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어렸을 때, 가족들로 부터 두가지의 별명을 갖게 되었는데,
하나는 소라는 별명과 하나는 울보라는 별명이었습니다. 소라는 별명은 아버지가 지어 준 별명이였는데, 그 이유는 하루 종일 있어도 옆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게 조용하고 순하여 지어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울보라는 별명은, 평소에 말의 표현 훈련이 잘 되지 않은 탓인지, 말로 표현 해야 할 일들을 울음으로 대신 표현했던 이유로 생긴 것 같습니다.
저는 이 두 가지의 별명을 혹처럼 안고 살면서, 의식 깊은 곳에 숨어있는 열등감을 가리우고자 될 수 있으면 남들처럼 말의 표현을 잘해보고자 애를 쓰기도 했고, 말에 앞선 눈물을 참으려고 애를 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두가지는 평생의 풀지 못한 과제가 아닌, 은총의 선물이였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평소 말의 표현이 둔하여, 자칫 잘못하면 전혀 나의 의사와는 상관없는 곳으로 대화의 방향이 이끌어지거나, 오해를 불러일으킴을 발견한 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활자를 통한 대화가 제 자신을 좀더 잘 표현 할 수 있는 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감사의 표현도 당사자 앞에서의 감사보다, 꽃그림이 그려 있는 작은 카드나 편지를 통해 보내질 때, 그 깊이와 사랑의 여운은 두고 두고 상대방의 가슴에 앉아있는 것을 보게됩니다. 저 자신도 어떤 일을 끝내고 말로 받는 인사나 감사보다는 한마디의 글로 전해온 카드를 냉장고 문에 붙혀두고 보내온 상대방의 아름다운 마음을 오래 오래 만끽하며, 금방 피어난 꽃을 보듯이 사랑을 되새기게 됩니다.
울보라는 별명 역시 별로 부끄러워 할 것이 없다는 것을 어느날 목사님의 설교 가운데서 발견케 되었습니다. 특히, 하나님 앞에서 잘 우는 사람 일수록 스트레스가 빨리 회복되고 위궤양이나 어느 잔병에 걸릴 확률이 낮다는 것입니다. 심령이 답답하고 가슴에 상처를 안고있을 때, 하나님 앞에서 몸부림치며 울고나면, 마음이 탁 트이며 하늘의 위로가 심령 가운데 함께함을 늘 체험합니다.
살다보면 누구에게나 눈물을 흘리며 우는 일은 종종있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슬픈 사랑의 영화나, 연속극을 보면서도 울 수 있습니다. 때로는 남이 미워서 원한으로 울수도 있습니다. 또한, 최루탄 개스나 양파 껍질을 벗기면서 눈물을 흘리며 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런 류의 눈물에는 인체의 생화학 작용 자체가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방황하는 자신의 영혼을 붙들고, 하나님 앞에서 몸부림치며 흘리는 눈물에는 고단위의 단백질이 눈물 속에 섞여 함께 흐를 뿐만이 아니라, 인체와 영혼의 폐기 물들을 깨끗이 씻겨내는 역할을 감당 함으로, 자연히 육신과 영혼의 건강을 유지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 방울의 눈물 속에는 하늘의 신비가 들어있습니다. 저는 제단에 꿇어 앉아 무릎에 담긴 눈물의 기도와 애통 속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신비를 수없이 체험 할 때마다, 기쁨과 감사의 축복이 나의 삶을 적셔주고 감싸줌을 고백케됩니다. 어머니가 자녀들을 위해 드리는 눈물의 기도나 이웃을 위한 눈물의 기도들은 영적 가뭄을 결코 가져 올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어진 무엇 하나라도 버릴 것이 없고, 불필요한 것이 없다 하는데, 사람에게 주어진 별명도 하나님 안에서는 축복의 여건이 되니 감사 할 뿐입니다.
– 윤 완 희, 10/16/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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