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주일을 한주 앞두고, 양로원에 계신 김할머니를 방문하게 되었다. 여기 저기 휠체어에 앉아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 무료한 시간을 달래고 계신 노인들 속에서, “어머니 날을 축하합니다!” 하는 밝은 음성과 함께, 휠체어에 앉은 할머니 한분이 천진한 미소를 담뿍 담고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네었다. 나는 얼떨결에 그분께 화답하며 “네 어머니 날을 축하드려요!” 하며 응답했다. 할머니의 표정과 손놀림이 어찌나 천진스러운지, 어린 소녀가 이웃 친구의 어머니에게 손을 흔드는 모습과 같았다. 엘레베이터를 오르며 마치 내 어머니를 찾아 뵈러 오는 짧은 착각에 젖어들면서 김할머니의 병실을 찾아 들어섰다. 순간, 우리의 눈이 화들짝 열려졌다. 그것은 국민학교 다닌, 손주 손녀들이 그려서 보내준 그림으로 마치 교실벽에 붙어있는 그림들 처럼, 병실의 한쪽 벽을 온통 차지하고 있었다.
“어머나! 여긴 천국이군요!” 나의 놀란 표정을 보시며 할머니는 말씀하셨다. “잠이 잘 않오고 아이들이 보고싶거나, 속에서 왠지 부화가 솟는 날이면 마음을 달래며, 제가 하나씩 하나씩 그린 그림이지요!” 잔잔한 미소를 지으신 할머니는 촉촉히 눈동자를 적시었다.
놀라운 것은 ‘마음 속에 부화가 솟고 아이들이 보고 싶고, 눈물과 외로움 속에 그려낸 그림들’ 속에는, 온갖 지저귀는 새들이 나무가지 위에서 노래하고 있었으며, 해당화 꽃이 활짝 피어 그 향내가 방안 가득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또한, 수정 같이 맑은 바다 속에 뛰어노는 온갖 종류의 물고기들과 거북이, 그 위에서 닻을 올리고 한가롭게 놀고있는 아이들, 우아한 예복 속에 황금빛 왕관을 쓰고 계시는 예수님의 초상화, 소를 끌고 밭을 갈러 나가는 농부의 부지런한 모습 뒤에 쫄랑이며 따라가는 강아지… 몸이 불편하시어 몇년째, 밖을 나가보지 못하셨다는 할머니의 방에는 오히려 밖의 세상보다도 더욱 활기있고 아름다웠으며 안정된 평화와 기쁨이 가득차있었다.
곧 팔순을 바라보고 계신 김할머니는, 일찍 남편을 여의시고 혼자의 몸으로 자녀를 훌륭하게 키우셔서, 이 사회에 큰 공헌을 하고 있는 아들 며느리를 갖은 것이 무엇보다도 자랑스러웠다. 얼마전까지 만 하여도, 손자손녀들이 함께 사는 집으로 속히 돌아가기를 애타게 기다리던 할머니는, 이 세상에서 더 이상 아무 것도 부러운 것과 갖고 싶은 것이
없어 보이셨다. 귀가 어두우시니 밖의 소리도 잘 들리지 않고, 언어가 다르니 이야기를 나눌 만한 마땅한 친구도 찾으실 수 없으나, 그림을 통해 삶의 모든 회한과 두려움, 외로움과 고뇌를 걸러내신 후, 주님과 깊은 대화를 나누며 온갖 자연의 풍요함 속에서 맑은 영혼을 안고 살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삶의 체념이 아니고 승화임이 분명했다. 여성의 좌절이 아니고 초월의 모습이였다.
시냇물이 흘러내리듯 한 여인의 삶이 스쳐간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과거의 여인들이 걸어온 삶은, 차라리 인간의 수난사라 일컬어도 좋을 가부장제도 속의 거친 광야의 길이었다. 여인들의 모습이 아름다우면, 아름다운대로 그가 속한 사회와 관습에 의하여 수난을 당하였고, 자녀를 낳으면 낳은대로 그 아픔과 고뇌가 있었다. 또한 수태치 못하는 여인은, 한 인간으로서의 인격조차도 인정받지 못한 시대속에 온갖 수모를 참고 살아야 만 했던 때도 있었다. 세상 지식을 배우는 일에도 차별을 받아야 되었고, 여자라는 이유로 마땅히 희생의 요구들을 감수해야만 했다. 때로는 신체적인 조건으로 폭력 앞에 힘없이 설때도 있었고, 정치적인 희생물이 되기도 했다. 어느 순간에 목숨보다 아끼던, 남편과 자식을 전쟁터에 빼앗기고 홀로서야 만 되는 고통도 당해야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름없고 연약한 여인들은 일평생을 건 일편단심의 사랑을 남편과 자식들을 위해 홀연히 불태웠으며, 그들의 삶과 신앙고백을 통하여 이 땅에, 역사의 대로는 끊임없이 개척되었다. 험한 인생길을 오르내리며 궁핍과 가난함 속에서도 풍요를 잃지 않고, 고난과 아픔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피곤과 연약함 속에서도 게으르지 않으며, 손과 발이 닳토록 아낌없이 사용하여, 그 손길이 가 닿는 곳마다 꽃이 피어나고, 열매가 매어 달리고 창조를 일으킨다.
사라, 미리암, 룻과 나오미, 한나, 에스더, 세레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 마리아, 마르다와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살로메, 수잔나, 헬렌 켈러, 유관순, 김활란… 그리고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기도의 일꾼으로 평생을 산 여인들! 그 아름다운 이름들은 오늘도 이 땅의 역사에 아름다운 피륙을 짜내고 있다.
잠언 31장에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그 손의 열매가 그에게로 돌아 갈 것이요 그 행한 일을 인하여 성문에서 칭찬을 받으리라” 고 말씀하신다. 이세상의 모든 여인들이여! 어머니 날을 축하드립니다!
– 윤 완희, <1995년 5월 8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