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관 앞 마당에는 덕우드(DogWood)라는 나무가 있습니다. 처음 목사관에 입주했을 땐, 그 나무에 대해 전혀 관심을 갖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봄에 메마른 가지에서 분홍빛 꽃망울들이 터져 오를 때의 그 단아한 아름다움에 그만 매료되고 말았습니다. 또한 가을이 되면 가장 먼저 울긋불긋한 단풍으로 함빡 치장을 하고 미련없이 바람결에 떠나가는 낙엽들의 모습 속에, 삶의 영광과 얽매임 없는 자유로움을 발견하곤 했습니다.
저는 이 나무를 은연 중에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여름 부터 현관문을 열 때마다 걸리적거리는 것이 있었습니다. 무심코 보니, 덕우드 나뭇가지가 뻗칠 대로 뻗치어 현관 안으로까지 들어올 기세였습니다. 나무를 유심히 돌아보니, 나무의 전체 모양이 형편없어 졌습니다. 마땅히 때에 따라서 잔가지들을 쳐주었어야만이 꼿꼿한 모습으로 높게 자랄 수 있었을 터인데, 그동안 제멋대로 자라난 굵어질 대로 굵어진 나뭇가지들이 보기에 흉할 정도였습니다.
‘진작 잔가지들을 쳐주었어야 했는데 … …. 후회를 하면서, 문득 사람도 나무처럼 잔가지를 제 때에 쳐주지 않으면, 조그만 습관들과 버릇들이 자라나 오히려 삶에 큰 아픔이 되어 다가올 때가 있으리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전 마음 상하였던 일이 떠올랐습니다. 맞았어! 내게는 비난과 오해도 때로는 필요한 것이었어! 라는 깨달음 속에 어두웠던 심령에 아침 해가 떠오르듯이 치유의 광선이 힘차게 치솟았습니다.
목사관의 삶에 기쁨과 보람도 있지만, 때때로 생각지도 못한 오해나 비난을 당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럴 때 마음의 상처와 아픔으로 기도조차도 드릴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 아픔이 심할 땐,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상처난 짐승처럼 신음소리만 내다가 눈물을 닦고 일어서게 됩니다. 그리곤 곧잘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음에 원망을 하게 됩니다. 난, 당신이 피곤한 몸을 눕히고 한참 자고 있을 때, 나 역시 피곤한 육신을 추스리고 깨어 일어나 당신을 위해 하나님 앞에 기도의 불을 밝혔고, 당신이 아파 고통할 때 성령님의 치유의 은총을 위해 눈물을 흘렸다오. 당신이 넘어야만 될, 흑암의 산중에서 헤매이기에, 난 작은 반딧불이 되고자 굶주리는 영혼과 육신으로 당신의 무사함을 위해 주님께 간구했다오. 그런데 당신은 꺼떡하면 불평과 원망이군요… …. 수없이 마음을 털어 놓고 보여주고 싶은 유혹에 빠지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다가오는 비난과 오해 등 그 모든 것을 사용하시어 나를 다듬으시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위로하심과 그늘 아래 쉬임을 원하기보다는, 사람들의 칭찬을 좋아하고 과대평가에 은근히 만족해하는 죄의 근성들을 늘 일깨우십니다.
성 프랜시스는 말하기를 “존경을 받게 되면 모욕을 받게 될 때와 다름없이 그것을 즐겁게 수용하고, 모욕을 받게 되면 존경을 받게 될 때 와 다름없이 그것을 즐겁게 수용하라. 내가 진정 다른 사람을 위했던 일로 존경을 받아 기뻐할 수 있으면, 마찬가지로 설사 모욕을 당하게 되어도 기뻐할 수 있지 않겠는가? 존경은 그것이 하나님께로 돌려져서 좋고, 비난은 나를 세워주기 때문에 역시 좋다는 것을 알도록 하
라.” 라고 했습니다.
평소에 황송할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고 살아가는 저에게 충고나 비난, 모욕 등은 어쩌면 잘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내 영혼을 바로잡아 주고 서게 하며 더 높은 곳을 향하여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가지치기가 없다면, 흉물스런 교만의 가지가 얼마나 휘청하게 늘어져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밤새 비바람과 폭풍우에 몹시 시달렸던 나무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휑한 마른 머리채를 들고 오늘도 반갑게 맞이해 줍니다. 저는 나무에게 가만히 속삭였습니다. 나무야! 우린 같이 성장하고 같이 높은 곳을 바라보는 것이지. 그렇지? 우린 같이 아픔을 참으며 가지를 쳐내자꾸나. 새봄엔 우리 둘이 더 아름답고 다듬어진 모습으로 피어 나게 될 거야! 나무는 알았다는 듯이 바람결에 가지들을 흔들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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