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집안을 정리하다가 몇 타래의 뜨개질 실들을 찾아내게 되었습니다. 빨강, 노랑, 흰색, 검정 색깔 등의 실들은 주인의 손에 의해서 무엇인가에 쓰임 받을 수 있도록 오랜 시간을 어두운 구석진 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런 뜨개 실들을 갖고 차분히 앉아, 이불을 만든다든가, 스웨터를 짠다던가 한지가 꽤 오래된 일들이었음을 기억케 하였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신혼 때에 아이를 임신하고, 한가하게 남편이 집에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한동안 열심히 뜨개질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 때 짜두었던 작은 이불도 아직 있고, 또는 벽걸이도 있는데 그 중에는 <밀레의 만종>이라든가, <호랑이가 대나무 숲에서 포효>하는 것이 남아있습니다.저는 가끔 그 작품들을 볼 때마다, 스스로 감탄합니다. ‘야! 저렇게 시간이 많이 드는 것들을 어떻게 해냈을까?’ 그러면서, 때마다 시간마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우리가 만드는 작품들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저는 그 남은 실타래들을 바라보면서, 아무리 아름다운 색깔을 가지고 있을 지라도 쓰임 받지 못하는 실이야말로 참으로 가엾은 물질로 남겠구나 하는 생각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동안 방치해두었던 실들에 대한 깊은 묵상을 하게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실을 제공하는 원료에는 대개 자연에서 얻어지는 목화, 누에고치, 식물에서 나오는 원료가 있고, 사람이 만든 화학섬유가 있습니다. 그 외에도 동물들을 이용한 Wool과 앙고라 염소 털을 이용한 모헤어라는 것들이 있습니다. 모두가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기에 하나님은 자연을 통해서 이것들을 얻게 하시고, 인간에게 지혜를 주어서 이것들을 잘 사용하도록 하시었습니다. 이 실들은 인간이 어떻게 사용하고 이용하느냐에 따라 후세에 남는 작품들이 될 수 있고, 때로는 한때 사용하고 버리움 당하고 마는 것으로 끝내고 맙니다.
성경에 에베소서 2장 21절에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의 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성도가 있는 곳엔 가능성이 있고, 흩어진 것들을 함께 이어지는 연합이 있고, 상처를 감싸주고 꿰매 주는 사건들이 있습니다. 추위가 있는 곳엔 추위를 막아주는 방패역할과 함께 따뜻함과 포근함이 있습니다. 아무리 세상의 혹독한 추위와 외로움 속에서 지냈다가도 성도들을 만나면, 위로가 있고 기쁨이 있는 것은 성도는 하나님의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희생과 열정이 없는 사명은 죄악이다” 라고 마르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저도 이 말에 얼마나 많은 찔림을 갖게 했는지 모릅니다. 하나의 작품이 만들어지려면, 거기에는 분명한 희생과 열정의 거룩한 실들이 얽히고 얽혔을 때만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작품이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각자의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평신도에게는 장로, 권사, 집사에 이르기까지의 이 사명들은 교회의 덕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입니다. 각자의 모양과 배경은 다를 수 있습니다. 마치도 자연에서 나온 실의 원료와 인간이 만든 화학섬유가 있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하나님 안에서 쓰여질 때는 참으로 아름다운 작품들을 이 땅에서뿐만 아니라 하늘나라에까지 상달케 합니다.
저는 안이숙 사모님이 쓰신 “당신은 죽어요, 그런데 안 죽어요” 라는 글을, 요근래 다시 읽으면서 마음에 깊은 감명을 받은 글이 있습니다. 제목은 “건축헌금”이라는 글이었습니다.
그 글에는 한차례 교회가 갈라지는 아픔을 겪은 후, 한국에서 금방 온 어려운 유학생들과 교우들만 남아있던 때라고 합니다. 교회가 자라질 않고 수년을 지내는 동안에 하나님은 축복하시어, 결국 200여석의 자리가 모자랄 정도가 되어 교회건축을 해야 만 될 상황이 되었습니다.
모두가 새 건물은 필요하지만, 과연 어디서 돈이 나서 짓느냐? 며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 때, 어느 유학생이 말하기를 “저는 20불을 매달 저금하여 건축헌금을 할 터이니, 목사님은 그 돈을 예금하시어, 보증을 서 주시면 2,000줄을 빌릴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 2,000불을 건축헌금으로 내겠습니다”하고 진지한 발언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거기에 모인 학생들이 저마다 “나도 그렇게 하겠습니다”라면서 너도나도 작정을 하였습니다. 그후 학생들은 그 약속을 없는 가운데 충실하게 지키자, 이민을 일찍 와서 자리가 잡힌 어느 분이 3,000불을 작정하였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작정에 도리혀 시험에 들어 교회출석을 중지하는 불행한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자, 여선교회서도 “여선교회는 교회의 어머니와 같은 역할을 하는데, 아들, 딸 같은 학생들이 학생신분으로 장학금을 절약하여 2천불씩이나 드리는 판에 우리 어머니들인 여선교회에서는 적어도 5만 불을 바쳐야 되지 않겠습니까?”라는 의견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결국 서로가 김치와 빈대떡, 된장, 고추장, 옷등을 팔아 한번 해보기로 작정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일을 제의한 여선교회장님이 평소에 앓고있던 소화불량을 진단 받으로 갔다가 암이 발견된 것이었습니다. 그 분은 가슴이 턱 내려앉는 심정을 가지고 “나는 곧 죽는다. 주님이 너는 무엇하다가 왔느냐? 고 묻는다면, 나는 애 다섯 키우고 먹여 살리려 꼭두새벽부터 밤늦도록 일만하다가 왔습니다, 라고 대답 할 것인가? 나는 죽는다. 머잖아 죽고 만다” 여선교회장은 더 이상 주저 할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그 동안 음식은 물론이요, 물도 제대로 마시지 못한 핍절한 몸으로 시장에 가서 무와 배추를 잔뜩 싣고 왔습니다. 그리고 그 무거운 것들은 하나 하나 손으로 내려서 씻고 저리고 김치를 담그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주일날 친교시간에 이 김치들을 내어놓고 “건축헌금을 위해 사가세요”라는 싸인을 부쳐놓았습니다. 그녀는 고추장, 된장들도 이런 식으로 담가 내놓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한 두명씩 여선교회장을 도와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에는 고추장을 끓이며 젖느라 부르튼 손과, 팔목을 움직이지 못할 정도가 되어 부엌에 쓰러져 있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건축헌금을 작정한 2년 후, 어느 주일에 그녀는 헌금이 든 봉투를 강대상을 향해 들고 나가게 되었습니다. 부들부들 떨리는 약한 무릎을 고쳐 세워 걸어나가는 그 심각하고 충격스런 표정 속에 관중은 갑자기 엄숙한 가운데 모두 눈이 커지고 마음이 감동의 파도로 출렁이기 시작하였습니다. 목사님의 손에 그 봉투가 들려졌을 때, 찬 감격에 음성이 떨이고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5만 불 주님께 약속한 것을 드립니다. 여선교회 일동“ 이라고 적혀있었습니다.
그녀는 그날, 주님께 드린 날을 기념하며 베푼 잔치에 처음으로 음식을 먹게되었습니다. 그리고 암병도 물러가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때를 회고하면서 안이숙 사모님께서는 이렇게 술회하였습니다. “그녀는 너무 아름다웠다. 나는 눈이 부신 것 같이 그녀를 바라보면서 갚은 사랑을 느꼈다. 그리고 ‘충성된 종아!’ 예수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죽을힘을 다하는 그녀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암병은 죽음을 걸어놓은 충성에 그만 손을 털고 떨어져 나간 것이 분명했다”
결국 그들의 열정과 희생은 500명 좌석의 50만 불이 넘는 교회를 하나님께 봉헌 할 수 가 있었다고 합니다.
헌신과 열정- 이것은 건물의 시멘트와 같고 뜨개질의 바늘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모든 여건이 준비되어있고 아름다운 색상의 실들이 모아져있어도, 이것을 연결하여 작품을 만들려는 열정과 자기희생이 없이는 우리는 아무 것도 남길 수 없고 세월만 소비하게 되고 맙니다.
지금까지 한국교회의 역사와 기독교의 역사를 돌아보게 되면, 사회적으로나 인간적으로 참으로 부잘 것 없었던 사람들이 이뤄낸 놀라운 일들을 발견케 됩니다.
특별히 성경에 나오는 마리아라는 여인의, 주님을 사랑하는 열정과 헌신은 아무리 세대가 오고 가도 변하지 않는 다이아몬드와 같이, 우리의 영혼에 눈부시게 다가옵니다. 그녀는 주님의 가슴을 감동으로 벅차게 하였고, 뜨거운 눈물을 머금게 한 장본인 이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녀가 힘을 다하여 자신의 몸에 향유를 부었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전혀 기대치 않았던 뜨거운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을 감동시켰던 마리아라는 그 여인- 그녀가 옥합을 깨뜨려 부었던 용기는 예수님을 향한 사랑의 열정이었습니다.
저는 가끔 방송국에 나와서 이 프로를 준비하느라고 방송국의 녹음기계를 만지게 됩니다. 처음 얼마동안은 이 방송실 안의 기계가 낯설고 조작하는데, 어려움이 있어서 실수를 안하려고 거기에만 신경을 쓰게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한 일여년이 지나서, 모든 기계들을 조작하는데 조금 익숙케 되니, 저의 눈에 띄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방송기계들이 너무나 낡아있는데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24시간, 365일을 근 10여년간 기계가 쉴 틈없이 돌아가다 보니 까딱하면, 어느 날, 어느 순간에 모든 것이 행여나 All Stop 되지나 않을 까 하는 염려와 함께 기도의 제목이 되고있습니다. 이곳에서 기계전반을 관리하시는 집사님이 이방 저 방의 고장난 기계들을 뜯어놓고 고치시느라고 땀을 뻘뻘 흘리는 모습이 눈만 감으면, 언제부터인지 제 앞에 떠올라 기도의 제목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올해가 가기 전에, 우리 기독교 방송국에 새 기계들을 허락해 주십사고 간절한 안타까움을 갖게 합니다.
우리 기독교 방송은 성도들의 기도와 사랑으로 짜여진 참으로 아름다운 복음방송입니다. 이 방송전파를 통해 많은 성도들이 위로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합니다. 이 방송이 지금까지도 전파를 내보낼 수 있었음은, 하나님을 감동시킨 무명의 성도들의 열정과 헌신 때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거룩한 성도들이 짜낸 “기독교 방송”이라는 작품이라고 생각을 갖게 합니다. 이 시간을 빌어 방송국 직원들의 사명과 열성, 헌신에 대해 박수를 보냅니다. 모든 분들이 보기 드문 훌륭한 방송인들이며 신앙인 임을 자랑케 됩니다.
사랑하는 청취자 여러분!
우리가 한평생 살면서 하나님이 쓰시는 거룩한 역사의 실임을 자부심을 갖으시기 바랍니다. 나의 근본은 누에 처럼 땅을 기어다녔어도, 하나님은 그 누에 고치를 통해 아름다운 실크를 만드시길 원하십니다. 비록 더러운 오물들을 묻히고 다니던 양털과 같은 우리였지만, 주님은 그 보혈로 씻기사, 눈보다도 더욱 흰 울로 쓰시기를 원하십니다. 또한 쓸모없는 기름찌꺼기와 같은 우리를 이끌어 내사 화학섬유의 그 포근하고 감촉이 좋은 실의 원료로 쓰시기를 원하십니다. 어떤 연고를 통해서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쓰시기를 원하시고, 당신의 멋진 작품을 만들어 내시기를 열망하십니다. 한 주간도 각자가 처해있는 환경에서 하나님께 쓰임받는 귀한 실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 윤완희, 10/27/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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