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양면성

저는 요근래 인간의 말, 언어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람간에 해서 되는 말이 있고 해서는 안되는 말이 있기 때문이지요. 말로 인한 실수를 엎질러진 물과 같다고 흔히 말합니다. 한번 쏟아놓으면, 아무리 수정하려해도 다시 주워담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사람 한 사람의 발언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릅니다. 특히, 믿음의 공동체에서의 한마디 한마디는 그 공동체 전체에 큰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옛날에 제가 국민학교 다니던 시절에 가슴에 꽂고 다니던 리본이 불현듯 생각났습니다. 거기에는 “고운 말을 쓰자!”라는 구호가 적힌 글이었는데, 당시의 아이들은 누구나 학교 갈 때면 그 리본을 가슴에 달고 다녔습니다. 학교 건물에도 그 구호는 커다랗게 써붙혀 있었고, 조회시간에도 우리는 큰 소리로 몇 번씩 외쳐야 만 되었습니다. 아마도 그 시절에 6.25전쟁 후의 삭막함과 거칠어진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서 흘러나오는, 오염된 우리의 언어를 정화하려는 뜻에서 그런 구호를 어린아이들에게 심은 것 같습니다.

초면의 사람이라도 그 사람이 쓰는 언어를 통해 그 사람의 인격과 신앙을 엿 볼 수 있듯이, 언어는 우리의 내면을 늘 비쳐주는 거울과 같습니다. 마음이 불편한 사람은 퉁명스런 언어가 일상생활에서 튀어나올 것이고, 마음에 평안이 있는 사람은 아름다운 언어를 구사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믿는 사람들의 가슴에도 “믿음의 언어를 사용하자!”라는 구호가 필요한 것입니다.

사람에게 언어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입니다. 특히 이민생활하고 있는 우리에게 언어라는 것이 순간 순간에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서로 말이 통한다”라는 표현을 할 때는 “마음과 마음이 통한다”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언어를 구사하고 있는 사람들끼리도 “말이 통하지 않는다”라는 표현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즉 소리는 들리지만, 그의 심령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고 있는 심중의 언어를 헤아릴 수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민생활에 언어의 표현능력이 부족하여도 심중의 언어가 서로 통할 때는, 언어장벽에서 오는 장벽이 그리 대단치 않다는 것을 때로는 느낄 때가 있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영어에 대해서 ‘탱큐와 쏘리“밖에 모르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가끔 저를 만나면 이웃집 이야기들과 그들이 무어라고 말했는지를 소상히 말씀해 주십니다. 예를 들면, 이웃에 살고 있는 할머니가 어느 날, 저희 어머니를 밖에서 부르시더라 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가보니 무엇인가 장황하게 설명하심에도 불구하고 말을 못알아듣자, 따라오고라 하셨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그분 댁에를 갔더니, 화분에 든 예쁜 꽃을 가르치면서 ”이것을 주고싶은데 갖지 않겠느냐“고 물으셨답니다. 어머니는 원래 꽃을 좋아하시는 분이라서 기쁜 얼굴로 ”고맙다“고 인사를 한 후에, 꽃을 들고 와서 화분에 심긴 꽃을 어머니의 화분에 옮겼습니다. 그리고 다시 가서 빈 화분을 돌려주셨답니다. 빈 화분을 본 이웃집 할머니가 깜짝 놀라면서 ”화분까지도 주는 것이니까 화분도 가져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저는 어머니의 설명을 듣다보면, 마치도 어머니가 전혀 언어에 불편 없이 이웃과 사이좋게 지내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때부터 언어라는 부호를 통해 하나님은 인간에게 말씀하셨고 들을 수 있는 통로를 인간에게 여셨습니다. 또한 인간사이에서도 언어로 얽힌 희로애락을 볼 수 있습니다. 용기 있는 지도자의 말 한마디가 역사를 바꾼 이야기 등이라든가, 아무뜻 없이 툭 던진 며느리의 말 한마디로 인해, 시어머니가 밤새 잠을 못 주무시고 뜬눈으로 새우며 눈물지으셨다는 이야기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얼마든지 들을 수 있습니다. 언어라는 것은 마치도 예술가의 손에 쥐어진 붓과 갔다고 견주고 싶습니다.

함께 일하고 있는 어느 분이 늘 무표정하고 짜증스런 얼굴로 대할 때, 그 모습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출근했다가도 상대방의 그런 모습을 대하게 되면, 괜히 자신까지도 짜증이 날 것입니다. 이럴 때, 어쩌다가 그 상대방이 웃을 기회가 있으면, 놓치지 말고 극구 칭찬해 주는 것입니다. “어머나, 그렇게 웃으시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요. 당신이 웃으니까 이 사무실이 온통 훤해집니다. 당신의 웃음 속에 들국화와 같은 향기가 서려있는 듯해요…” 등등의 말을 통해서 상대방의 굳은 얼굴에 더 자주 웃음꽃을 그려 줄 수 있게되지요. 사람들은 누구나 칭찬 받는 일을 하고 싶기 때문이지요.

성경에 나타난 신앙인 들은 말에 대한 위력에 대해서 여러 곳에서 지적하였습니다. 야고보는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 (약3: 2- 10)

저도 말에 대해서 실수 할 때가 참 많이 있습니다. 목사의 아내로소, 자녀들의 어머니로서 좀더 신중하고 은혜스러운 말을 쓰려고 노력을 하지만, 불쑥불쑥 마음에도 없는 말이 튀어나올 때가 있어 곤욕을 치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저 혼자서 괜히 얼굴이 붉어지고 후회 막심하게 되지요. “차라리 가만히 있었으면 본전이라도 찾을 것을…!”

성경에 말을 아끼고 말을 유용하게 사용하고 말로 범죄치 안키를 무척이나 애쓴 욥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평생에 “넘어져 가는 자를 말로 붙들어 주었고 무릎이 약한 자를 강하게 하였다” (욥4:4)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죄없이 사단으로부터 고난받는 중에도 “결국 내 입술이 불의를 말하지 아니하며 내 혀가 궤휼을 발하지 아니하리라”(욥 27:4)며 입술로 하나님께 범죄치 않기를 맹세하였습니다. 성경의 지혜 자들은 일찍이 말에 대한 위력을 알고 있었기에 말을 통해 사단에게 이용당하지 않으려는 명철함을 가졌던 신앙인 이었습니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전도서 5:2)

다윗은 시편 (15편 1-3절)에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 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일삼으며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그 혀로 참소치 아니하고…” 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늘 자신의 외면 뿐 만이 아니라 내면에 진실을 말하고자 무척 애를 썼음을 성경을 통해 말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 중에서도 다윗 왕과 같이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사셨던 분이 계십니다. 그는 에브라함 링컨 대통령이었는데, 미국 역사상 가장 암흑기에 대통령이 되셨던 분입니다. 그는 남북으로 갈라진 국민들을 하나로 통합하고 피의 역사를 종식시킨 분으로서, 대통령에 취임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내가 임기를 마칠 즈음에 만일 내가 권력을 행사하는 자리에 앉아있었다는 인상을 남긴다면 나는 실패자입니다.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친구 한 명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그 친구는 내 마음속에서 바른 길을 가르쳐 주는 자입니다” 링컨은 1865년 위싱톤의 포드극장에서 저격 당하여 사망 할 때까지, 내면에 진실을 말하고자 늘 애쓰며 살았기에 위대한 대통령으로 남은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성도들이 가장 크게 시험 당하는 것 중에 하나가 말로인한 것임을 종종 듣게됩니다. 어느 성도 님이 오랫동안 교회를 나오지 않다가 어느 날, 새롭게 마음을 먹고 교회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안면이 있는 분이 교회입구에서 너무 반가워서 “아니, 오늘 왠 마음을 먹고 교회를 다 오셨습니까?”하고 인사했습니다. 그런데, 상대방은 가뜩이나 오랜만에 교회에 와서 좀 미안하고 쑥스러웠는데, 반갑다고 표현한 분의 인사가 생각 할수록 영 기분이 나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분은 다시 교회에 발길을 끊었다는 분의 경우를 들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성숙된 언어를 쓰도록 성경은 말씀하였습니다. 성숙되었다함은 귀에 듣기에만 즐거운 말이 아니겠지요. 내 기분이나 감정에 맞춘 일방적인 말이 아닌, 상대방의 입장과 처지를 최소한 이해하고 알아보려는 열린 마음 가운데서 오고가는 대화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봅니다.

미국인들의 대화를 가만히 들어보면 상당히 말에 조심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행여나 상대방의 한 가지의 단점이나 잘못을 지적하기 위해선, 아홉 가지를 먼저 칭찬하는 것을 종종 봅니다. 될 수 있으면 아무리 잘못을 저지른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의 인격이 다치거나 상하지 안토록 미리 방어를 단단히 쳐놓고, 공정한 대화를 이끌도록 서로 노력합니다. 상대방이 아홉 가지를 좋다고 했는데, 그 한가지 단점이야 노력해서 못 고칠 이유가 없는 것이지요.

“무릇 더러운 말은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 대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4:29)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3:17) “너희 말을 항상 은혜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르게 함같이 하라” (골4:6)

사랑하는 청취자 여러분! 오늘도 우리가 무심코 쓰는 말속에 넘어진 자가 무릎에 힘을 얻고 일어설 수 있습니다. 불화하던 가정이 화목 될 수 있습니다. 언어의 위력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될 것입니다. 성경은 지혜 있는 자의 말과 어리석은 자의 말을 통해 의인과 악인으로 종종 구분하였습니다. 기왕이면, 우리가 있는 곳엔 덕망 있고 지혜있는 말들이 오고 간다면, 그리스도인들의 생활문화가 한층 더 아름답고 풍요해지겠지요?

— 윤완희, 9/17/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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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TaeHun Yoon

Retired Pastor of the United Methodist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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