로 창조주에 의하여 결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해 준다. 인간창조 이외의 창조 사역에 대하여는 하나님이 만족스런 말씀을 하시고 그것들이 “좋다(RIGHTEOUSNESS)”고 하셨다. 그러나 인간창조에 관해서 만큼은 “좋지 않다(UNRIGHTEOUSNESS)”라는 부정적인 판단을 내리셨다.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창 2:18)라고 하셨다. 이 말은 혼자 있는 아담은 아직 “완전한 인간”이 아니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아담은 아직도 인간창조의 완성이 아니다. 그러기에 완전한 인간 창조를 위해 여성은 남성을 “돕는자”로 창조 되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돕는자”라는 의미는 고린도후서 1:24에 언급된 동역자(CO-WORKER)의 개념과 동일한 동반자 (PARTNERSHIP)라는 의미이다.12 그리고 Letty M. Russell은 개방된 사회에서의 진정한 자유는 여성이 동역자가 될 때 온다고 보고있다.13

            다시말해서 아담과 필적할 만하고, 또한 그에게 적합한, 그리고 아담과 동등한 파트너는 오직 이브(여성) 밖에는 없었다는 말이다. 즉, 두 종류의 남자와 여자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본질 자체가 남성과 여성이라고 볼 수 있다. 다시말해서 인간 존재의 병존(CO-EXISTENCE)이 아니라 인간본질인 양극성 (POLARITY)으로써의 인간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성과 여성은 후속적 차원에서 서로를 발견하지 않고 오히려 선차원적인 면에서 그들은 서로가 서로의 상대가 되는 것이다. 서로의 상대란 의미는 동등권을 가진 인간성이라는 의미이다. 그런므로 결혼은 타락 이전의 제도로서 남여간에 서로 돕고(창 2:18) 서로를 위하여 (창 2:21-22) 상대방 안에서 자신을 깨달으면서(창 2:23) 남녀의 정체를 잃지 않고 양극성을 이루는 것이다.

            우리가 보통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할 때 우리의 피조성의 의미에서와 기독론적 의미에서 인간은 창조주에 대한 직접적인 관계임을 나타내는데 이러한 관계는 곧 계급적 차별주의를 배격한다. 창조기사에는 남성과 여성 사이에 계급적인 구별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없다. 즉, “창조”의 언급에서 어떤 가치차별의 여지를 남기지 않고 있다. 남성과 여성은 둘다 창조주와 그의 행위에 대해서 동등하게 그리고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더우기 둘다 함께 이 땅을 정복하라는 명령 뿐 아니라(창 1:28하), 축복을 동시에 받고 있다.(창1:28) 우리는 종종 타락기사를 통해 결정적으로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한 지위를 가진다고 말한다.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창 3:16) 그러나 이것은 명령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의 서곡이라는 사실이 그 평행 귀절을 볼 때 분명하다. 그러기 때문에 복음서의 예수는 이러한 창조 질서 안에서 여성을 한 인간으로 대했다. 예수가 여성을 만났을 때 마다 예수는 여성이 본래 하나님의 창조 안에 있고 존중되어야할 인격체임을 나타내는 언어와 행동을 취하셨다. 예수는 타락 기사에서 말하는 혼란된 관계 이전의 단계를 말씀하고 계셨다. 그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배척하고 탄압하였다.

예수의 반 사회적인 행동은 간음한 여인에게 까지 적용되었다. 해방자 예수는 간음한 여인을 질타하는 당시의 교권적 유대주의에 대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 (요 8:7)라고 말씀하시고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어서 돌아가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 짓지 말라” (요 8:11)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그 당시 여성의 제도적, 구조적 소외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서의 여자의 동등성과 하나님이 만드신 남녀의 결속성을 우리들은 보게 된다. 이러한 모습은 그 당시 대표적인 종교지도자였던 바울에게서도 나타난다. 언뜻 보기에 바울의 태도는, 남성은 여성의 머리라는 반복된 진술을 하는 것 같이 보인다.(고전 11:3-16, 14:33b-36, 엡 5:23) 그러나 바울이 전한 복음서와 복음선교에 나타난 중심내용에는 바울은 남자들을 향해 복음을 전한 것과 같이 똑같은 비중으로 여자들에게도 그러하였다. 더우기 그는 유대의 일반적인 남성들이 가졌던 태도를 버리고 도리어 존경심을 가지고 여자들을 인정해 주었다.(고전 14:35, 딤전 2:11-15) 사도행전 16장 14절에 보면 복음이 유럽에 들어갈 때 먼저 여성들을 통해서 전해졌고, 적지않은 귀부인들이 바울의 선교에 동참하였다. (행 17:4) 바울서신에서도 이러한 사상은 기록되어 있다. (로마서 16:1-15, 16:1-2) 특히 16:3 이하에서는 브리스가 이름이 그 남편 아굴라보다 먼저 나오고 있다. 그 만큼의 바울의 마음에는 성적차별이 없었다. 그는 하나의 “동역자”로써 이해하였고, 공동체의 일원으로 이해하였다.

            그렇다면 왜 바울서신에 나타난 몇몇 귀절들이 오늘날까지 여성지위를 남성에게 종속시키도록 인용하고 있는가? 고린도전서 11:7, 11:11-12에 나오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라는 의미를 Kittel은 존재론적인 뜻에서 한 인간이 그 존재할 수 있는 근거위에 오는 사람이라고 이해 했다.14 결국 “머리”라는 의미는 지배나 권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고 창조질서를 나타내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1:7절에서도 창세기 2장의 사실을 말하고 있는데, 여자는 남자로부터 지음 받았으니 이것은 남자의 영광, 혹은 남자의 현시(MANIFESTATION)라고 하였다. 반드시 남자의 몸에서 여자를 지으셨기에 남자가 여자보다 우월하다는 것이 아니고 남자를 재료(SOURCE)로 삼아서 여자를 지었기에 여자는 남자들 편에서 영광이란 것이다. 더우기 유의할 점은 남자가 하나님의 형상인 것 같이 여자도 하나님의 형상이기에 논리적으로 보아 여자는 남자의 형상이라고 하여야겠는데 그렇지 아니하였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남자와 여자의 외형적인 머리에 쓰는 구별이 남성우위로 해석될 수 없고 다만 창조의 질서를 예로 들어 공중예배의 질서를 가르치려는 것이였다.15 결국 성경은 남녀 역할의 사회적 차이와 이에 관련된 악습 앞에 하나님의 형상(IMAGO DEI)과 하나님앞의 존재(CORAM DEO)를 사용함으로써 모든 가부장제도에 대항하여 인간 존엄성 문제와 인간동등성 문제를 잘 대변해 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가장먼저 기록됐던 마가복음은 “예수께서 안식 후 첫 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의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고하매”(마가복음 16:9-10)라고 기록하면서, 남자 제자들의 실패를 기록하고, 여 제자의 충성스러운 모습을 담고 있다. 그리고 모든 공관 복음서(마태복음 28:1-7, 마가복음 16:1-5, 누가복음 24:1-2, 요한복음 20:1-2) 가 모두 동의하는 것은 여성제자가 예수님의 부활의 첫 주인이였고 남성 제자들은 이를 처음에 부정했다는 사실이다. 누가복음은 예수가 그의 공생에에서 여성 제자들(누가복음 10:38-42)과 함께 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바울의 서신들은 “내가 게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천거하노니”(로마서 16:1)라는 그의 로마의 그리스도인에게 보낸 편지의 마감에서, 초대교회 전도 운동에 여성 지도자에 대하여 자주 언급했을 뿐아니라 그 중요한 직책을 맡기는 태도를 견지 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다음과 같이 여성의 평등을 선언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自主者)나 남자나 여자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라디아서 3:28) 그러므로 가부장적인 관점을 갖고 있는 초대 교회의 구조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교훈을 해석하는 속에는 틀림없이 자기속임 (SELF-DECEPTION)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초대교회 운동이 여성들에게 특히 매력이 있었던 것은 예수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가복음 10:43-33)는 말씀에 용기를 받은 것이리라 보아진다. 이것은 여성들의 순전한 신앙안에서의 기쁨으로 이행한 자원 봉사였다고 보아진다.

개방성의 성서적 근거는 구약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에서도 발견된다.16 즉, 하나님께서 나타나실 때 하나님은 자기의 어떤 영원한 본질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 새로운 것을 약속한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났을 때 그는 아브라함이 아직 경험하지 못한 것, 새로운 것을 약속 한다. 즉 (1) 번성하여 큰 민족을 이룰 것이며(창 2:2), (2) 가나안 땅을 주겠으며 (12:7), (3)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창 17:7) 약속한다. 이와같이 구약성서에 있어서 하나님의 계시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약속과 결부된다. 그러므로 야훼를 만남 야훼의 백성은 그가 아직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한 “희망의 백성”17 이 된다. 따라서 그는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이 속에서 폐쇄되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한 “새로운 것”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성취를 지향하게 된다. 이 약속과 성취는 구약성서에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의 범위를 벗어나 예언자들과 묵시문학자들을 총하여 세계적인 범위로 확대되었다.20 묵시문학에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의 목표는 이 시대에 올 전체의 역사의 마지막 목표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시대의 역사는 종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지향한다.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는 이역사 속에서 이루어질 것이 아니라 모든 세계사의 종말에 이루어질 것이다. 진리는 현재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이 성취될 미래에 있으며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의 미래로 부터 진리를 기다린다.

2) 십자가-창조 (CROSSGENESIS)

(1) 인식의 해방은 십자가 생성

성서는 역사적이다. 그러므로 기억이 중요하다. 그러나 성서의 신앙은 기억 만이 아니라 자유다. 그 자유(自由)는 ‘미래(未來)에의 개방성(改放性)’이다. 야훼의 해방 행위에 대한 회상은 지난날의 향수가 아니다. 모든 위대한 사랑은 첫 순간의 기억을 간직한다. 가장 강한 순간들은 기쁨의 원천이다. 어려운 순간들은 희망의 재확인이 된다. 두 경우 모두 전면을 응시한다. 미래가 과제이다. 그러므로 기억(記憶)은 창조적 자유를 가능케하는 기능을 한다. 포로기에 대해 우리가 이야기 했던 것은 기억(애급으로부터의 탈출)과 개방성(새로운 해방의 길)의 강력한 실례이다. 이와같이 이스라엘의 신앙은 기억과 해방의 변증법 속에서 움직인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위치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틀, 즉 역사 속에서의 하나님의 계시와의 연속선상에 있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절대적인 난초(亂招)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이신 하나님, 즉 아버지의 완전한 현현(顯現)이다. 그는 사랑이 약속의 완성이며 새로운 출발이다. 그는 하나님이 진리라는 증언을 품은 사람이다. 그는 아버지의 진리이고 성서의 열쇠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메시지를 믿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한 인간을 믿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에 기록한 것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당신들로 믿게하고 또 믿고 그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요 20:31, 롬 10:9) 복음이 기쁜 소식인 것은 그것이 예수에게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은 이러합니다.”(막1:1)

예수 안에서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만 자신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역사가 된다. 그는 역사의 한 복판에 ‘자신의 천막을 던진다.”(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예수가 선포한 것이기 때문에 복음은 기쁜 소식이다. 메시지는 우리의 신앙이 그것을 넘어서고 초월한다는 사실을 은폐해서는 안된다. 우리의 신앙은 복음을 관통하여 그리스도에 직접 도달한다. 예수는 이미 세계 속에 존재하고 있다. 이것은 옳다. 그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폐쇄된 역사와는 달리 이 사실은 그것에게 의심할 수 없는 통로를 개방한다. 그리스도는 현존하는 자일 뿐 아니라 도래할 자이다. 그는 우리역사의 미래에 존재한다.

이것을 우리는 파루시아(PAROUSIA, 이 말은 하늘에서 지상에 침입과 백성의 복종과 예찬을 받기 위한 왕의 내림을 의미한다. 마태 24:3, 27, 37,39, 살전 2:15, 3:13, 4:15, 5:23, 고전 15:23, 벧후 1:16, 3:4; EPIPHANEIA, 이것은 신이 예배자에게 현현하는 것과 또 로마 황제가 즉위할 때 사용하는 용어이다. 예수 재림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나타내시는 바 하나님을 대망하는 사람들과 또한 하나님을 모독하는 사람에게도 나타난다는 뜻이 있다; APOKALUPSIS, 이것은 ‘입은 것을 벗기다’ 또는 ‘발가 벗기다’라는 의미가 있다. 완전히 모든 것을 나타내 보이는 것, 권력의 덮개를 벗기는 것을 의미한다.) 재림이라고 부른다. 그것이 어떤 놀랍고 기적적인 것을 제공할지라도 파루시아는 그것을 넘어서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향한 역사의 개방성 – 기독교 공동체와 인류의 ‘현재성(現在性)’이다.

환언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눌린자가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택한 인간의 삶은 가난하고 눌림을 받는 삶이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를 아버지/어머니의 아들로 인식함에 의해서, 그 인식 속에서의 삶이다.

그는 가난하게 태어났고, 참으로 가난했고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했고, 누르는 자들을 향해 비난을 퍼부었고, 하나님 앞에서는 영적으로 가난했다. 이러한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선포하기 위해서 왔다. 마태 마가는 그들의 복음서 첫 머리에서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서 증언하면서 그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세상이 함께 함’ (GLOBALIZATION)을 의미하고 있다. 그것에서 도피할 수 있는 것은 없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한다. 말하자면 그의 사랑, 그의 아버지/어머니 됨, 그리고 형제 자매들의 공동체가 모든 인간들 가운데서 통치된다는 것이다.

예수는 가난한 자, 억눌린 자, 역사에서 소외된자들을 편들어 그들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정의와 해방의 나라를 선포하고 있다.(눅 4:16-21, 사 61:1-2)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선포, 정의를 위한 투쟁이 예수를 죽음에로 이끈다. 그의 삶과 죽음은 우리에게 참으로 가능한 정의란 유일한 정의임을 알도록 한다. 유일한 정의는 모든 불의, 모든 사랑의 배신, 모든 악의 뿌리 자체에 까지 침잠하는 것이다. 유리한 정의는 이 우정의 갈라진 틈의 모든 결과와 현상을 공격하는 것이다. 유일한 정의는 갈등으로 가득찬 우리의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구현되고 착취가 종식되는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바로 지금 시작하는 것이다.(사 65:17-22)                       

(2) 십자가 생성은 개방성의 근거

G. von Rad 교수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성서가 말하는 모든 약속의 긍극적인 완성자인 동시에 새로운 약속이다.19 신약성서에 의하면 구약성서의 약속들이 “오늘 … 이 자리에서 이루어 졌다”(눅 4:21). 그러나 십자가에 달렸고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는 단지 이스라엘의 메시야만은 아니었으며, 따라서 그를 믿는 그의 백성은 단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한정될 수 없었다. 거기에는 유대인도, 헬라인도, 종이나 자유인도, 남자도 여자도 모두 포함되었다. 신약성서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단지 이스라엘이 기다리고 있던 메시야가 아니라 모든 민족에 걸쳐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을 형성하고 새로운 세계를 형성하는 주님이었다. 그는 영원한 신성의 현현이라기 보다 본래 구약성서가 기다리던 분이며, 역사의 종말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를 미리 앞당겨 보여주시는 분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새로움은 이미 존재하는 것을 종교적으로 정당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부정적인 것이 무엇인가를 밝혀주고 부정적인 것을 부정함으로써 긍정의 세계를 지향하도록 한다. “이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하나님의 “새 하늘과 새 땅”, 곧 모든 부정적인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의 세계를 향하도록 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과거에로의 회복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제시된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약속을 뜻하며, 회상이 아니라 기대를 뜻한다. 부활은 무의미와 죽음으로 끝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세계에 대하여 “새 것”을 뜻한다. 그것은 죽음의 세계 속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이다. 따라서 부활은 이 세계의 원리에 따라 증명될 수 없다. 소위 말하는 증명이란 비유의 원리를 사용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아는 것으로 부터 출발하여 그와 유사한 것을 인식하고 증명한다. 그러나 부활은 이 비유의 원리의 적용을 받을 수 없고, 따라서 이 원리에 따라 증명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 죽음의 세계에 “속한” 것이 아니라 이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부활은 이 세계로 하여금 역사가 되도록하는 동력이 된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세계의 개방성의 근거이다.

모두가 나그네 입장에서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로 동등하며 자유의 도상 존재로 함께 길을 가야 할 것이다. 이 깨달음으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유대 사람이나 헬라 사람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의 차별이 없습니다(갈 3:28-29). 이것은 바울 이전의 사람들은 그리스도안에서 사는 삶에 대한 바울의 태도에 미치지 못했음을 알려준다. 바울은 다른이를 섬기기 위하여 자신의 계획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위해 그의 뜻을 복종시키는 일을 예수님이 했듯이 따랐다.

이를 가능케하는 것은 새 희망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이 희망은 간단한 계획이나 비젼, 교리나 전통, 신화나 이념등으로 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유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확신하는데서 우러나오는 열망과 열정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는 그리 쉬운일이 아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며 늘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롬 8:24-25). 이 자유의 희망은 그것이 나타날 때 까지 우리가 볼 수 없는 그 어떤 것 속에 있고 우리가 확증할 수도 없는 그 어떤 것 속에 있다.

하나님의 오심이나 장차 나타날 미래의 새로운 피조물은 아주 새로운 것이기 때문에 부활의 성취의 빛 아래에서 만이 충분히 이해될 것이다.20 그러나 로마서 8장 20절에 보면,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고 바울은 말한 것은 결국 그 피조물이 사멸의 종살이에서 자유해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릴 영광의 자유를 함께 누리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십자가 속에는 이미 부활의 역사가 숨쉬고 있는 것이다.

자유의 새로운 발견은 우리를 행동하게 한다. 왜냐면 하나님은 우리를 기대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치 ‘이 세상의 형태가 사라지는 것 처럼’ 우리는 지금 그렇게 살고 있으며 새로운 피조물이 이미 우리의 삶 속에 현존해 있기 때문이다(고전 7:25-31). 나비는 날 수가 있다. 그러나 나비가 나비일 수 있기전에 먼저 고치로부터 반드시 떠나야만하는 행동이 선행될 때, 나비는 진정으로 새 삶으로 자유롭게 날아 갈 수가 있다. 여기서 새 삶은 부활의 사건이요 고치를 떠남은 십자가의 삶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자유의 선물만이 오직 진정한 해방이다. “형제들이여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제부터는 아내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같이 하고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같이 하며 기쁜 사람은 기쁘지 않은 사람같이 하고 무엇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같이 하며 …”(고전 7:29- 30). 이것은 십자가를 지는 일이다. 바울의 예견인 새 시대에는 ‘온 세계가 자유하게 될 것이다’라는 예견은 역설적이다. ‘이미 … 그러나 아직도 아니다”라는 자유를 위한 싸움에로의 초대는 십자가의 핵심이다.

희랍어의 PROLEPSIS라는 말은 ‘예상’을 의미한다.21 예견적 행위는 그들이 마치 그 상황의 최소한의 한 부분을 이미 성취한 것 처럼 그들이 살면서 노력한 그 상황을 예측할 수 있다. 인종과 성별, 계급 그리고 국가적인 경계를 넘어서 한 공동체가 새로이 창조되며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믿고’ 이 땅에서 이의 부분을 재현하듯이 ‘동등히 함께하는 공동체’의 생활을 시작했다. 이것은 ‘장벽은 이미 무너졌다’고 말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그가 오실 때까지 주의 죽으심을 전하는 것”임을 보여준다(고전 11:26) 이것이 십자가와 부활의 역동적 결합의 모습이다. 그래서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 하나이다”(갈 3:28)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길이 열린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의 신비가 가장 집약적으로 계시된 곳은 십자가에서의 그의 죽음이다. 신약성서의 전승들은 부활한 주님을 십자가에서 처형된 인간 예수와 동일화시키고, 또한 그가 당한 고난과 죽음을 가난하고 억눌린 자가 당한 고난과 죽음으로 기술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예수는 두명의 강도 사이에서 죽었다. 그는 부당하게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는 한 친구로부터 배신을 당하였고 은전 30냥에 팔렸다. 그를 변호해 주는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었다. 그의 친구들도 그를 떠났다. 심지어 그가 묻힐 무덤조차 없었다.

이러한 사실들을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단순한 우연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사실들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보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주저하지 않고 예수의 고난을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 처형되었으며”, “불의한 자들과 함께 묻히고”, “반역자들 중의 하나로 헤아림 받은”(이사야 53:8-9,12) 이사야서의 고난의 종과 연결시켰다. 분명히 그들은, 일단 자신의 죽음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의식하자, 예수는 ‘고난의 종’의 역할을 받아들였다고 보았다.(마가 8:31, 9:31, 10:32-34, 마태 20:17-19, 누가 18:31-34) 베드로는 특히 예수를 “나무에 달려 우리 죄를 자기 몸에 친히 지신”(벧전 2:22-24) 하나님의 종(행 3:13,26; 4:27,30)으로 보았다. 누가에 따르면, 빌립이 에티오피아의 내시와 나눈 대화는 이사야서의 ‘고난받는 종의 네째 노래’를 예수의 죽음에 비추어 해석하는 내용이었다.(행 8:26f) 바울은 종의 모티프를 가지고 그의 십자가의 신학을 발전시켰다.(고전 1:25, 27, 빌립보서 2:8)

예수의 고난을 이사야의 ‘고난받는 종’에 비추어 해석함으로서 십자가는 가난한 자와 고통당하는 자, 병든 자와 억눌린 자를 위한 것이 된다. 그러한 상황화(CONTEXTUALIZATION)는 바울이 십자가를 화육과 연결시킴으로서 한 걸음 더 진전되었다. 바울에 의하면, 예수는 종의 모습으로 화육(INCARNATION)하였고 가장 비천한 모습을 지닌 인간과 철저하게 동일화 되었다. 십자가는 이러한 동일화(IDENTIFICATION)의 긍극적 시금석이다. 이것은 예수가 죽기까지 순종하였음(빌 2:8)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예수가 하나님에 의해 주로서 올리워졌음을 증언하는 바로 그 대목에서 바울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는 사실은, 바울이, 예수가 죽기까지 같이했던 바로 그 똑같은 사람들과 부활한 그리스도를 동일화 시키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것은 히브리서 13장 13절에서 한 걸음 더 진전된다. 여기서 예수의 죽음은 성문 ‘밖’22 – 그 곳은 제사를 드릴 때 쓰고 남은 희생의 찌꺼기를 버리는 곳이었다 – 에서 일어난 사건을 보도하고 있다. 기독교 공동체는 ‘성문밖에 계신’ 그에게로 나아가 ‘그가 당한 수치를 걸머져야’ 한다는 사실은, 들림받은 예수는 역사의 투쟁과 위험 속에, 사회의 버림받은 자들 속에 계신다고 히브리서 기자가 생각했음을 보여준다.

예수의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주관과 이 세상 왕들간의 상이성(相異性)을 두드러지게 보여준다. 이것은 신약성서가 십자가의 추문(SCANDAL)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를 보면 분명해진다. 이 추문의 내용은 ‘권능과 기이한 일과 표징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포하러 왔던 인간 예수가 신성모독자와 정치적 반역자로 유죄판결을 받고 생애를 마쳤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변두리인들을 도운 분이 아니고 변두리인이 되셨다. 사람들은 불의에 항거하고 평화를 조성하고, 가난한 자들과 함께 일치하여 행동함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하나라는 개념에 대한 크고 작은 표징이 될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4가지의 위임 [結婚, 家庭, 敎會, 國家 by Dietrich Bonhoeffer]을 통하여 이루어 진다. 이러한 위임은 우리의 생활과 행동이 자유에 대하여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분명한 확신 속에 사는 것으로, “차단(遮斷)된 현실(現實)을 새로운 길로 개방(開放)시키는 것이다.”23

교회생성을 향한 변형연습을 참다운 인간의 자유에 대한 추구요 진정한 동등 공동체의 정의에 대한 추구이다. 이를 신약성서에서 실마리를 찾아보면, 즉 평화의 왕과 새 인간의 상징으로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속 에서 맞을 수 있다.(엡 2:14-18, 사 9:6, 눅 2:11, 요 14:27) 신약성서 기자들의 확증은 즉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결정적으로 역사에 들어오시고 그 역사를 변화시킨다는 것이다.(골 1;19) 모든 피조물을 구속하시는 약속에 대한 하나님의 성취는 비록 그 약속이 성취를 기대하게 하고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인간화되어가는 사건들 속에 성실하게 참여하도록 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상징적으로 이루어진다.24

하나님의 인간성은 모세에게 보여주는 야훼의 자기 표현을 통해서 나타났고 출애급의 사건 속에서 희브리 백성들은 임마누엘의 상징을 실현했다. (사 7:14, 마 1:23) 모든 백성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 속에서 말씀과 행위로 나타났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은 그들 자신에 대한 진리를 알게 되었고 하나님이 뜻하시는 미래를 깨닫게 되었다.(딤전 2:4, 롬 8:31-39)

나사렛 예수의 삶, 죽음을 그리고 부활에서 우리의 모든 삶이 집약되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인간화와 비인간화된 면에서 삶을 관망할 뿐만 아니라, 희망에 대한 희망적 가능성을 가진다. 중풍병자와 가라사 지방의 귀신 들린자등을 고친 치유와 용서에 관한 복음은 새 삶과 역사의 가능성을 지시해 주는 것이다.(마 9:2-8, 막 5:1-20).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미래를 선택하도록 도와 주신다. Kasemann은 우리에게 십자가 밑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 십자가 밑에서 하나님은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을 계시하셨기 때문이다.25 이 십자가는 복음의 중심적인 치욕이다. 왜냐하면 그 것은 우리와 함께 우리를 위해서 그리고 우리에게 도전하는 하나님의 인간성의 댓가가 다른 사람들과의 동일성을 나타내 주고 다른 사람들을 대리해 주며 다른 사람을 위해 고난 당하는 분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고전 1:18-25)

십자가의 중심되는 치욕은, 역사 속에서 그리고 역사를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모든 행동을 특징 지워주는 특성 있는 치욕의 문제를 제기해 준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특수한 사람들과 사건은 한 소규모의 무리들이 처해 있는 그들의 구체적인 특수한 역사의 의미를 제공해 줄 뿐만 아니라, 방황하는 한 유대인 랍비의 특수한 역사의 의미를 암시해 준다. Norman Perrin에 의하면, “그와 같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역설적인 주장을 나타내며 시간 속에 있는 역사적 사건인 예수와 그의 십자가는 종말론적인 사건이다.”26 이 속에서 모든 것이 초월한다. 그 자신의 삶 속에서 그는 남성와 여성들을 동등하게 관심하는 입장에서 ‘여권론자’였다. 그들이 원하는 것에 평등한 도움을 주었으며 하나님의 나라의 새로운 미래를 위해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차별없이 제공했다.(눅 10:38-42, 요 4:7-30) 예수를 생각할 때, 우선 그의 남성이나 그의 인종족인 기원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은 생물학적인 윈시적인 안목으로 돌아가는 결과가 되고 마는 것이다. 우리 자신과 예수에 대한 가장 중요한 확신은 우리가 주체적 인격으로서 인정받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 안에서는 생물학적인 차이는 제2차적인 조건이 된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간의 새로운 모습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렸다.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이다. 내가 지금 몸으로 살고 있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갈 2:20)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반응을 보이는 개방된 인간은 결국 이웃에게도 개방된 모습으로 더불어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모습이 구원 받은 참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다. 그러나 폐쇄된 자아는 하나님을 향한 무반응하며 이웃을 향하여 외로운자 즉 버림받은 자로 남는다.         

대화는 상호관계와 신뢰를 갖기 위한 용기와 시도를 의미한다. 그것은 한 무리가 그 자신을 주장하거나, 표현하는 계급 조직의 상황에서는 어렵게 된다. 그리고 그 단체가 다른 사람들에게 지배하는 그룹에 의해서 주장되고 결정짓는 세계를 인정하도록 강요하는 힘을 가질 때 불가능하다. 대화는 세계를 주장하고 변화시키고, 세계의 의해서 중재된 사람들간의 만남이 없을 때에도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러한 상황은 사회적, 심리적, 육체적 긴장이 억눌린 사람에 대항하는 수직적인 긴장 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수직적인 긴장에 희생된 사람들은 서로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평면적인 긴장의 역동성 때문에 서로의 대화가 이루어지기 어려움을 발견하게 된다.

3) 생명-창조 (LIFEGENESIS)

(1) 변형은 생명생성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새 계약이다. 그 안에서 하나님은 모든 민족의 아버지/어머니가 되며, 모든 인류는 그들이 그의 자녀임을, 그리고 서로에 대한 형제자매임을 본다. 바울은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그에게서 ‘예’가 되었다”(고후 1:20)고 말한다. 이것과 같은 선상에서 요한 계시록은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아멘’이라고 말하게 된다.(계7:12)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성서 해석의 원리로서, 출발점으로서 점진적으로 도래한다. 예수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만난다. 인간의 언어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언어를 읽는다. 역사적 사건 속에서 약속의 성취를 인식한다.

이것이 모든 해석학의 기본적인 순환이다. 인간에서 하나님에게로, 하나님에서 인간으로, 역사에서 신앙, 신앙에서 역사로, 우리의 형제자매에 대한 사랑에서 하나님 아버지/어머니의 사랑으로, 아버지의 사랑에서 형제자매의 사랑으로, 인간적인 정의에서 하나님의 거룩함, 하나님의 거룩함에서 인간의 정의에로, 가난한 자에서부터 하나님에게로, 하나님에게서 가난한 자에게로, 예수 안에서 새 창조가 완성된다.(고후 5:16-17)

그것은 새로운 출발이며, 그 규범은 언제나 새로운 계명이 될 것인 바, 그것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5:12) 이것은 더 이상 ‘종들’이 아니라 ‘친구들’로서의 새로운 계약에 충실하게 될 것을 의미한다. 이 새 계약의 보편성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 소멸되고 그의 부활에 의해 봉인된다. 예수의 죽음은 정의를 위한 그의 투쟁, 하나님 나라의 선포, 가난한 자들과의 연대에 의한 결과이다. 그의 죽음은 옛 시대의 포로 상황과 마찬가지로 위대한 발견의 계기가 된다. 그것은 그의 제자들에게 신앙의 위기를 초래하는데, 예수의 삶에 의해 영향을 공급받던 많은 희망의 붕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의 인격과 사명에 대한 그들의 이해의 계약을 뛰어넘는 기회이기도 했다. 우리는 그의 부활은 그를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서 뿌리를 뽑아 분리시키며, 그가 선언한 하나님의 자녀, 공동체의 형제자매들의 지위의 보편성을 이해하게 강요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제자들은 부활절의 빛에서 예수의 행동과 말을 다시 읽게된다. 그 때 그들은 엠마오 도상의 제자들과 마찬가지로(눅 24:31) 눈을 뜨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달리 아버지/어머니께 이르는 길은 없다. “여러분은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그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와 함께 다시 살게 된 것입니다.”(골 2:12)

(2) 성찬 (COMMUNION)은 관계적 생명 생성

성찬예식 역시 기억과 자유의 변증법 속에서 움직인다. 그것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기억이고, 애급에서 유대 민족을 구원한 야훼의 해방 행위를 축하하는 유월절 만찬의 맥락 속에 놓여 있는 기억이다.

성만찬은 하나님의 사랑이 계시된 모든 역사적 행위에 대한 감사이다. 그러나 그것 또한 예수가 자신의 생명을 주려고 한 것의 의미와 뜻이 창조적이고 자유롭게 오늘날 우리에게 미치는 행동이다. 그것은 단순한 기억이 아니다. 그것은 과거에 얽매인 일종의 슬프고 향수에 젖은 주님에 대한 회상이 아니다. 그것은 미래에 개방되어 있고 신실함과 기쁨이 가득하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영의 수용이다. 왜냐하면 “주의 영이 있는 곳에서는 자유가 있기”(고후 3:17) 때문이다. 주의 만찬의 축제는 역사 속에서의 가난한 자들과의 친교와 연대를 전제한다. 이 연대가 없다면 야훼의 종의 죽음과 부활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창 1:26)대로 창조하셨음은 인간의 의식속에 사고의 자유를 주셨다는 것이리라 본다. 바울은 자유에 대한 전 우주적인 열망을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오늘날까지 함께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성령의 처음 열매를 가진 우리 자신들도 속으로 신음하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들로 삼으시고 우리의 몸을 온전히 속량해 주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롬 8:13-27)

사회와 환경까지 인간의 불순종으로 타락한 결과 신음하고 있고 고난을 받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인간 자신과 세계의 모든 사회와 환경의 지체들이 일치 조화되여 다시 나타날 하나님이 새로운 피조물의 성취를 위하여 절망시킨 장본인으로서의 연대 책임성을 절감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자유를 먼저 맛본 사람들로서 서로 함께 모여 하나님의 미래를 향하여 함께하는 행진을 훈련'(TRANSFORMING PRAXIS)하고 함께 사는 훈련을 하는 모퉁이의 삶을 시작해야 하리라. 이를 위하여 먼저 시작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훈련된 발걸음을 따라가야 하리라.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모습을 취하신”(빌 2:7)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훈련이 필요한 것이다.

(3) 자원봉사는 책임적 생명생성

‘자유(自由)의 영(靈)'(고후 3:17, 1:22)을 체험할 수 있는 길은 자원봉사(筆者註: VOLUNTARY SUFFERING)에서 찾을 수 있다. 다른 사람을 섬길 수있는 자유를 가진 존재로 설 때 갖는 체험을 진정한 성취인 것이다. 다른이를 섬김은 그리스도를 섬김이요 그리스도를 섬김은 굴종하는 소명(召命)이 아니라 하나님을 돕는 도구가 되기 위한 소명이다. 그것은 분명히 다른 사람들과 함께 동등하게 일치하기 위한 소명이며, 우월감을 갖는 소명이 아닌 것이다. 그들이 참자유를 얻을 때에 비로소 나의 자유도 진정한 것이되는 연대 책임감에서 나오는 봉사로서 이것이 진정한 자원봉사의 모습이다. 따라서 그들의 미래를 형성하기 위한 자유를 얻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함께 행동하고 신음하는 일치감은 권세와 속임수의 형태가 될 수 없다. 결국 영구적인 종속관계는 결코 자발적인 섬김이 아닌한 그것에는 자유도 기쁨도 성취감도 미래 소망도 없이 불협화음과 불균형과 깨어짐과 싸움과 죽음의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에 나타나는 종의 역할은 열들한 상태나 종속 관계를 의미하지 않는다. 봉사는 다른이의 삶의 계획을 용인하는 것으로 시작이 된다. 돕는자(‘EZER)나 종(‘EBED)은 어떤 사람의 요구를 하나님이 돕기 위해서 쓰시는 하나의 도구인 것이다.27 신명기 7:6에 보면, “너는 야웨 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 네 하나님 야웨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다”고 했다.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의 특권은 봉사를 위해서 뽑아주신 하나님의 특권이다.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기 위한 도구가 되었다. 이사야 42:1에서 보듯이,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는 말씀은 고대 근동지방의 문서에서 보듯이 높은 지위(왕이나 신)에 속한 종을 말하는 것으로 대단한 궈위, 권한 그리고 명예가 주어진 것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야웨의 종은 “많은 사람들의 죄를”를 짊어지기 위해서 고난 받는 종으로 선택받아 그 임무를 담당하셨다.(사 53:12)

바울은 빌립보서 2:7에서 그리스도의 이러한 모습을 “자신을 비워” 종의 모습을 취하신(DOULOS, SLAVE) 그리스도의 모범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겸손과 봉사를 권고했다. 하나님을 대신해서 다른 사람을 봉사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종속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헌신하여 봉사와 사랑의 용납을 하는 것이다.(눅 7:30-50, 8:1-3, 10:38-42)28

바울서신에 나타나는 ‘사도’라는 말은 복음의 증인으로서 봉사하도록 선택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 이것을 근거로 바울은 Phoebe와 Apollos 그리고 그 자신을 그리스도에 봉사하는 자, 혹은 그리스도를 대표하는 종이라고 말한다.(롬 1;1, 16:1-2, 고전 3:5) 사실상,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해방의 역사에 참여하느자의 임무를 담당하고 있었기에 그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라고까지 불렀다.(고전 9:19, 고후 4:5) 또한 여성들도 함께 그리스도의 종의 사역을 담당했다. Junias, 부활의 첫번째 증인(눅 24:1-10), 사마리아 여인(요 4:28-29) 그리고 Mary Magdalene등 모두가 그리스도의 위대한 사도들인 것이다. 이렇듯이 여성 남성 모두가 하나님의 역사를 감당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종으로 불리움을 받고, 그들이 받은 치욕은 종속적인 치욕이 아니라 주의 고난에 참여 한 것이다. 즉 눌린자를 대리하는 댓가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의 고난이며 남성과 여성들의 고난이다. 이로서 봉사는 불완전한 인간을 완전한 인간으로 인간화하는 인간의 결합인 것이다.

[주]

1. Arthur, Lewis, “What Does the Bible Say about Mixed Marriage?” The Standard (Junes, 1987): 8

2. Pastor Emry, What does the Holy Bible Say? (Phoenix, Ariz.: Lord’s Covenant Church, 1969), Pamphlet.

3. Paul R., Sparckard, Mixed Blood: Intermarriage and Ethnic Identity in Twenteth-Centry America (Madison: U. of Wisconsin, 1989), p. 295.

4. Janet Groat, “Augsburg Learns Major Benefactor Sent Hostile Mail,” Minneapolis Star-Tribune, February 16, 1988, sec. A.

5. William F. Albright, The Old Testament World, vol. 1 of The Interpreter’s Bible (Nashville: Abingdon, 1952), p. 270.

6. “The Bible Speaks on Race,” The Students (March, 1984): 43.

7. 김균진, “개방성에 대한 신학적 해석” 기독교사상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82년 6월호), pp.61-62.

8. Gerhard von Rad, Theologie Des Alten Testaments, I, (Munchen: Chr. Kaiser Verlag, 1969), p. 156.

9. Ibid, II, 1960, p. 360.

10. Karl Barth, Die Kirchliche Dogmatik. III/1,3. (Zurich: Evangelisher Verlag A.G., 1956).

11. W. Zimmerli, Grundriss der alt testl. th., 1975, p. 39.

12. Helmut Thielicke, Theological Ethics vol. 3. Michigan: W.B. Edmans Publishing Co., 1979), p.4.

13. Letty M. Russell, Human Liberation in a Feminist Perspective – a Theology.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74

14. “One who stand over another in the sense of being the ground of his begin”, quoted in Gerhard Kittel & G. Friendrich, ed.,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 Eerdmans, vol. III, 1965), p. 679.

15. 김이봉저, 여성신학 (서울: 도서출판 양서각, 1985), P.72

16. R. Rendtorff, Die Offenbarungsvorstellungen …, in: Offenb. als Genschichte, 1961, p. 24.

17. W. Zimmerli, Ibid, p. 24

18. G. von Rad, Ibid., II, p. 408.

19. Ibid.

20. Moltmann, Religion, pp. 50-51; Ernst Kasemann, Jesus Means Freedom (Philadelphia:Fortress Press, 1977), P. 73.

21. William F. Arndt and F. Wilbur Gingrich (eds.),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Testament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5), p. 715.

22. Olando E. Costas, Christ Outside the Gate – Mission Beyond Christendom (New York: Orbis Books, 1989), p. 7.

23. Rubem Alves, A Theology of Human Hope (Corpus Books, 1969) p. 105.

24. Oscar Cullmann, The Christology of the New Testament (The Westminster Press, 1957), p. 80.

25. Kasemann, Jesus Means Freedom, p. 76; Moltmann, Gospel, p. 55.

26. Norman Perrin, Rediscovery of the Teaching of Jesus (Harper & Row, Publishers, Inc., 1967), pp. 224-225; Joseph A. Johnson, “Jesus, the Liberator,” in James J. Gardiner and J. Deotis Roberts (eds.), Quest for a Black Theology (Pilgrim Press, 1971), p. 105.

27. Dumas, “Biblical Anthropology,” in Concerning the Ordination of Women, p. 30; Trible, “Eve and Adam,” Andover Newton Quarterly, March, 1973, p. 252.

28. Johnson, “Jesus, the Liberator,” in Gardiner and Roberts (eds.), Quest, p. 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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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TaeHun Yoon

Retired Pastor of the United Methodist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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