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 (목사관 서신, 도시에 남은 사람들, 열세번째 이야기) 1994, 윤 완희

소련이라는 국가 이름이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졌습니다. 그가 믿고 존경하던 지도자는 실각하고, 새 지도자가 들어앉았습니다. 들려오는 소식에 사람들은 새 세계가 열렸다고 외칩니다. 멀리 지구에서 들려오는 무선 전화 속의 아내의 음성은 그가 살아 있음을 알립니다.

“세상이 급변하고 있어요! 레닌의 동상이 사람들에 의하여 끌어 내려지고, 당신이 우주에서 일하는 한 달치의 봉급은 소시지 네 덩 어리를 살 가치로 하락했어요!”

“나는 이 역사 속에 누구인가? 나는 과연 다시 지구로 돌아갈 수 있는 가? 한 가지 확신이 오는 것은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의 나를 향한 마음만은 변함이 없으리라 … …. 비록 모든 것이 변하고 없어졌어도 나의 가정만큼은 변하지 않았겠지! 정치도 이념도 돈의 가치도 우주의 꿈과 계획도 모두가 덧없이 느껴지는구나. 인간에게 사랑만이 가장 귀중한 것이라는 진리가 새삼스러워진다.”

313일을 우주선에 몸담고 임무를 감당하던 소련 우주 비행사 세르게이 크리칼레프의 일기 중의 한 토막입니다. 1991년 그가 5천 비퀴의 지구를 도는 동안 고르바초프가 실각하고, 보리스 옐친 대통령이 선출되고 그의 조국이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열었습니다.

“인간에게 사랑만이… …”를 가슴 밑바닥 깊이 새기며 우주선에 앉아 이 지구를 향한 그리움과 철저한 고독의 눈물에서 인간미를 느낍니다. 사랑이 있는 곳은 과연 어디일까요? 세르게이의 고백처럼 우리의 사랑의 근원을 묻는다면, 역시 가정일 것입니다. 아내와 남편, 부모와 자녀 가정 안에서의 사랑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성숙 한 관계 형성의 시작이라고 생각하며 자녀들과의 생활의 일면을 나누고자 합니다.

지난 크리스마스에 딸아이로부터 감동을 주는 선물을 받았습니다. 아이는 그 선물을 내밀며 위로의 말까지 곁들이는 것이었습니 다. “엄마! 비록 늦었으나, 평생 못 가지시는 것보다는 나을 거예요! 여기 엄마가 어릴 적 갖고 싶어하셨다는 인형을..··”하면서 눈이 동그랗고 긴 노랑머리의 인형을 내밀었습니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날 저녁, 흑인과 백인 홈레스 여인들을 위한 파티가 있었습니다. 늦은 저녁이었으나 교인들과 우리 아이들이 참석해 조촐한 파티를 열었습니다. 그때, 나는 어린 시절의 가난과 추위 속에서 떨던 잊지 못할 추억들 속에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짧은 간증으로 나누었습니다. 그 시절, 어린 여자 아이들이라면 누구나 갖고 싶어하던 노랑머리의 인형을, 나는 집안이 어 려워 끝내 가질 수 없었습니다. 내가 할 수 있었던 일은, 종이에 인형과 옷을 따로 그려 가위로 잘라 붙여서 노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린 나의 손과 발은 동상으로 언제나 붉게 물들어 부어 오른 가운데 밤이면 가려워서 밤잠을 설쳐야 했었습니다. 추운 계 울날, 배가 고파서 참다 못하여 물이나 마음껏 마시려고 물 항아리를 열었을 때, 물은 칼날 같은 날카로운 몸을 세우고 항아리 안에 잔뜩 성이나 들어앉아 있었습니다. 조심스럽게 가는 얼음 덩어리를 잘라 내어 입에 넣고 우두둑 깨물어 먹었을 때의 내장 깊숙이 전해 지던 소름 끼치던 시리움, 폐병과 심장병을 겸하여 앓고 누워만 계시던 아버지의 모습, 어린 나의 눈에 비친 세상은 어둡고, 춥고, 소망이 전혀 없는 미래를 향하여 질주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시뻘건 각혈 만큼이나 절망적이던, 그런 어려운 삶 속에서 그리스도는 내게 찬란한 빛이 되어 그 어둡던 시절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는 내용의 간증이었습니다.

딸 아이들은 얼굴이 붉게 물들고 눈물을 글썽이며, 나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습니다.

그 뒤 아이들은 생일, 어머니날, 회의차 집을 비웠다가 돌아올 때 등,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의 어린시절 갖고 놀지 못하였던 – 앞치 마를 두른 흰 곰인형, 풍선, 꽃 등의 선물들을 보내오곤 합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이런 선물들을 받을 때마다, 내 속에 숨어있는 과거의 상처받은 아이(Inner Child)가 치료함을 받는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장난감 가게를 들르게 되기라도 하면, 인형들 앞에서 아이들보다도 더 탄성을 올리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내 몫으로 인형을 성큼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나 자신도 이 나이에 왜 그렇게 인형들을 좋아했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아이들로부터 인형을 선물받은 후, 아이들은 때때로 나의 침대 위에 올라와 같이 인형놀이를 합니다. 그리고 나는 어린 시절로 돌아가 마음껏 인형의 머리를 빗기고 드레스를 새로 입히며, 그 시절 동무들과 못다한 이야기를 아이들과 함께 나누곤 합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언제까지나 부모의 품에 안겨 인형놀이만 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들은 알에서 막 깨어난 작은 새가 뒤뚱거리며 날개를 퍼득이듯이, 그들의 가능성을 확인하며 생활의 반경을 자꾸만 넓혀 가려 합니다.

어느 날, 작은애가 정색을 하며 말하였습니다.

“엄마 학교에서 집으로 걸어갈 터이니 구태여 데리러 오지 마셔요”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얘가? 찻길을 계속 건너야 하는데, 큰일나려고 … …”

“이젠 다 컸어요! 혼자서도 길을 잘 건널 수 있다고요!”

아이의 단호한 태도에 당황한 것은 나였습니다. ‘이제 겨우 아홉 살짜리가 다 컸다고? 옳지, 세상이 조금씩 만만해 보인다 이거로 군.”

그러나 언제부터였는지 아이들의 방문 앞에 나붙기 시작한 대 자보들을 생각하며, 아이들이 보이지 않게 부모의 품으로부터 빠져 나가려는 모습을 알게 됩니다.

“Don’t Disturb! (방해하지 마시오!)”
“Please Knock! (노크를 하시오!)”

방해라니! 어릴 적엔 시도 때도 없이 병치레와 사고로 인해 부모를 놀라게 하더니만, 이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가를 조금씩 알게 되는지, 하는 말이라니 … …. 이제는 학교도 혼자 다닐 수 있다고 선언하는 아이 앞에 왠지 섭섭하고 서운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혼자서 찻길을 건너가는 아이가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멀찌감치 따라가며, 묘한 감상에 뒤섞입니다. 아니, 나는 분명 어머니로서 좌절하고 있었습니다. 얼마 전만 해도 우리 엄마, 아빠만이 제 생애 절대자로 믿던 아이들은 의식을 깨듯이 선생님과 주변 인물들에 대하여 믿고 따르기 시작합니다.

“얘들아 너희들 대학가더라도, 아예 멀리 갈 생각들 말아라! 집에서 학교 다니고, 특히 남자 친구들이나 여자 친구는 대학교 졸업 때까지 사귈 생각들은 하지 말아라!”

이제 열다섯 살, 아홉 살, 여섯 살짜리들을 불러앉혀 놓고 미리 엄포를 합니다. 말도 되지 않는 억지 소리를 해보지만 자신이 없습니다. 무분별한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그들의 결단을 꺾거나 능력을 약화시키지 않았는가 하는 자책감에 사로잡히며, 아이들은 결국 나의 소유물로 남을 수 없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집 앞의 전나무 가지 위에 쓸모없이 덩그러니 남아 있는 빈 새 둥지들을 생각하면, 어느새 쓸쓸하기 그지없습니다. 둥지는 알이 있을 때만 필요한 것을 … … 알에서 깨어난 어린것들이 날기 위하여 날개를 파닥거리며 땅으로 떨어지기도 하고, 날개를 부러뜨리는 위험조차 감수하면서 결국엔 아무도 둥지를 지키려 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에미 가슴이 따뜻하고 포근하고 안전하다지만, 경계가 그어져 있지 않은 그 푸르고 해맑은 높은 하늘이 기다리고 있는데 … ….

날아야 되겠지! 더 높고, 더 멀리, 더 힘차게… …. 어미새가 정녕 닿지 않았던 그 세계를 향하여 … …. 그래, 포기하자. 평생 그들을 잡아놓을 생각일랑은 … …. 언젠가는 완전 독립’을 외치며 그 원대한 미래 속으로 떠나갈 아이들을 위하여 사랑, 사랑만 하자! 언젠가는 나의 세대는 지나가고 영원 속으로 먼저 귀의하는 날이 오리니.

우주인 세르게이 크리칼레프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지는 나도 모릅니다. 그러나 인간 최고의 과학 문명의 영웅으로서, 그가 깨달 은 진리는 사랑만이 인간의 가치를 나타내는 영원 무궁한 진리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가정을 주시고 그 안에 자녀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두 손을 모으며, 언제나 그분의 품속을 빠져나가고자 애쓰던 나의 철없는 모습이 새삼스레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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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ward the Dusk

© TaeHun Yoon, 1972

I lift a shard of night,
arms spread wide—
and the sky begins to rise.

Through the snarl of wire I move,
and your house, my house
together climb into the light.

The stream bends onward,
while far away
dawn blooms behind a single fence—
not to bar us,
but to cradle morning’s flame.

With my heart,
a bundle opened wide,
I lay it on the western sky,
where even dust
becomes a shining road of stars.

(Relation Series – Part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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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로 묶어드리리”

어두운 한 귀퉁이를 떼어 팔 벌려서니

하늘이 내려서고

내가 내려가면

갈래 갈래 전깃 줄 사이에 비집고

내 집 네 집 하늘 오른다

개울 속을 한참 꼬불 대면

먼 동 트는 하늘이

한 묶음 울타리 안에

내 마음으로

팔 벌린 한 묶음

서녘까지 드리리라

© 윤 태헌,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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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e You Climbing the Ladder?” (Letter from the Parsonage, Those Who Remained in the City, Twelfth Story) 1994, Yoon Wan-Hee

It was a crisp early autumn morning. The church custodian had already set a tall ladder against the wall, preparing to wash the church windows. This yearly cleaning of all the windows was by no means an easy task. The lower panes were simple enough to reach, but climbing up to clean the second-story windows from outside with only a ladder was always a dangerous undertaking.

Usually, I paid little attention to his work, as though it were something ordinary. But on this day, I felt a quiet worry rising within me. Nearing his retirement, he now seemed frailer than before, sometimes even gasping for breath when the work became too much. Yet with his usual cheerful and bright demeanor, he was ready to climb the ladder.

“Al, please be careful!”

I pressed my hands together in prayer, my face filled with concern, urging him to stay safe.

“Don’t worry,” he replied with a radiant smile. “This is my seventeenth year doing this. The Lord who protected me through the first sixteen will surely protect me again today.”

Step by careful step, he climbed, while the old wooden ladder creaked and groaned under his weight, as if resisting.

“The higher I go, the less frightening it feels,” he said calmly. “When I’m below, my thoughts make me afraid. But once I climb, I entrust everything into the Lord’s hands.”

With steady caution, he reached out his hands and began to wipe away the dust of the world from the stained glass.

The sight reminded me of my childhood. I recalled watching my father climb high on a ladder to repair the thatched roof of our home. It seemed as if the white clouds might brush his hair at any moment. While he stepped away briefly, I waited eagerly, planning to climb the ladder myself. When he returned, he found me standing below, gazing up, and sternly warned me never to climb it. But curiosity overcame me. Once he was out of sight, I quickly placed my foot on the ladder.

I thought that if I could just reach the top, I would be able to touch the drooping willow branches and the drifting clouds. But suddenly, my rubber shoes slipped, and in an instant the ladder and I crashed down together. The feeling was one of utter despair, of being cut off from everything. My parents and neighbors rushed over in alarm, while I wept bitterly. Yet it was not my bleeding knee that pained me most—it was the knowledge that I might never climb that ladder again.

As I grew older, that unfulfilled longing often returned to me in dreams. The ladder I could not reach left behind an invisible wound in my heart. Even now, I sometimes dream of climbing again—this time with patience, steadiness, and care—to touch the willow’s dancing hands and the soft white clouds.

Today, too, we climb the uncertain ladders of life. But how earnestly, how faithfully, do we climb? Even with dreams and fervent desires, if we rush forward in haste—our feet in sweaty rubber shoes—we may end in a fall from which there is no return. With the freedom of choice God grants us, we must examine with eyes of faith whether we ascend with certainty and our very best effort. For a result without process is vain, and a tomorrow that ignores today is like grasping at the wind. Even if tomorrow we seize the clouds and cling to the willow, today let us climb barefoot.

That morning, the church windows reflected the blue autumn sky as sunlight danced upon them. Al had once again finished his seventeenth year of cleaning them without harm. Yet what filled me with the greatest joy was not merely his safe return to earth, but the way his life itself—full of confidence, joy, and faith—climbed ever higher, rung by rung, on the ladder toward eter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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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다리를 오르십니까?” (목사관 서신, 도시에 남은 사람들, 열두째 이야기) 1994, 윤 완희

청명한 초가을 이른 아침. 교회의 사찰인 그는 어느 사이에 사다리를 높이 세워 놓고 교회 유리창을 닦을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일 년에 한 번 있는 전체 유리창 닦기는 참으로 용이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낮은 곳이야 쉽게 닦을 수 있으나, 이층의 유리를 밖에서 사다리를 기대어 놓고 올라가 닦는 것은 위험을 동반한 일이 었습니다.

평소에는 그의 일에 대하여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지나치던 나는, 은근히 염려가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정년 퇴직을 앞둔 그가 올 해는 많이 노쇠해 보이고, 일이 벅찬 듯이 때로는 숨을 헐떡이는 모습을 보곤 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평소의 모습대로 쾌활하고도 밝은 모습으로 사다리를 오르려 하고 있었습니다.

“앨, 조심하셔요!”

나는 염려되는 표정으로 두 손으로 기도하는 자세를 취해 보이며 그의 안전을 당부하였습니다.

“염려마셔요. 올해가 벌써 열일곱 번째인데, 열여섯 번째까지 지켜주신 주님께서 이번에도 지켜주심을 확신하니까요.”

그는 환하게 미소지으며 한 발 한 발을 조심스럽게 옮기었습니다. 그가 발길을 옮길 때마다 나무 사다리는 삐꺽삐꺽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그의 무거운 몸무게에 저항하기라도 하는 듯하였습니다.

“높이 올라갈수록 보기보다 무섭지 않아요. 밑에 있을 때에는 내 생각 때문에 무서워했지만 올라오면 이젠 주님의 손에 모두 맡기게 되지요.”

그는 차분하고 조심스러운 자세로 손을 뻗쳐 세상 먼지로 얼룩진 유리창을 닦기 시작하였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초가지붕을 고치기 위하여 사다리를 높이 세우고 올라가 일하시던 모습이 무척 신기해 보였습니다. 아버지의 머리끝에 금방이라도 하얀 구름이 와 닿을 것만 같았습니다. 나는 아버지가 화장실을 가시는 틈을 타서 올라가 보리라 마음먹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참만에 아버지가 사다리에서 내려오시면서, 밑에서 꼼짝 않고 바라보며 서있던 내가 믿기지 않으신 듯이 사다리 위를 절대 오르지 말라고 당부하시며 떠나셨었습니다. 그러나 호기심에 찬 나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얼른 사다리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사다리의 끝에 오르면 늘어진 버드나무 가지와 하늘의 구름을 만질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이랍니까. 고무신을 신었던 나의 발이 미끄러지면서 일순간에 그만 사다리와 함께 밑으로 곤두박질치고 말았습니다. 순간의 느낌이었으나 그것은 완전한 절망이며 단절과도 같았습니다. 놀라서 달려오신 부모님과 이웃 아주머니들의 호들갑 속에서 나는 목놓아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시뻘겋게 피 흐르는 깨어진 무릎 때문이 아니라, 다시는 사다리 위를 올라갈 수 없으리라는 아픔이었습니다. 자라면서 그때의 아쉬움은 곧잘 꿈이 되어 나타났으며, 끝 내 오르지 못했던 사다리는 보이지 않는 상혼을 남겨 주었습니다. 그 순간이 돌아온다면 정녕 차분함과 성실함, 조심성 있는 발걸 음으로 올라가, 춤추던 버들가지의 고운 손과 하얀 구름을 만져 보리라는 꿈을 지금도 가끔 갖게 됩니다.

오늘도 삶의 불확실한 사다리를 오르기 위하여, 우리는 얼마나 성실하고 간절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 …. 꿈은 있고 간절한 소원이 있어도, 땀난 고무신을 발에 걸치고, 조급한 소망으로 대든다면 회복할 수 없는 영원한 추락에 이르지 않을까요? 우리에게 선택의 자유함이 있을 때, 우리의 발길이 확신과 최선의 노력을 가지고 올라가는지를 신앙의 눈으로 살펴야 될 것입니다. 과정 없는 결과는 헛된 것이요, 오늘이 무시된 내일은 정녕 허공에 대고 바람을 잡으려는 손과 같습니다. 내일은 우리가 구름을 잡고 버들가지를 부여잡더라도 오늘은 맨발이 되어 오릅시다.

초가을 푸른 아침 하늘을 담은 교회의 창문이 햇살에 반사되었습 니다. 앨, 그는 올해로 열일곱 해 유리창 닦기를 무사히 마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정말 기뻐할 일은 그의 삶이 확신과 기쁨에 찬 영원으로서 사닥다리에 더욱더 충성되어 오르는 모습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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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ctober’s Shaman Dance”

The shaman threads the moon on high,
A silver knot in midnight sky.
She spins beneath its haunted glow,
Where truth and shadow come and go.

The willow drinks from steel’s sharp tongue,
Its roots still hum the songs unsung.
A borrowed light, a fleeting breath,
A vow to rise beyond all death.

At crossroads thick with ash and flame,
The people call the lost one’s name.
The incense curls, the pig’s head bleeds,
The tyrant sows his bitter seeds.

A birch breaks stone with quiet grace,
Its roots reclaim the buried place.
They stretch beyond the sunset’s red,
Through sleepless nights where hope has bled.

The serpent slides through smoky glass,
A whisper drifts as shadows pass.
Time bends to hear the voiceless plea—
Denied by chains, yet set soul free.

In yards where birch stakes pierce the ground,
Tall towers rise, the roads are bound.
Yet stones still hold their breath in pain,
While silence sings its cold refrain.

The roots dream dust, tomorrow’s sand,
A future shaped by trembling hand.
The bear eats garlic, weeps alone,
Its grief adrift, by none yet known.

The station hums, the dance is done,
The crowd dispersed, the tale begun.
The bear gives birth to bitter truth,
A cry of dust, the cry of youth.

Cheoyong* once sang, then turned away,
His voice a stone lost in decay.
“Don’t break the wall,” the elders pled,
“Stack stones until they crown your head.”

I fear today, yet still I stand,
And pray to walk tomorrow’s land.
Through cracks in walls my steps abide,
Where dance and sky no more divide.

Hair veils the grave, a sacred line,
Where earth and heaven intertwine.
The cars that circle, lost in trance,
Are shamans too, in broken dance.

The spearhead shakes, the incense bleeds,
The birch still breathes, the bear still feeds.
One step, one word, the silence stirred,
A wind that leans, an unheard word.

The cosmos shivers, cold and wide,
No shelter left, no place to hide.
Its mouth agape, it spills the night—
Ten thousand cries for what is right.

[Beginning Series – Part 4]

© TaeHun Yoon, 1972 (Rewrite in 2025)

* Cheoyong was a mythical figure from the Silla Kingdom (57 BCE–935 CE), said to be the son of the Dragon King of the Eastern Sea. During the reign of King Heongang (875–886), Cheoyong came ashore at Gaeunpo (modern-day Ulsan) and joined the royal court. The king gave him a wife, and Cheoyong settled in the capital, Sorabeol (now Gyeongju).

One night, Cheoyong returned home to find his wife in bed with a stranger. Instead of reacting with anger, he sang and danced:

“Under the bright moon in the capital I reveled the night away. Back home, I found four legs in my bed. Two are mine—but whose are the other two? She was mine, but has been taken. What can be done?”
The stranger, revealed to be a plague spirit, was so moved by Cheoyong’s grace and restraint that he vowed:

“From now on, if I see even your image, I will never enter that house.”
This tale gave rise to the tradition of hanging Cheoyong’s mask or image on doors to ward off evil spirits—especially during year-end exorcism rites.

🎭 Cheoyongmu: The Dance of Cheoyong
The story inspired Cheoyongmu, Korea’s oldest surviving court dance. Originally performed solo to drive away disease and misfortune, it evolved into a five-person masked dance representing the five cardinal directions (East, West, South, North, Center), each dancer wearing a robe of symbolic color.
Cheoyongmu is now recognized as:

A UNESCO Intangible Cultural Heritage (since 2009)
A Korean Important Intangible Cultural Property (since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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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림 굿”

무당은 달을 꿰어 올리네,
한밤하늘 은빛 매듭으로.
그녀는 그 으스스한 빛 아래 돌며,
진실과 그림자 흐르듯 오가네.

버들은 강철의 날카로운 혀를 마시고,
그 뿌리는 불린 노래를 여전히 속삭이네.
빌려온 빛, 사라지는 숨결,
죽음을 넘어 일어서리라 맹세하네.

재와 불꽃으로 가득한 갈림길에서,
사람들은 잃어버린 이름을 부르네.
향은 피어오르고, 돼지머리 피 흘리며,
폭군은 쓴 씨앗을 뿌리네.

자작나무는 고요히 돌을 깨뜨리고,
그 뿌리는 묻힌 자리를 되찾네.
저녁노을 붉음을 넘어 뻗어,
희망이 스러진 밤을 지나네.

뱀은 연기 낀 유리 속을 미끄러지고,
속삭임은 그림자 따라 흘러가네.
시간은 말 없는 탄원을 들으려 굽히고—
쇠사슬에 부정당했으나, 영혼은 풀리네.

자작나무 말뚝이 땅을 찌른 마당 위,
높은 탑은 솟고 길은 묶이네.
그러나 돌들은 여전히 고통의 숨을 참고,
침묵은 차가운 후렴을 노래하네.

뿌리는 먼지와 내일의 모래를 꿈꾸고,
떨리는 손이 미래를 빚네.
곰은 마늘을 씹으며 홀로 울고,
알 수 없는 슬픔 떠돌아가네.

역은 웅웅 울고, 춤은 끝나며,
군중은 흩어지고, 이야기는 시작되네.
곰은 쓰라린 진실을 낳고,
먼지의 외침, 청춘의 울음이 터지네.

처용*은 한때 노래하다 돌아섰고,
그 목소리는 길 잃은 돌이 되었네.
“벽을 깨뜨리지 말라.” 장로들은 간청하며,
“돌을 쌓아 머리 위에 올려라.”

나는 오늘이 두렵지만 여전히 서서,
내일의 땅을 걷게 되길 기도하네.
벽의 틈새로 걸음을 옮기니,
춤과 하늘 더는 나뉘지 않네.

머리칼은 무덤을 가리며, 성스러운 선이 되어,
땅과 하늘을 엮어 이어주네.
빙빙 도는 차들도 황홀 속에 길을 잃고,
부서진 춤의 또 다른 무당이네.

창끝은 떨리고, 향은 피 흘리며,
자작은 숨 쉬고, 곰은 여전히 먹네.
한 걸음, 한 마디, 침묵은 흔들리고,
기운 바람 속 들리지 않는 말이 있네.

우주는 떨며 차갑고 넓어,
은신처 없고 숨을 곳 없네.
그 입은 벌어져 밤을 쏟아내며—
만 갈래 울음, 정의를 향한 외침이네.

[Beginning Series – Part 4]

© 윤 태헌, 1972 (2025년 추고)

* [위키백과] 처용무(處容舞, 영어: Cheoyongmu)는 대한민국의 가면극으로, 1971년 1월에 대한민국의 국가무형문화재 제39호로 지정되었으며, 2009년 9월에는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선정되었다. 궁중나례로 처용 가면을 쓰고 추는 춤을 말하며, 궁중무용 중에서 유일하게 사람 형상의 가면을 쓰고 추는 춤으로 ‘오방처용무’라고도 한다. 통일신라 헌강왕(재위 875∼886) 때 살던 처용이 아내를 범하려던 역신(疫神 : 전염병을 옮기는 신) 앞에서 자신이 지은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춰서 귀신을 물리쳤다는 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처용무는 5명이 동서남북과 중앙의 5방향을 상징하는 옷을 입고 추는데 동은 파란색, 서는 흰색, 남은 붉은색, 북은 검은색, 중앙은 노란색이다.[1]

춤추는 사람 다섯 명이 처용 가면을 쓰고 오방(五方)을 상징한 오색의상을 입은 5인의 무원이 추는 전형적인 의식무용이다. 처용무의 기원은 신라에 있으나 고려와 조선조를 통하여 궁중나례(宮中儺禮)와 연례(宴禮)에서 처용면(處容面)을 쓰고 추는 괴이호방(怪異豪放)한 일종의 무극으로 연행(演行)되어 왔다. 본디 나례(儺禮)와 같은 벽사진경(辟邪進慶)의 구나가무(驅儺歌舞)로 연행되던 것이 앞에 있다응 관아의 향연에서 추어졌으며, 남자가 추는 춤으로 장엄하고 신비스러운 춤이다.

처용가무의 기원에 대해선 많은 논문이 발표되었으나 그 중 처용설화(處容說話)는[주해 1] 원초에 인류가 가졌던 벽사가면의 인격신화와 그에 따른 해석·설명에서 형성되었으리라는 의견은 처용설화의 해명을 위한 유력한 시사의 하나가 된다. 벽사가면의 민속은 신라 도깨비기와(鬼瓦)의 예는 물론이고 최근까지 문루(門樓)나 방패에 새겨진 귀면(鬼面)에 의해서도 볼 수 있으며, 민가(民家)에서도 귀면형의 탈을 문에 걸어놓고 잡귀의 침범을 방지하려 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신라 향가인 ‘처용가‘가 이루어지고 다시 고려조에는 일종의 극시적(劇詩的) 무가(巫歌)인 ‘처용가’로 발전되면서 처용무도 초기의 단순한 주술무에서 다양한 절차를 갖춘 의식무(儀式舞)로 발전, 조선조의 《악학궤범》에 실려있는 바 그대로 일종의 무극(舞劇)으로까지 계승·발전되어 조선조에는 세말(歲末)의 궁중나례에서 중심가무가 되기에 이르렀다. 처용무는 고려와 조선조를 통해 의식무로서뿐만 아니라 궁중과 궁가 및 양반 민가의 연악무(宴樂舞)로서도 많이 추어졌다.[2]


<역사>
처용무의 ‘처용’이라는 명칭이 기록되어 있는 문헌은 《삼국유사》를 필두로 해서, 《동경잡기》 《익재난고(益齋亂藁)》 《소악부(小樂府)》 《용재총화》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동국세시기》 《경도잡지(京都雜志)》 등에서 볼 수 있고, 또한 시작된 연대에 있어서도 신라시대(875-886)에 발생된 춤으로 되어 있다.

삼국유사》에는 헌강왕이 개운포(開雲浦)에서 만난 용왕의 아들이 처용이며, 처용은 자기의 아내를 범한 역신(疫神) 앞에서 처용가를 지어 불러 벽사의 기적을 가졌다고 한 것으로 보아, 처용무는 신라 때부터 추어졌다고 할 수 있다. 《고려사》 충혜왕조와 신우조에는 《처용희》(處容戱)의 기록이 있다. 성현의 《용재총화》에는 처용무는 고려시절 원래 한 사람이 검은 옷을 입고, 흑사모(黑沙帽)에 흑대(黑帶)를 두르고 붉은 가면을 쓰고 가무백희 중에 연희하였다. 그것이 세종 때에는 다섯 사람이 추는 오방처용무(五方處容舞)로 발전, 일대 무용극화하여 합설·학춤(鶴舞)·처용무·연화대무(蓮花臺舞)로 크게 변천되었으며 궁중나례와 향연에서는 의례 연희되었다.

성종 때 나온 《악학궤범》에는 처용무가 학무(鶴舞)와 연화대무(蓮花臺舞)를 합설해서 학연화대처용무(鶴蓮花臺處容舞)합설로 나례에서 연행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연산군 때에는 환관 김처선이 연산군에게 충언을 하다가 처형된 뒤, 연산군이 그의 이름인 “처(處)”와 “선(善)”에 대해 금자령을 내림으로써 한때 처용무가 풍두무(豊頭舞)로 이름이 바뀌기도 하였다.
처용무는 궁중 나례를 비롯하여 관아의 연향에서 연행되었으나 조선말기에 전승이 끊어졌던 것을 1928년에 《구황궁아악부》(舊皇宮雅樂部) 김영제(金甯濟), 함화진이수경(李壽卿)이 《악학궤범》과 장악원에서 쓰던 정재홀기(呈才笏記)를 참작하여 새로 안무한 것이다.


<특색>
이 춤의 발생과 아울러 용(龍)의 설화, 시가(詩歌)의 발생, 불사(佛寺)의 창건, 음악의 발생, 제액(除厄), 역신(疫身)을 막는 습속 등이 파생했다. 5행설(五行說)에 의거하여 방위(方位)에 다른 5색(靑·紅·黃·白·黑)의 의상을 입는 것이 이 춤의 특색이다.

<구성>
처용탈은 모시 또는 옻칠한 삼베로 껍질을 만들고 채색은 적면유광(赤面油光)으로 후덕한 모습으로 한다. 사모는 대[竹]로 망을 얽어 종이를 바르며, 두 귀에는 주석고리와 납주(鑞珠)를 걸고 복숭아 열매와 가지를 단다.

춤은 다섯 무원(舞員)이 각각 청(동), 홍(남), 황(중앙), 흑(북), 백(서)의 단의(緞衣)를 오방에 맞추어 입고 서서 처용가면과 사모를 쓰고 홍록흉배(紅綠胸背), 초록천의(草綠天衣), 남오군(藍襖裙), 홍방슬(紅方膝), 황초상(黃綃裳), 금동혁대(金銅革帶)를 띠고 백한삼(白汗衫)을 끼고 백피혜(白皮鞋)를 신고 춤을 춘다. 수제천(壽齊天, 빗가락 정읍)에 맞추어 두팔을 허리에 붙이고 청·홍·황·흑·백의 차례로 들어와 일렬로 북향하여 서서

신라성대소성대(新羅盛代昭盛代) 천하태평나후덕(天下太平羅候德)…

하고 처용가를 가곡(歌曲) 언락(言樂)가락에 맞추어 부르고 나서 향당(鄕唐) 교주(交奏)하면 처용 5인이 모두 허리를 굽힌 다음 5방으로 마주 서서 춤추다가 소매를 들어 안으로 끼는 홍정(紅程) 도돔춤을 추고나서 발을 올려 걸으며 무릎을 굽히는 발바딧춤을 추며 북향하여 섰다가 가운데 황(黃)과 사방은 반대로 향하여 춤을 춘다. 오방무원은 각기 무진무퇴(舞進舞退)하여 다른 방향으로 들어서는 발바딧작대무[作隊舞]를 추고 황은 북을 향하여 방향을 바꾸어 무릎디피춤을 추고 청, 홍, 흑, 백은 중앙을 향하여 춤을 추되 처음에 흑과 황이 대무(對舞)하고 청·홍·백이 차례로 대무한 다음 중앙을 등지고 추다가 제자리를 향하여 춘다. 회선(回旋)·우선(右旋)으로 흑(黑)이 먼저 나오고 황은 백과 홍 사이에 들어가 모두 제자리로 돌아왔을 때, 흑은 뒤로 물러서고 홍은 앞으로 나가 처용 5인이 가지런히 서면 일제히 북향하고 선 다음 노래를 한다.

“산하천리국(山河千里國)에 가기울총총(佳氣鬱葱葱) 하샷다 / 금전구중(金殿九重)에 명일월(明日月)하시니 / 군신천재(君臣千載)에 회운룡(會雲龍)이 샷다 / 희희서속(熙熙庶俗)은 춘대상(春臺上)이어늘…”

하고 창사(唱詞)를 가곡 우편(羽編)에 맞추어 부른다. 윗도드리가 시작되면 한삼을 좌우 어깨에 차례로 매었다가 뿌리는 동작으로 낙화유수(落花流水)를 추다가 청·홍·황·흑·백·처용의 순서로 퇴장한다.

<세계 유산>
2009년 처용무는 9월에는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선정되었다. 보유자로는 김용, 김중섭, 전수조교로는 이진호, 인남순이 활동하고 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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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Search of Our Friend

(From the Parsonage Letters, “Those Who Remained in the City,” Story Eleven, 1994)

© WanHee Yoon

One of the tasks of a parsonage in Queens Village, NY, near Jamaica, is to welcome visitors who may arrive at any time, day or night. Sometimes it means giving shelter to a traveler lost on a snowy midnight, preparing a warm meal for the hungry, providing clothes for those who have none, or helping someone stranded without fare reach their destination. Such moments are a special blessing given only to those who live in the parsonage.

Guests might come in broad daylight or at two or three in the morning. Some arrive with unavoidable circumstances, truly in need of help. Others come seeking aid to satisfy destructive habits—drugs, alcohol, gambling. At first, such visits left us surprised, annoyed, and even upset. But after nearly twenty years in the parsonage, we grew used to it. Instead, we began to give thanks that they came to us and not to be rejected or misused elsewhere.

In this distrustful age, when the world grows harsher and trustworthy people seem fewer, the parsonage is still seen as a place of refuge. Through those who come, we hear their stories and rediscover God’s unending love.

It is joyous to receive an unexpected gift, but there is a deeper, incomparable joy in sharing—even from our own lack—with a stranger. That joy does not fade with time; it rises again and again, remaining as treasure in the soul.

One autumn afternoon, as the season was fading, a weary Korean man in his fifties knocked on the door. Exhausted, nearly collapsing, he introduced himself:

“This morning, after thirty-four months, I was released from prison. I came walking since nine o’clock, hoping to find a friend who lived here. But I was told he moved two years ago. I don’t know where. My heart sank as I turned away… then I saw Korean children playing and found my way here.”

Sweat streamed down his scarred face. I quickly sat him down and ran to the kitchen. By grace, there was still warm rice in the pot. I set before him rice piled high, with green chili peppers, soybean paste, red pepper paste, kimchi, and a bowl of cold water.

It didn’t matter who he was—what could compare to a steaming bowl of rice with kimchi for someone who had longed for it through prison walls? His story could wait. Even his name didn’t matter. What mattered was that he had come to the parsonage. Sharing that meal brought tears to my eyes.

He prayed with eyes closed, then began to eat eagerly. Within moments, two bowls were gone. A smile broke across his face:

“Ah! How I longed for kimchi and pepper paste in prison…”

He then told his story. Thirty-eight years old. Immigrated to California in 1980, opened a vegetable store, married, then separated within three months. Came to New York for a new start. One night, walking out of a restaurant with a friend, he saw a woman being attacked by two men. He rushed to defend her, beating them badly. When police arrived, his friend urged him to flee, “I have a family!” but he was caught and imprisoned for violence.

His only friend visited once in nearly three years, holding the ten thousand dollars that had been his entire fortune.

As he spoke, tears brimmed. He sighed deeply. He had walked almost seven hours in search of that friend, carrying hope.

“He promised: ‘Don’t worry about money. When you’re released, I’ll help you start again.’”

But the friend had vanished. Still, he clung to that one word of friendship, believing it could heal the pain of thirty-four months behind bars.

He recalled his sister in California, who once kept a shop in Koreatown. But the riots of April 30—Rodney King, flames, looted stores, gunfire, wailing—had destroyed much of that community. He nodded, convincing himself her shop had survived.

The pastor asked his plan. He wished to go to Boston, to a friend working as a chef. “He will care for me until I can stand on my own,” he said. Given some fare and meal money, he left with relief, vanishing into the evening light.

As I washed his empty bowl, tears welled in my eyes. The sunset glowed red. Leaves fell in showers where he had sat.

Time and again we wound each other, yet still seek, long for, and trust in one another. Perhaps wandering is in our nature. Yet through these strangers, God whispers His love again.

Where can we meet our true friend? Remembering the eternal friendship of Jonathan and David, we are moved to tears by the mercy of God, who calls us “fri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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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친구를 찾아” (목사관 서신, 도시에 남은 사람들, 열한째 이야기) 1994, 윤 완희

언제든지 아무 때나 찾아오는 손님들을 맞는 일이 목사관의 임무 중의 하나입니다. 폭설이 내리는 한밤중에 길 잃은 나그네를 대접하여 잠자리를 마련해 준다든가, 배고픈 사람에게 따뜻한 음식을 챙겨 먹이는 일, 입을 것이 없는 이들에게 옷을 챙겨주는 일, 여비가 떨어져 목적지에 가는 데 문제가 생긴 이들의 여비를 마련해 주는 일 등은 목사관에 살고 있는 사람들만이 누리는 특별한 은총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들은 대낮에도 올 수 있고, 새벽 두세 시에 올 수도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하여 꼭 도움을 받아야만 되는 사람도 있으나, 자신의 나쁜 습관 (마약, 알코올 중독, 도박 등)의 만족을 위하 여 목사관을 찾아와 도움을 청하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당황하고, 짜증나고, 놀라기도 하였으나, 근 20여 년 동안의 목사관 생활은 언제 어느 때든지 손님 맞는 일에 이력이 나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다른 곳을 헤매다가 박대받거나 나쁜 일에 이용당하지 않고 목사관을 찾은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다행스럽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이 험악해져 가고 믿을 사람들이 없다고 하는 이 불신의 세대에 그래도 목사관에 찾아가면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찾아오는 사람들을 통하여, 우리는 많은 그들의 경험담을 듣게 되고, 하나님의 끊임없는 사랑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갑자기 생각지도 않은 귀한 선물을 남으로부터 받았을 때도 기쁘지만, 그러나 나도 부족한 가운데 있는 것 중의 하나를 전혀 낯선 사람에게 나누어주었을 때의 기쁨이란, 받는 기쁨과는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깊고 큰 것입니다. 그 기쁨은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고 문득문 득 가슴속에 되살아나 내 영혼에 보화로 남게 됩니다.

가을이 스러져 가던 어느 날 오후, 낯선 50대의 한국 남자분이 문을 두드렸습니다. 첫눈에 그는 지쳐 있으며 거의 탈진 상태에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 네! 오늘 아침 34개월 만에 감옥에서 나왔습니다. 이곳에 사는 친구가 있어서 아침 9시부터 이 시간까지 걸어서 찾아왔더니만, 2년 전에 이사갔다고 하는데,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군요. 세상이 무너지는 심정으로 돌아서고 있는데 한국 애들이 놀고 있는 것을 보고……”

그의 검게 타고 눈자위로 흉터가 지나간 얼굴에는 진땀이 비오듯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습니다. 그를 의자에 우선 앉게 하고 부엌에 달려가 보니 다행히도 따뜻한 밥이 솥에 남아 있었습니다. 풋고추와 된장, 고추장, 김치 등을 차리어 수북이 밥을 담아, 찬물 한 그릇과 함께 그를 대접하였습니다. 그가 누구라도 좋았습니다. 버터 섞인 빵과 기름진 음식이 제 아무리 좋아도 한 조각의 벌건 김치엔들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감옥에서 시시때때로 그리며 먹고 싶어했을 밥과 김치, 고추장!

과거 이야기는 나중에 들어도 좋았습니다. 그의 이름을 구태여 알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저 그가 목사관에 찾아온 것이 고맙고 감격스러울 뿐이었습니다. 밥 한 그릇을 차려준 그와의 만남이 눈물겨웠습니다.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과 스쳐가기도 하고 만나기도 하며, 대화를 나누지만 절박한 처지에 있던 그와의 만남은 참으로 귀한 것이 었습니다. 그의 과거가 어찌되었든지, 환경이 어찌되었든지, 그는 분 명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누가 그의 발길을 이곳으로 인도하셨을까? 험상궂은 낯선 나그네 앞에서 만남의 기쁨을 누리는 나에게, 이런 기 쁨을 주시는 이는 누구인가?

그는 두 눈을 감고 식사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겸연쩍은 얼굴 로 과거엔 가끔 교회에도 갔었노라고 말꼬리를 흐렸습니다. ‘실컷 잡 수세요! 그의 밥숟갈이 정신없이 움직였습니다. 눈깜짝할 사이에 두 사발의 수북한 밥을 비우고는 비로소 그는 허리를 펴고 만족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아휴! 감옥에서 김치하고 고추장이 얼마나 먹고 싶었던지 … ….” 그리고 그는 자신의 이름과 나이를 말했습니다. 서른여덟 살, 찬찬히 그의 모습을 들여다보니, 허약한 젊음이 숨쉬고 있었습니다.

“34개월 전 뉴욕의 우드 사이드의 한 식당에서 친구와 나오는데, 두 명의 남자들이 어느 여인에게 강도질을 하는 모습을 보고 달려가서 실컷 갈비뼈가 부러지도록 때려눕혔지요. 나중에 경찰이 오기에, 친구는 가족이 있으니 도망가라고 했지요! 저는 폭력죄로 붙들려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친구는 제가 감옥에 가 있는 동안 단 한번 찾아왔었지요. 저의 전재산인 약 만 달러의 돈도 그 친구가 맡고 있었는데……”

긴 한숨과 함께 그의 눈에서 금방이라도 산화된 눈물이 쏟아져 내릴 것 같았습니다.

그는 1980년 5월, 캘리포니아에 누나의 초청으로 이민을 왔습니다. 그곳에서 착실하게 일하여 야채가게도 차리고 결혼도 했으나, 결혼 3개월 만에 부인과 헤어지며 가게도 남에게 넘겼습니다. 뉴욕에 와 새로운 삶을 시작하여 남부럽지 않게 살리라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여 느 때와 같이 친구와 회포를 풀기 위해 식당에 갔다가 엉뚱한 사건에 연루되어 그는 34개월이란 세월을 철장에서 머물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 한탄과 서러운 세월을 때로는 대항하여 수인들과 싸우기도 하고 맞기도 하고, 벌칙으로 밤새 일을 하기도 하며 정지된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친구를 찾아, 거의 일곱 시간을 이곳까지 걸어왔다는 것 입니다.

“네 돈은 염려 마! 감옥에서 나오는 날엔 뭐라도 시작할 수 있도록 할 터이니……”

그는 친구의 이 말 한마디가 그래도 고맙고 고마웠습니다.

“암! 사나이끼리의 우정인데… … .”

아무런 연락없이 자취를 감춰버린 친구가 원망스러우면서도, 어디선가 그의 이름을 부르며 나타나 줄 것만 같았습니다. 또 그의 어깨를 감싸주며, “고마워! 내 사랑하는 친구여!” 하는 음성이 들릴 것만 같았 습니다. 34개월의 응고된 아픔도 그 한마디에 치료될 것만 같았습니다. 아픔이 거절되었을 때, 인간은 마치도 형극을 당한 것같은 또 하나의 모진 경험을 얻게 됩니다.

“그때 싸우다가 누님 전화번호와 주소가 있는 수첩을 잃어버렸어 요. 누님이 캘리포니아 코리안 타운의 중심지에서 장사를 했어요. 찾아가면 알 수 있을 거예요!”

그는 오히려 나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듯, 염려하지 말라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코리안 타운? 4월 30일에 있었던 Rodney King 사건이 떠올랐습니다. 미음과 원망, 인종 차별의 욕설, 불타는 상점과 집, 대답 없는 911, 장총을 들고 서 있는 한국 청년들, 여인들의 통곡소리, 잿더미 앞에 실성하여 쓰러지는 부부, 초토화된 올림픽 상점가, 총성, 성난 흑인들의 광란, 도둑질 등등.

“혹시 코리안 타운의 화재에 대하여 들으셨나요? … … 거긴 이미 잿 더미가 되어……”

가슴속에 가라앉은 앙금이 갑자기 뿌옇게 일어나며, 그의 얼굴을 차마 마주 대할 수가 없었습니다. 멀찌감치 아이들이 낙엽 위에서 소리지르며 뒹구는 모습이 뿌옇게 안개가 되었다가 사라졌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소식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누님 가게만은 괜찮을 것이라고 다짐하듯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목사님은 그를 면담하고, 어떤 길이 그를 위한 최선의 방법인지 본인의 의사를 물었습니다. 그는 보스턴 어느 유명 음식점에 요리사로 있는 친구를 찾아가기를 원하였습니다. 그 친구라면, 자신이 두 발로 사회에 설 때까지 부담 없이 돌봐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빠듯한 여비와 식사비를 손에 넣은 그는 안도의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떨구었습니다. 그리고 해저무는 길을 총총히 떠나갔습니다.

그가 비워낸 빈 접시를 닦으며, 자꾸만 눈물이 치솟았습니다. 오늘 따라 유난히 붉은 빛을 드러내고 있는 노을 때문인가? 한여름의 폭풍우 비바람 속에서도 끈질기게 생명력을 자랑하던 나뭇잎들이 그가 떠난 자리 위로 우수수 떨어져 내렸습니다.

우리는 번번이 상처를 주고받으면서도 인간을 믿고 찾으며 그리워 합니다. 얼마나 많은 날들과 순간들을 낭패함 속에서 당황하였던가요?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음성은 은폐시키고 방랑의 길을 마다 않고 떠나는 것이 우리의 상정인가 봅니다.

우리의 진정한 친구를 어디서 만나며 찾을 수 있을지? 조나단과 다윗의 영원한 우정을 기억하며, 우리를 불러 ‘친구’라 부르신 하나님의 감히 당해낼 수 없는 그 자비와 사랑에 감격으로 목이 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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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Elderly Friend”

This year, Mrs. Louise Wegi, now 92 years old, decided to sell her car.

Though two years younger in appearance than her actual age, she was still working part-time as a secretary in a law office. Petite in stature and always neatly dressed, she presented herself as well as any young person. She favored pink and blue outfits, never forgetting to accessorize. Her necklaces and earrings, all handed down through generations, were sources of endless stories. Whenever anyone admired them, she would recount their history—when and where they had been purchased, who had given them to her, and what occasion marked their passing down. The missing stones or out-of-fashion colors didn’t matter to her; what mattered was the lineage of the pieces. Her cheerful face, humor, wisdom, and kindness won her deep respect and affection from everyone.

But the signs of aging, slowly appearing year after year, were inevitable. She finally acknowledged she could no longer drive the gray car she had purchased back in 1965. She advertised it in the newspaper and sold it at a good price. Considering most Americans change cars every four years, her car had been blessed with a careful owner. Though 26 years old, its odometer read only 25,000 miles—what most people would drive in two years. This showed her life was stable and without great upheaval; living in the city, she often used buses and trains instead.

“How do you feel about selling the car?”

“Well, first, I’ll save money on insurance. Second, I won’t have to worry about losing it!”

Her thinking was always positive.

“Let’s pop some champagne when the car is driven away!”

“Good idea! After all, we must admit to ourselves when the time has come… Things we could do ten years ago, we cannot always do today.”

Born in 1900, she often emphasized that what she had learned after nearly a century of life was summed up in one word: gratitude. Married at 19, she obeyed her husband’s wish that she not work outside the home. But when he died of cancer in 1950, she supported herself for more than forty years as a secretary.

With a 55-year-old daughter living in a hospital due to cerebral palsy, she even counted as blessings the simplest abilities—being able to dress oneself, to eat by oneself. She spoke with pride that her greatest blessing in life was having a daughter with cerebral palsy, for that daughter opened her eyes to God, gave her a grateful heart for even the smallest things, and became, in her words, “the greatest gift of God.”

“The saddest thing about growing old,” she said, “is having to endure the frailty of the body. When you are young, the body follows the will and spirit. But in old age it is different. Even when the mind urges one step forward, the legs no longer move.”

Her steps grew slower than the year before, and she often spat when she spoke. Yet she faithfully attended church and community programs for seniors, taking responsibility and serving as much as her strength allowed.

I remembered another elderly friend who once told me: “In old age, just knowing you are still among the living is enough satisfaction.” She had served over forty years as a high school English teacher, and after retirement lived alone in a large house. Quiet and reserved, Francis did not like socializing much. Soon after retiring, her health declined rapidly. Finally, she entered a private senior apartment, and within a year, passed away.

“For the first three months, I checked the mailbox every day, hoping someone might send me a letter. But after three months, I gave up even that hope.”

That lonely echo was shared by someone who had visited her for the last time. When news spread that she was moving into the senior apartment, her friends felt both sadness and relief. The facility was renowned for having excellent doctors, nurses, and care 24 hours a day, yet no one could stop her from going.

It was only after spending half my life that I learned to see myself clearly. I regret that for a long time I valued only material “comfort,” making my family suffer and tormenting myself with coldhearted ambition. I now repent of those barren years, and recognize I too am growing old.

“Everything is meaningless, utterly futile; nothing has real value.

What do people gain from all their labor?
Generations come and go, but the earth remains forever.
The sun rises and sets, hurrying back to where it rises.
The wind blows south and north, swirling round and round.
Rivers flow into the sea, yet the sea is never full;
the waters return to the rivers and flow again.

All things are wearisome, more than one can say.
The eye never has enough of seeing, nor the ear its fill of hearing.
What has been will be again; what has been done will be done again;
there is nothing new under the sun.

Is there anything of which one can say, ‘Look! This is new’?
It was here already, long ago.
No one remembers the former generations,
and even those yet to come will not be remembered
by those who follow them.”
(Ecclesiastes 1)

Just as King Solomon lamented the vanity of life, so I also glimpse the fleeting nature of time in my elderly friends.

“At this age, marriage, raising children, wealth, and fame no longer mean anything to me. What I hold onto now is simply gratitude—the joy of living one more day in health, without being a burden to anyone.”

As her car disappeared into the distance with its new owner, Mrs. Louise Wegi slowly waved her hand. At some point in life, she had grown accustomed to letting go of what she once possessed.

Standing in the cold winter wind, her small figure looked like a statue covered with the dust of time, bearing the sign “Past,” unmoving from its place.

(Letter from the Parsonage – Those Who Remained in the City, Story Ten, 1992)

© WanHee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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