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하늘 그림자​

윤태헌(UMC원로목사, Knoxville TN)

노종해 목사 역 (https://www.dangdang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52784&page=6&total=11666)


삼 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나는 다시

영설 서상환(令雪 徐商煥) 화백을 찾았다.

부산에서,

아름다움의 길을 함께 걸었던 오랜 벗을 만나기 위해.

​

예전에도

그의 화실을 찾곤 했다.

숨 쉬는 듯한 화폭들 사이에서,

기도의 계절처럼 쌓여 있는 책들 사이에서,

내 그리움은 늘 그곳에 머물렀다.

​

그러나 오늘,

나는 그의 집으로 향했다.

​

아니,

시간 그 자체를 향해 걸어간 것이었다.

​

아!

떠남을 앞둔 마음은 참으로 야릇하다.

​

한국을 떠날 준비를 하던 내 안에서

무언가가 끝내 작별을 허락하지 않았다.

평범한 주말,

그 마음은 나를 그의 집으로 이끌었다.

​

사모님께서 따뜻하게 우리를 맞아주셨다.

​

한때는

네 사람이 한 식탁에 둘러앉아 웃음을 나누었다.

​

그보다 훨씬 오래전에는

오직 두 사람.

​

화가와 나.

​

길이 끝없이 이어질 것이라 믿던 젊은 날이었다.

이제 그는

늙어가는 대지 위에 드리운

하늘 그림자처럼 고요히 앉아 계신다.

​

그는 말씀하셨다.

​

“예술은 삶의 현장에서 태어나 하늘의 형상을 찾아가는 것이다.”

​

그렇다.

​

나는 기억한다.

​

성지 십자가의 길(Via Dolorosa)에서

목판화가 처음으로 고난의 결을 배웠던 그때부터,

빛이 스스로의 반대를 만나 마침내 하나가 되는

그 성스러운 성화(聖畵)에 이르기까지.

​

그의 삶은

오직 하나의 순례였다.

하느님의 얼굴을 향해 쉼 없이 걸어가는 끝없는 순례.

​

그림을 그리고,

또 그리고,

숨이 다할 때까지.

​

의식마저 사라질 때까지.

마침내

손만이 남을 때까지.

​

그 손은

마치

다른 숨결에 이끌리듯

움직인다.

오,

인간의 언어를 넘어선 언어여!

오,

오직 하느님께 속한 말씀이어!

​

오,

의식보다 더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신비한 샘이여.

산은 자연 속으로 녹아들고,

자연은 다시

구도하는 영혼 안에서 새롭게 깨어난다.

​

그 길을

한 순례자가 걷는다.

창조 안에 감추어진 형상을

끝없이 찾아가는 사람.

​

그의 기쁨은

결코 소유가 아니다.

​

가능성이다.

​

그는

하느님 자신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

하느님께서

세상 위에 남기신

그 그림자를 그린다.

삶 자체가 아름다움이다.

​

아름다움이란

하느님의 갈망 속에서 창조된 자기 자신이 되어 가려는

끈질긴 수고이다.

​

얼마나 치열하게

오직 거룩하신 분을 닮기 위해 애써 오셨던가.

​

진리.

생명.

아름다움.

그리고 자기 자신.

​

이 넷은

서로 다른 말이 아니다.

​

하나의 몸이며,

하나의 신비이다.

​

반세기가 넘는 세월,

기다리는 화폭 위에 성실하게 쌓여 온 붓질 속에서

그 신비는 조용히 드러났다.

​

그의 작품은

투명한 신앙이 되었고,

​

눈에 보이는 경배가 되었으며,

​

색채를 입은 침묵이 되었다.

​

우리 가운데

누가

이러한 구도자의 길을 끝까지 따를 수 있을까.

​

누가

이토록 거룩한 갈망을 견디어 낼 수 있을까.

​

영설(令雪)

​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로

이 한국의 하늘 아래 서 계신 그분도

​

언젠가는

처음 그를 깨우셨던 그 숨결의 부르심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실 것이다.

​

산 너머로

저녁 햇살이 소리 없이 사라지듯,

그 역시 조용히 우리 곁을 떠나실 것이다.

​

그러나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

셀 수 없이 많은 성화들.

​

영혼 깊은 곳에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그림들.

깊은 관상의 침묵.

회화의 색채와

영원의 빛이 맺은 혼인.

​

그 모든 작품 속에는

창조주의 숨결이

계속 살아 있을 것이다.

​

그리고 우리가

그분의 그림 앞에 설 때마다,

​

우리는 깨닫게 될 것이다.

그 늙은 순례자는

결코 떠난 것이 아니었음을.

​

그는

우리 안에서 숨 쉬는

또 하나의 숨결이 되어 있음을.

​

*윤태헌: 서울에서, 2026년 6월 27일

[*윤태헌 목사 부부는 6월 한 달 동안 한국 방문을 마치고, 테네시 낙스빌로 떠납니다.(2026. 6. 1~30.)./노종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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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TaeHun Yoon 윤 태헌 尹 太憲

Poet, Retired Pastor of the United Methodist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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