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이 오기 전,
한국의 어머니들은 조용히 일어나
쌀을 씻고 밥을 지으며,
김 오르는 숨결 속에 기도를 속삭이고,
하얀 소매 아래 눈물을 감추었다.
이 땅 자체가
슬픔을 기억하고 있었다.
산들은 침략의 재를 품고 있었고,
강물은 분단의 피를 기억하였다.
바람은 감옥의 벽을 지나
이름조차 불리지 못했던
여인들의 침묵의 방을 스쳐 갔다.
이 슬픔은 한(恨)이 되었다—
한 몸으로 감당하기에는 너무 깊은 상처,
세대를 넘어 이어지는 울부짖음,
얼어붙은 땅 아래 숨겨진 불꽃.
아이들은
그 이름도 모른 채
그것을 물려받았다.
어떤 이는
아버지의 떨리는 목소리 속에서 그것을 발견했고,
어떤 이는
새벽 전 공장 사이렌 소리 속에서 들었으며,
어떤 이는
말없이 역사를 견뎌낸
할머니들의 굽은 등 속에
그것을 품고 살아갔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상처 입은 땅에 들어오셨다.
정복자의 모습으로가 아니라.
제국의 권세를 입고서가 아니라.
찢긴 살을 통해,
상처 입은 손을 통해,
고난당하는 그리스도의 몸을 통해
오셨다.
그리고 교회들이 모이기 시작하였다.
독재 아래 지하실에서,
산골의 작은 예배당에서,
지친 노동자들이 함께 무릎 꿇던
도시의 붐비는 성전에서,
성령은
상한 마음 위에 부어지는 따뜻한 기름처럼
움직이셨다.
어떤 이는 정의를 위해 울부짖었고,
어떤 이는 치유를 위해 울었다.
어떤 이는 하늘 향해 주먹을 들어 올렸고,
어떤 이는 빈 손으로 기도하였다.
그러나 성령은
그들 모두를 받아주셨다.
치유에는 두 손이 있기 때문이다.
한 손은 쇠사슬을 끊고,
다른 손은 상처를 어루만진다.
한 손은 거리에서 예언자처럼 외치고,
다른 손은 한밤중 병든 자 곁에서 운다.
함께,
그들은 하나님의 숨결이 된다.
그리스도는 지금도
고난당하는 백성의 몸 가운데
걸어가신다.
그의 상처로 말미암아
상처 입은 자들이
치유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상처 없는 자들의 궁전이 아니다.
그곳은 함께 흉터를 나누는 집이며,
아픔이 연민으로 변하는 식탁이며,
겨울 뒤 봄비처럼
고백이 피어나는 성소이다.
그곳에서
늙은 이는 젊은 이 곁에서 기도하고,
침묵당했던 이들은 목소리를 되찾으며,
버림받은 이들은 사랑받는 존재로 불린다.
그리고 상처들은,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 않지만,
빛이 들어오는 창문이 된다.
아마 이것이
복음의 신비일 것이다.
하나님은
고난을 헛되이 버리지 않으신다.
백성의 눈물은
세례의 물이 되고,
한(恨)의 울부짖음은
부활의 노래가 된다.
그리고 교회는—
상처 입고, 떨리며, 불완전한 채로—
마침내
세상의 생명을 위한
치유의 공동체가 된다.
— 윤태헌, 2026년 5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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